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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40화 (340/1,567)

340화. 내가 네게 용서를 논할 자격은 없겠지만. (5)

소림에서 겪은 일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커다란 경험과 자신감을 남겼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화산의 제자들이 더는 천하의 명문에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거든."

처마 위에 드러누운 청명이 히죽 웃었다.

제자들의 비명이 아름다운 노래 소리처럼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악! 사수우우우우욱!"

"죽여라! 차라리 죽여라, 이 양반아!"

"아니! 어떻게 청명이 놈보다 더하냐!"

청명은 제자들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백천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옳지. 잘한다, 우리 동룡이.'

청명이 홀로 끌고 가는 덴 한계가 있다.

그가 처음부터 바랐던 화산의 모습이 이제야 거의 완성이 됐다. 이제는 딱히 그가 직접 나서서 다그치지 않아도 저들끼리 고민하며 화산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고통받는 이들이야 있겠지만.

'약해서 설움 겪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세상이 약자를 위해 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면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이 아는 세상은 강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생각해 보라.

화산이 이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면 소림의 법정이 생떼를 부릴 때 주먹감자를 먹이고 돌아 나올 수 있었겠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힘이 만들어 내는 가장 큰 가치는 자유다. 오로지 힘이 있는 이들만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오래도 걸렸구나."

돌아온 화산에서 옛 화산의 향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그때의 화산은 제자들 모두가 노력하고 경쟁하며 서로 더 강해지기 위해 애썼다.

다들 하나같이 최선을…….

- 아, 사형이랑은 안 붙습니다!

- 괴롭히지 마십시오! 장문사형한테 이를 겁니다!

- 안 한다고요! 안 해요! 악! 왜 때리십니까! 아아악!

- 이노오오오옴! 내가 사제들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느냐! 말 좀 들어 처먹어라! 말 좀!

아…….

생각처럼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청명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을 재빨리 지워 버렸다. 과거는 아름다운 게 좋지. 아름다운 게.

"흐음."

아래에서 죽어라 용을 쓰고 수련하는 화산 제자들을 보며 청명은 슬쩍 웃었다.

'그래, 이제 다들 열심히는 하는데…….'

슬슬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었다.

지금 화산의 과제는 두 가지.

'영향력이 부족해.'

저 빌어 처먹을 구파일방 놈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는 이유는 본문의 힘도 힘이지만 천하에 제자들이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화산이 이대로 천하제일문이 된다고 해도 산속에만 박혀 있는다면 딱히 지금과 달라질 게 없다는 뜻이다.

'산에 처박혀 수련만 하는데 뭐가 달라지겠어.'

한 번씩 식료품을 사러 산을 내려가면 어깨에 힘이야 좀 들어가겠지만, 그냥 그게 전부다.

높아진 실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대외 활동을 늘리고, 천하에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 이게 진짜 돌겠네."

청명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치렁치렁한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다.

사실 이때까지 모두의 실력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느라 잊고 있던 문제였다. 자하신검을 본 덕분에 정말 심각한 것을 놓치고 있었단 걸 떠올린 것이다.

"자하신공은 어떻게 하지?"

자하신공(紫霞神功).

화산에서도 가장 난해하고도 고강한 심법.

소림에 역근세수경(易筋洗髓經)이 있고, 무당에 양의무극신공(兩儀無極神功)이 있다면 화산에는 자하신공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화산의 최상위 심법이다.

"끄으으응."

이것만 전할 수 있다면 화산은 더욱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내가 모르는 걸 무슨 수로 전하라고?"

청명이 짜증을 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빌어먹을! 소림도 역근세수경을 제자들에게 풀고, 무당도 양의무극심공을 슬쩍슬쩍 제자들한테 전해 주는데! 뭐 그리 역사가 깊다고 그걸 혼자 익히냐고!"

안타깝게도, 화산의 자하신공은 오로지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도록 만들어진 무학이다. 때문에 그 청명조차도 자하신공은 익히지 못했다.

대신 자하신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열화판에 불과한 자하강기(紫霞剛氣) 정도나 익혔을 뿐이다.

'자하강기로는 의미가 없어.'

그건 그저 흉내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대로 자하신공을 전하지 못한다면 화산 최고의 심법이 실전된다는 것이다.

화산 최고의 심공인 자하신공과 화산 최고의 검법인 매화검결.

그 두 가지만 갖출 수 있다면, 화산은 무학으로는 천하의 어떤 문파에도 뒤지지 않게 된다.

지금의 화산은 그 양 날개 중 한쪽이 꺾여 있는 셈이다.

"끄으으응. 매화검결(梅花劍結)이야 어떻게든 전하면 된다지만……."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진즉에 좀 가르쳐 주고 죽지!"

- 그럼 네가 장문인 하지 그랬냐.

"에라!"

청문은 전통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화산에 대대로 내려온 규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때는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자하신공 없이도 청명이 온 동네 검수들을 다 패고 다니는데, 굳이 전통을 깨 가며 그에게 자하신공을 전수할 이유가 없었지 않겠는가.

그 빌어먹을 마교 놈들이 쳐들어오고부터는 말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때는 느긋하게 새로운 무학을 익히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화산에서 자하신공의 비급을 지닌 이는 오직 둘뿐이었다.

하나는 청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진.

'그놈이야 화산 모든 무학을 관리했으니까.'

그때 좀 패서라도 자하신공을 빼돌려 봐 둘걸 그랬나?

"쩝."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거나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해결을 해야…….

"야!"

"엥?"

대뜸 귀에 확 꽂히는 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아래에서 백천이 그를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뭘 하기에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느냐?"

"아. 뭐 좀 생각하느라."

"어서 내려와라. 장문인께서 찾으신다."

"알았어."

청명은 주저 없이 처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딜 다녀오라고요?"

청명이 되묻자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해 주었다.

"은하상단에 들렀다 오거라."

"제가요?"

"그래."

청명이 흐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모양새가 좋다. 은하상단은 화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고 있는 동맹이다. 그러니 소림에서 있었던 일을 적당히 전해 줄 필요가 있다.

하나 현자 배나 운자 배가 직접 은하상단을 찾는 건 아무래도 남들 보기에 좋지 않다. 그러니 백천이나 청명이 가는 쪽이 최선이었다.

백천은 지금 한창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놀고 있는 청명이 가는 게 최선이었다.

'간 김에 술도 좀 얻어먹고.'

청명이 씨익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면 되나요?"

"그래. 간 김에 운남 쪽의 일도 좀 살피고 오거라."

"교역이요?"

"그래. 사실 이건 재경각에서 나서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 재경각이 워낙 바쁘다 보니 통 시간이 나질 않는구나. 네가 운남을 직접 다녀왔으니 도움이 될 게다."

"네. 그럴게요."

현종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개방 화음 분타에도 들러서 상황을 좀 알아보거라."

"네."

이번에도 청명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신경을 좀 써야겠더라고요."

"그렇지."

애초에 청명이 거지들을 화음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화산은 이제 명성을 떨쳤다. 강호를 움직이는 거인들의 뇌리에도 화산이라는 이름이 확실히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화산도 외부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한다.

"화음 분타와 잘 연계할 수 있다면, 화산은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네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거지 아저씨는 제가 꽉 잡고 있으니까요."

홍대광뿐 아니라 화음 분타의 구성원들은 모두 청명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 앞으로의 화산에 대하여 너와 할 말이 많지만, 우선은 닥친 일부터 처리하자꾸나."

"좋은 생각이세요. 그럼 지금 가면 되나요?"

"그래. 상단주께 안부 전해 주거라."

"네!"

"급히 돌아올 것 없다. 편히 이야기하고 천천히 돌아오거라."

"알겠어요."

청명이 산뜻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도 조금은 쉬어야지.'

화산에 돌아왔으니 이전보다야 편하겠지만, 청명에게 있어서 화산은 마음을 풀어놓을 만한 쉼터가 되지 못한다.

저 아이 성격에 이것저것 하나하나 다 신경이 쓰일 터이고, 제자들의 수련에도 계속 눈이 가지 않겠는가?

물론 명한 것들이 모두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이토록 바로 움직여야 할 정도로 급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청명을 내보낸 것은 단 며칠이라도 저 아이가 근심을 잊고 귀한 대접을 받으며 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은하상단이나 화음 분타에는 조금 미안하지만 말이지……."

그건 어쩔 수 없지.

허허.

"읏차!"

밖으로 나선 청명이 지체 없이 산문으로 향했다.

"어디 가냐?"

대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백천이 청명을 향해 고개를 획 돌리며 물었다.

"은하상단에 다녀오래."

"성도까지?"

"응."

"흐음. 그럼 족히 하루 이틀은 걸리겠구나."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빨리 오지 말고 비위 좀 맞춰 주고 오라시는데?"

"그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폐 끼치지 말고 다녀오거라."

"내가 애도 아니고."

"……애가 아니니까 문제지."

애가 폐를 끼치는 건 당연한 거지! 너는 애가 아닌데 폐를 끼치니까 문제잖아, 인마!

'……그리 생각하니 좀 불안한데.'

백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따라갈까?"

"사숙이 왜?"

"아무래도 하나라도 더 가는 것이……."

"됐어. 어디 농땡이를 치려고 해. 애들이나 확실하게 갈궈."

"끄응."

청명이 슬쩍 턱짓으로 제자들을 가리켰다.

"남아서 놀던 놈들도 중요하지만, 소림에 다녀온 애들이 좀 더 중요해. 보고 느낀 것은 즉시 체화(體化)하지 않으면 결국은 사라지기 마련이야. 사숙도 마찬가지고."

"그래. 명심하마."

백천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아무튼 다녀올 테니,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누가 누구한테!"

"낄낄낄낄."

청명은 산문 밖을 나서자마자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길로 좀 다녀라. 길로.'

문은 손으로 열고!

그때 윤종을 비롯한 제자 몇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저놈 어디 간답니까?"

"장문인께서 은하상단에 보낸 모양이시다."

"……괜찮을까요?"

"자주 있었던 일 아니냐?"

"아니. 그때보다 애가 맛이 조금 더 간 것 같아서."

"……."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불안해지는 백천이었다.

"……별일이야 있겠느냐."

이때만 해도 화산의 제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짜 문제가 생긴 것은 청명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화산이구나."

"예. 화산입니다."

화산으로 오르는 산길의 초입.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과 장년인들이 모여 묘한 시선으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년 만이지?"

"자그마치 삼십 년이 넘었지요."

"그래. 삼십 년이라……. 실로 길었구나."

선두에 선 노인의 눈에 얼핏 아련함이 어렸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전신에 걸치고 있는 비단 옷은 이 사내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 살아생전 다시 화산에 오를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저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형께서 다시 불러 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노인이 뭔가 결심을 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자꾸나. 현종을 만나야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

"오랜만에 화산을 오르려니 설레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합니다."

"겁낼 이유가 무엇이더냐."

노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리었다.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집은 집인 법이다. 조금의 다툼은 있을지 모르지만, 겁을 낼 필요는 없다."

"예. 사형!"

"그래."

노인이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예!"

그렇게 한 무리의 인원이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 낀 짙은 운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의 상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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