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내가 네게 용서를 논할 자격은 없겠지만. (4)
"끄아아아아아악! 이 망할 놈아!"
조걸이 비명을 지르며 벌렁 드러눕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거 수련도 하고 겸사겸사 좋은 거지! 그 별것도 아닌 비무대회에서 활약 좀 했다고 어디 편히 먹고살려고 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 못 보지!"
"흙? 흙이면 되냐?"
고함을 내지르며 아래에서 솟구친 백천이 바닥의 흙을 움켜잡고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달려들기가 무섭게 뻥 걷어차여 다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아아아아아악!"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모두 아련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용기는 잊지 않겠습니다. 사숙.'
'저 양반도 갈수록 대책이 없어지네.'
'살았으려나?'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다들 빠져 가지고."
청명이 술을 꼴꼴 마시더니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함께 절벽을 기어 올라온 다른 제자들은 완전히 탈진했는지 바닥에 엎어져 고개도 들지 못했다.
운암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청명아."
"응?"
"좀 더 편한 길이 있지 않았느냐?"
"에이. 그럼 수련이 안 되죠."
"……."
아.
그렇지. 이놈이면 이렇게 대답하는 게 당연하지.
새삼 청명이 돌아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는 운암이었다.
"여, 여튼 잘 돌아왔다."
"네, 사숙조. 잘……."
뭔가 말을 하려던 청명이 입을 다물고는 눈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운암의 뒤에 도열해 있는 백자 배와 청자 배들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숨을 죽였다. 청명은 손을 뻗어 도열해 있는 제자들의 허벅지와 팔뚝을 쿡쿡 찔러 보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니, 이것들이 내가 없는 동안 뭘 했기에, 몸뚱어리가 반으로 줄었어?"
"……."
반?
운암이 멍한 얼굴을 했다.
어지간한 산적은 다 씹어 먹을 인상들인데 반이라니…….
저 팔뚝과 옷이 터져라 솟아 있는 가슴 근육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시킨 수련만 제대로 했어도 이럴 리는 없었을 텐데?"
"어……. 그치만……."
그들의 얼굴에 더없이 억울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명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 뭐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지."
"그, 그렇지?"
"그런데 저 뒷사람들도 그리 생각할지 모르겠다."
"……응?"
수레를 끌고 절벽을 기어 올라온 이들이 모두 독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노려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꼴을 당할 동안 다들 편하게 놀고먹었다 이거지?"
"저 팔뚝 얇은 것들 보소? 두드리면 부러지겠네?"
"죽여야 돼! 저것들 죽여야 돼!"
아무 죄도 없는 화산의 제자들은 그저 이곳에서 편히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게……."
그때 한 사람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숙!"
"백상 사숙!"
모두가 구세주라도 본 눈으로 그를 간절히 보았다.
하지만 백상은 한없이 인자하고 푸근하게 웃으며 건너편 봉우리를 가리켰다.
"연화봉 한 명."
"예?"
"……뛰어."
"……."
서로의 눈치를 보던 이들 중 몇몇이 연화봉을 향해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전력을 다해 연화봉으로 달려 나갔다.
"비켜라아아아아!"
"아니, 이게 뭔 개짓이야! 환영 행사 아니었어?"
"환영 행사고 나발이고 비키라고!"
서로 엉키고 엎어지면서도 연화봉으로 달려가는 제자들을 보며 절벽을 올라온 이들이 힘겹게 수레를 움켜잡았다.
"……일단 들어가자. 일단."
끼이이익. 끼이익.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더없이 처량하게 들려왔다.
"쯧. 여하튼 자리를 못 비운다니까."
앞서서 걷는 청명과, 넝마가 되어 수레를 밀고 들어가는 화산의 제자들.
그들을 지켜보던 운암은 한 가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왜…… 아무도 절벽에서 떨어진 백천을 신경 쓰지 않지?'
여하튼.
이제야 그가 알던(?) 화산이 돌아온 것을 느끼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 * *
"감축드립니다, 장문인!"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으음."
현종이 더없이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긴 여정으로 쌓인 피로와 묵은 때를 목욕으로 벗겨 낸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드러났다.
"다들 내가 없는 동안 화산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고생이랄 게 무어가 있겠습니까. 장문인께서 그리 먼 길을 다녀오시는데 저희가 어찌 감히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되지요. 그보다, 소림에서 화산이 활약했다는 소문이 이 섬서까지 들려오니 들뜨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허어. 소문이 그리 빨랐단 말이더냐?"
"예. 덕분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또 기뻐하였습니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운암의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장문인 앞이라 경거망동할 수 없을 뿐, 속으로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허허허허."
현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룬 일을 자평하는 것과 다른 이의 입으로 듣는 것은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
그리고 다른 이도 아닌 저 운암이 저리 신이 난 것을 보니 얼마나 대단한 것을 이루고 왔는지 더욱 실감이 났다.
"좋은 일이지. 우리가 오기도 전에 섬서까지 그 소문이 퍼졌다면, 천하로 소문이 퍼져 나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겠구나."
현상의 말에 운암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장로님.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화음은 난리가 났습니다! 다들 화산이 옛 명성을 되찾고 있음에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 좋은 일이다."
현상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현영이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자찬은 거기까지 하시고."
그야말로 매서운 장로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별일은 없었느냐?"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운남과의 교역 때문에 몇 가지 일을 은하상단과 조율해야 했지만, 크게 바뀐 부분은 없으니 확인하시고 명을 내려 주십시오."
"알겠다. 그 외에는……."
"그 외엔 제가……."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운암이 말을 하다 말고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크흠. 그 외에는……."
어떻게든 무시하며 대화를 이어 가려 애써 보았지만, 그가 말을 할 만한 상황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저 새끼 왜 돌아왔어! 왜!"
"오자마자 이게 뭐 하는 거냐! 으아아아아, 빌어먹을!"
살짝 몸을 부르르 떤 운암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장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이리 밖에서 난리법석을 피우니 무어라 꾸짖을 참이었다.
"……."
하지만 그는 말을 잃고 말았다.
단 한 시진 만에 시커메진 화산의 제자들이 침을 흘리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탄광에라도 넣고 굴렸나.'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뽀송뽀송했는데…….
개방 거지들이 형님 할 몰골로 굴러 대는 제자들의 뒤로 뒷짐을 진 청명이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 양반들이 빠져 가지고! 사람이 없다고 한 달을 내리 놀아 젖혀?"
"수, 수련했다고! 나름 열심히 했다고!"
"나름? 나르으으으음? 마교 새끼들이 칼로 쑤셔도 내가 나름 열심히 막아 봤다고 할 것들이네? 한 달이면 검법 하나를 익히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 시간을 그대로 날려? 오냐. 내가 사형들이 잃은 시간을 되찾아 주지!"
"사, 살려……. 으악!"
눈앞의 참혹한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는 운암의 귀에 인자한 목소리가 스쳤다.
"운암아."
"아? 예! 장문인."
운암은 현종을 획 돌아보았다. 현종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 말려야…….
"닫아라."
"……네."
장문인의 지시대로 조용히 문을 닫은 운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도로 앉았다.
더 서글픈 것은 장로들과 운검은 정말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앉아 있단 점이었다.
'뭔가 좀 변해 오신 것 같은데.'
뭐가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느낌이 좀…….
"여하튼 그래서……."
회의를 이어 가는 내내 그들의 귓가에는 제자들의 비명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 * *
"놀아?"
"……."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소림에서 칼 맞고, 주먹 맞는 동안 신나게 놀아 젖혔다 이 말이렷다?"
화산 제자들의 눈에 물이 차올랐다.
물론 욕을 먹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나름 열심히 수련을 하기는 했지만, 그 '나름'이라는 게 꽤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수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청명이 있을 때와 같은 강도로 수련을 했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욕까지는 먹을 수 있다. 욕까지는.
하지만 그들을 정말 슬프게 하는 것은 지금 앞에서 눈을 희번덕대며 길길이 날뛰는 이가 '그' 청명이 아니라 바로 백천이라는 점이었다.
지옥……. 아니,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가 살아 돌아온 백천은 말 그대로 살기를 줄줄이 내뿜으며 제자들의 귀에 피가 나도록 잔소리를 쏟고 있었다.
'절벽이 덜 높았나.'
'그냥 거기서 죽지.'
그리고 그와 함께 소림에 다녀온 다른 제자들도 하나같이 두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나갈 때는 산적 같았던 것들이 소림에 가더니 마귀가 되어 돌아왔다.
'대체 그 비무대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실력이란 재능으로도 갈리지만, 수련을 얼마나 해 왔는가로 많은 부분이 정해지는 법이다. 그렇다 보니 소림에 다녀온 이들은 대부분 각 항렬에서 배분이 높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반항도 못 하겠고 말 그대로 죽을 맛이다.
"다들 들어라."
"예! 사형!"
군기가 바짝 들어간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이 허리가 뒤로 꺾일 정도로 상체를 젖혀 대며 크게 대답했다.
"이번 소림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다. 단순한 경험만이 아니다. 타 문파의 무학을 눈으로 견식 한다는 것은 확실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
"그런데……."
백천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런 좋은 경험을 너희만 하지 못한다는 건 사형으로서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때워야 하는 법이지. 내가! 이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보고 느낀 것을 너희의 몸에 확실히 새겨 줄 것이다! 이 경험으로 차이가 벌어져 너희가 의욕을 잃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느냐?"
"……."
아니…….
저희 괜찮은데요…….
"……알았냐고."
"예!"
화산이 떠나갈 듯 우렁차게 대답하는 제자들을 보며 백천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딱히 우리가 누구 때문에 개처럼 고생할 동안 너희들이 편히 지냈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절대로!"
'맞구만.'
'누가 봐도 맞는데.'
'예전에는 청명이 놈만 지랄이더니. 이제는 다 같이 이러네! 다 같이!'
백천이 고개를 뒤로 돌려 움찔대고 있는 화산파(?)를 바라보았다.
"얘들아."
"예!"
그리고 엄지로 자신의 목을 죽 그었다.
"조져."
"예!"
선두에 있던 윤종과 조걸이 눈깔을 뒤집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소림에 다녀온 모두가 원한을 풀겠다는 듯 독기 어린 눈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난장판 나기 시작한 화산의 연무장 한구석에 이 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이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산까지 동행해 온 화영문의 문도들이었다.
그들은 개판이 나 버린 연무장을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주님."
"……응?"
"그러니까 화산은 도가의 향취가 흐르는…… 청정한……."
위립산은 슬쩍 제자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너무 오래 전에 와 봐서."
"다들 도인의 본분을 지키는 곳이라고……."
"……예전엔 그랬었지."
"그럼 지금은요?"
"시끄럽다."
크게 헛기침을 한 위립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너희도 소림에서 보지 않았느냐! 화산의 도장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긴 아는데……."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진의를 보거라! 진의를!"
"……그런데 아버지."
"음?"
위립산의 옆에 서 있던 위소행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저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본산에서 수련을 받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저렇게요?"
위립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산의 제자들이 거품을 물고 서로에게 검을 날려 대고 있었다.
위립산은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각을 좀 해 보자꾸나."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뭔가 치명적인 잘못이 있었던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