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내가 네게 용서를 논할 자격은 없겠지만. (3)
"저기 옵니다, 장문인."
"으음. 그렇구나."
저 멀리서 달려오는 백천 일행을 보며 현종은 살짝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조금 걸렸구나.'
시간이 걸린 만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이설의 아버지에 관한 일은 그녀에게 너무도 민감하고 가슴 아픈 일이니까.
그럼에도 굳이 저 아이들을 함께 보낸 이유는 그런 이설이의 아픔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서였다.
사문의 어른들이 채워 줄 수 없었던 마음의 공허를 저 아이들이 채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아픔을 공유한다는 것은 때때로 관계에 위험하기도 하니…….
현종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유이설의 표정부터 살폈다.
'아…….'
그리고 마침내 다가오는 그녀를 본 현종은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안도에서 오는 미소가 그의 만면에 어렸다.
어느새 앞까지 다가온 백천이 선두로 나서서 보고했다.
"장문인. 전원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그래. 다들 고생이 많았다."
"예!"
현종의 시선이 유이설에게로 향한다.
"잘 다녀왔느냐?"
"네, 장문인."
현종은 가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확실히 출발하기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좋은 표정이구나."
무표정 속에 감춘 미묘한 불안함이 사라지고, 보는 사람이 절로 편안해지는 얼굴이었다. 물론 유이설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같은 무표정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마음은 조금 편해졌느냐?"
"네."
"그래. 그걸로 됐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이설은 묵례를 해 보이곤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새를 못 참고 아웅다웅하는 백천 일행 사이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자니 현종은 절로 웃음이 났다.
'제자리라는 겐가.'
과거의 유이설은 화산의 어디에도 섞여 들지 못했다.
현종의 손을 잡고 화산에 오른 순간부터, 유이설은 화산의 제자가 되어 살아감을 천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산의 제자들을 완전히 친인으로 여기지는 못했다.
물론 그런 유이설이 잘못되었다 여긴 건 아니었다.
그런 삶의 방식 역시 있을 것이다. 현종은 굳이 유이설의 삶에 옳고 그름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유이설의 삶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현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저리 아이들과 함께 있는 유이설의 모습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저 아이가 이설이를 바꿔 놓은 것이겠지.'
현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유이설이 변하기 시작한 시점은 청명이 화산에 들고부터다. 청명의 어떤 점이 그녀를 바꾸었는지 현종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유야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저 아이는 대체 화산을 얼마나 더 바꿔 놓을 것인가?'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하지만 청명은 결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되겠지.
현종이 흐뭇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도착한 순간부터 청명은 혼자 곧장 수레로 달려가 실린 물건을 점검하고 있었다.
'꼼꼼하기도 하지.'
그렇지. 그렇지.
문파를 이끄는 이라면 저런 부분도 필요한 법…….
"백상 사숙."
그 순간 청명이 고개를 비딱하게 꺾으며 몸을 획 돌렸다.
"으, 으응?"
갑자기 지목당한 백상이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청명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동전이 하나 비는데?"
"……."
백상이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그럴 리가 없다! 자는 시간 말고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하게 지켰단 말이다!"
"뭐? 돈을 앞에 두고 잠을 자? 이 양반이 정신이 나갔나! 어디 돈 지키는 사람이 잠을 자고 있어!"
"……."
입이 삐쭉 나온 백상이 툴툴대며 말한다.
"아니……. 뭐 대단한 거 없어진 것도 아니고, 동전 하나 가지고……."
"뭐? 동전 하나?"
청명의 눈이 획 돌며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사숙을 판다고 동전 하나 나올 것 같아? 어? 화산이 언제부터 부자였다고 동전 하나를 우습게 봐? 그것도 재경각 소속이? 호오오오?"
"아, 아니."
당황한 백상이 장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현종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 척하자.'
군자는 삿된 것을 보지 않는 법이다.
아암.
현종은 쉴 새 없이 길을 재촉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장문인 없이 화산을 너무 오래 비워 두었기 때문이다.
장문이나 장로들이 자리를 비워도 대신해 줄 이가 넘쳐나는 다른 명문들과는 다르게, 화산은 현자 배 셋이 빠지면 문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
운자 배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겠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화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문인! 저기?"
"오."
현종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달려온 덕분인지 마침내 저 멀리 화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산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한 달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몇 년은 떠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지쳐 있던 제자들의 걸음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천 역시 눈앞의 화산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정말 길지 않았습니까? 사숙?"
"그래, 길었지. 누구 때문에 훨씬 더 길게 느껴졌지. 나는 저놈이 사고 치지 않을까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느라 몇 년은 늙은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사고는 사숙이 치지 않았습……. 아닙니다."
눈을 부라리는 백천에게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윤종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 양반도 예전에는 온화한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힘으로 사람을 겁박하려 든다.
'다들 물들어서는.'
이래서야 화산이 제대로 서겠는가?
"여하튼 서두르자꾸나. 오늘 내로는 화산에 올라야지."
"예! 사숙!"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였다.
"……그런데 사숙."
"응?"
백천이 조걸을 돌아보았다. 조걸은 어쩐지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왜 그러느냐?"
"……저거 말입니다."
"응? 뭐?"
"저거요. 저거."
조걸이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수레와 그 위에 드러누운 청명이었다.
"새삼스럽게 저건 왜?"
"청명이 말고 수레 말입니다."
"……수레? 수레는 또 왜?"
조걸이 정말 입에도 담기 싫다는 듯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설마 저걸 끌고 화산을 오르는 건 아니겠죠?"
"……."
수레가 한 대도 아니고 자그마치 네 대.
짐과 돈이 한껏 실려 봉긋하게 솟아 있는 그 위풍당당한 모양새를 보며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에이.
설마…….
* * *
"슬슬 오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오늘은 도착하시겠지."
화산의 제자들이 산문 앞에서 초조하게 손을 비볐다.
시일을 따져 보면 오늘쯤에는 도착해야 맞다.
"오늘 안 오시는 것 아닙니까? 일정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꾸나."
운암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오늘은 도착한다고 연통이 왔는데.'
본디 여행이란 이런저런 변수를 동반하니, 하루나 이틀쯤 지체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입장에서 가슴을 졸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준비는 다 끝났느냐?"
"몇 번을 물어보십니까. 애초에 끝내 놓았습니다."
조금 퉁명스러운 그 대답에 운암은 빙긋 웃었다.
'현영 장로님께서 왜 그리 음식을 준비하느라 애를 쓰셨는지 이제 알겠구나.'
과한 게 아닌가 종종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가 모두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자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백 년간 다시없을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이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업고 화산을 돌아다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따뜻한 밥이라도 준비하고 싶었다.
"장문인께서도 먼 길에 지치셨을 테니 기쁘더라도 적당히 환영하고 오늘은 쉬게 해 드리자꾸나."
"예, 사숙!"
"걱정 마십시오, 사형!"
산문에 길게 도열한 화산의 제자들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비무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듣고 모두가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두가 이 영광을 쟁취해 온 사형제들을 세상 다시없을 기쁨으로 환영해 줄 준비를 끝마쳤다.
그래. 더없이 즐거운 자리가 될 것이다.
그때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이가 손을 번쩍 들며 아래를 가리켰다.
"저, 저기!"
"엇, 저, 정말! 저기! 저기 올라옵니다, 사숙!"
"오?"
운암이 재빨리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오오오!"
마치 날아오르는 듯 산을 올라오는 네 사람이 보였다.
현종과 현영, 현상, 그리고 그 뒤로는 운검이 따르고 있었다.
"장문인!"
"장로님들!"
"관주님!"
화산의 제자들이 재빨리 허리를 낮추며 예를 표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문인!"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다가온 현종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늦어 너희를 고생시킨 모양이구나. 뭐 하러 이리 나와 있었느냐?"
"당연한 일입니다, 장문인."
운암이 더없이 환한 웃음으로 그를 반겼다.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이들을 환영하는 자리다. 하루쯤 서 있는 것이 무어가 대수겠는가?
"정말,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장문인께서 아이들을 이끌고 이룬 일에 제자들 모두가 더없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현종이 사람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다 저 아이들이 한 일이지."
"장문인께서 이끄셨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정말 한 게 없다. 칭찬을 하려거든 저 아이들에게 해 주거라."
"하하."
늘 그랬듯 모든 공을 아이들에게로 돌리는 장문인을 보며 운암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어째 뒤로 따라와야 할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의 물음에 현종이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곧 올라올 것이다. 아! 그, 그럼 나는 안에 볼 일이 있어서 이만."
"예?"
"이따 보자꾸나."
현종이 잽싸게 처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로들 역시 부리나케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으응?'
심지어 운검조차도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런 장로들을 뒤따랐다.
"사제?"
"소, 소피가 급해서 이따 뵙겠습니다, 사형."
"응?"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는 운검을 보며 운암은 도대체 그 연유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니, 왜 다들 저리 급히…….
그때였다.
"옵니다!"
"오!"
운암이 고개를 획 돌렸다.
어째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장문인의 말대로 맹활약을 한 이들은 화산의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을 환영해 주어야 한다. 그는 환히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다들 어서……. 응?"
하지만 그의 말은 뚝 끊어졌다. 앞을 보는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반쯤 기듯 화산의 절벽을 타고 오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끄으으으으……."
"끄으으! 망할! 산은 왜 이렇게 가팔라서!"
"저, 절벽에서 세 번은 떨어질 뻔했어."
두 눈에 핏발이 선 제자들이 몸에 긴 줄을 친친 감고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저 줄은 뭐…….'
그리고 기듯이 산에 오른 이들의 뒤로 줄에 감긴 커다란 수레가 불쑥 솟구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운암이 입을 쩌억 벌린다.
'저걸 메고 올라왔다고?'
미친.
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 곳곳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무공을 익힌 이들도 왕왕 낙사하는 곳이 바로 화산의 험로(險路) 아니던가.
그런데 그 길을 수레를 매고 올랐다고?
게다가 수레가 한 대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절벽 끄트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내민 조걸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악을 썼다.
"망할! 망할! 어차피 그냥 돈인데! 전표로 바꾸거나 전장에 맡겨 버리면 되지! 미쳤다고 이걸 여기까지 끌고 올라오냐, 이 망할 놈아!"
"거 말이 많다."
엥?
조걸이 빨빨 기며 절벽으로 오르자 다른 청자 배들도 핏발이 서 시뻘게진 얼굴로 줄줄이 산을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매여 있는 줄을 따라 커다란 수레가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레 위에…… 청명이 있었다. 한 손에는 술병을 든 채 드러누운 그를 보며 운암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운암은 새삼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얘들 원래 이랬지.'
그리고 마음 깊이 실감했다. 화산에서 훈훈하고 정상적인 환영 행사 같은 게 벌어질 리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