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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37화 (337/1,567)

337화. 내가 네게 용서를 논할 자격은 없겠지만. (2)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어두운 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던 아비의 모습이.

그는 빗속에서도, 눈 속에서도 언제나 검을 휘둘렀다. 손아귀가 터져 피를 흘리면서도, 입술이 갈라져 부르틀 지경이 되어도.

언제나. 언제나.

그녀의 기억 속, 아비는 언제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아비를 몰아붙이는지 어린 유이설은 알지 못했다.

기억이 있을 무렵부터 그는 그저 언제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눈을 뜨면 검을 휘두르고, 해가 지도록 휘두르고 또 휘두른 뒤,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면 다 타 버린 비급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그리고 때로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나는 돌아간다.

그는 어린 유이설을 부여잡고 말했다.

언제고 완벽한 매화를 피워 낼 수 있게 된다면, 네 손을 잡고 화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사문의 어른들께 용서를 구할 것이라고.

- 나는 매화를 피울 것이다.

유이설이 가만히 눈을 떴다.

"화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아버지는."

"……."

"그러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사문을 등지고 버렸으니까. 그런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가 용서를 빌 수는 없으니까."

"……그럼 저 비급이……."

유이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복원할 생각이었어요. 저 비급을 복원해서 화산에 매화를 돌려준다면, 달아난 자신을 용서해 줄 거라고."

그 말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복원?

저걸로?

'말도 안 되는 짓을…….'

복원이라는 것은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다. 반 이상 소실되어 버린 비급을 바탕으로 그 원형을 추적한다는 것은 사막에서 단 하나의 모래알을 찾아내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

"흐음."

청명이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가만히 서책들을 내려다보았다.

저 수십 권의 서책은 아버지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정화들은 마지막 한 권의 서책에 모아졌다.

"나날이 쇠약해져 갔어.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것은 사람을 갉아먹으니까."

"……."

게다가 쇠약해진 것은 몸만은 아니었다.

숨이 다하기 전, 아버지는 거의 광인이나 다름없었다.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팔로 검을 휘두르고, 시체처럼 움푹 꺼진 눈으로 비급을 미친 듯 읽었다. 새로운 것을 수도 없이 써 내려가고 다시 그 모든 것을 정립하기를 반복했다.

하나.

그녀의 아버지는 끝끝내 화산의 검에 닿을 수 없었다.

아득할 만큼 눈이 퍼붓던 날.

눈보라를 맞으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던 그녀의 아버지는 바닥에 몇 번이고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정립해 오던 비급을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 나는 닿을 수 없다. 나는! 나는…… 나는 닿을 수 없어…….

처절하게 흐느끼던 아비의 모습은 유이설의 기억에 화인처럼 새겨져 있다.

- 이설아…….

죽어 가던 그는 유이설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 네가 매화를 피워 내야 한다. 아니, 너는 절대 매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니야. 아니야. 네가……. 아니! 너는 안 된다. 너는 나처럼 되어서는 안 돼.

어린 유이설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말.

- 사문은 나를 용서할까……. 그들을 버리고 떠난 나를 이해해 줄까……. 화산의 매화가 보고 싶구나……. 매화가…….

그게 아비의 유언이었다.

유이설은 며칠을 그 오두막에서 시신과 함께 지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싸늘하게 식은 아비의 곁에서 찢어 발겨진 서책을 하나하나 맞추었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가 오두막을 찾았다. 최후를 직감한 아비가 마지막으로 보낸 연통을 받고 달려온 현종이었다.

그는 거의 아사 직전의 유이설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했다.

- 이 멍청한 사람아……! 어쩌자고! 어쩌자고!

현종은 어린 그녀를 부여잡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의 손에서 느꼈던 온기가 아직도 그녀의 등허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직도.

유이설이 무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바보였어."

"……."

"화산을 버렸지만 버리지 못했지. 화산을 뛰쳐나올 때는 무언가 다른 삶을 바랐던 모양이지만,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화산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평생을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녀의 시선은 활활 타는 모닥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전히 아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다면 왜 화산을 버렸는가? 버렸다면 잊었어야지, 왜 놓지 못했는가. 그리고 그토록 그리웠다면 왜 고개를 조아려 돌아가지 못했을까?

여전히 그녀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고."

입을 열었던 당소소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 꾹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이설에게 해 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저 담담한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을지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걸이 입을 열었다.

"허면……."

그의 시선은 잔뜩 쌓인 비급들로 향해 있었다.

"장문인께서는 어째서 저 비급을 회수하지 않으신 걸까요? 아무리 반쪽도 안 되는 비급이라지만 그래도 이십사수……."

"저건 못 써먹어."

청명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저걸 화산에 가져갔다가는 자신들도 복원을 해 보겠다고 설치는 이들이 나왔겠지. 그럼 화산은 정말 망했을 거야.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모두가 고통받았을 테니까."

어설픈 희망은 고통스런 절망보다 더욱 잔혹할 때가 있다.

그때의 화산에 저걸 바탕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복원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이건 천하의 누구라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설사 청명이라 해도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알지 못한 채 저 비급을 복원했다면 원형과는 전혀 다른 청명만의 검술이 새로 태어날 뿐, 매화검법의 원형에는 닿지 못했을 것이다.

'멍청한 짓을…….'

청명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없이 멍청하고, 한없이 미련하다.

하나…….

'그만큼 간절했겠지.'

화산에 돌아가 화산과 함께 죽어 갈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 어떻게든 화산을 부활시킬 열쇠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설령 그게 헛된 집착이라 해도 말이다.

"사고는 그래서……."

"아니."

유이설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버지를 옹호하지 않아. 아버지는 화산을 버렸어. 화산의 제자인 나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사고."

"장문인께서는 용서한다고 하시지만, 용서받을 수 있는 일 아니야. 사문을 버린 이가 무슨 수로 용서를 받아. 그러니……."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오래도록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감았다.

"괜한 소리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값싼 동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모두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때 청명이 불쑥 말했다.

"됐으니까 자자."

제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결론만 보면 그냥 지나는 길에 아버지 무덤에 들렀다. 뭐 그 정도의 이야기 아닌가?"

"청명아!"

백천이 노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정작 유이설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사자가 그러니 백천도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유이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들르고 싶었어. 어쨌든 화산이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단 걸 알면 기뻐할 것 같아서."

하지만 청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야."

"……알아."

"뭔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려나 했네. 나는 잔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면 다들 빨리 자 둬. 하루 낭비한 만큼 더 빨리 달려야 할 테니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두막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남은 화산의 제자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이설이 말했다.

"사형."

"응?"

"저희도 자요."

"……그래. 그러자꾸나."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청명의 말대로 이 이야기를 계속 꺼내는 것도 그녀에게 유이설에게 썩 좋지 않을 것이었다.

"……말해 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어두운 밤하늘로 향했다.

"남이 아니니까."

이제는.

유이설은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두막 안, 여기저기 늘어져 잠든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언제?'

잠든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 함께 오두막에 들어와 누운 기억까지는 나는데…….

'많이 피곤했던 건가?'

그런 모양이었다. 실제로 모두 세상모르고 잠든 것 같았고.

그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고."

돌아보니 당소소가 눈을 감은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고……."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곤히 잠든 그 옆모습을 보던 유이설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작은 위화감을 느끼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없어.'

오두막에 누워 자고 있는 이들 중 청명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유이설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거의 꺼진 모닥불 근처에도 청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이설이 슬쩍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홀린 듯 바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졸졸졸졸.

독한 화주가 무덤에 뿌려졌다.

듬성듬성 풀이 자라난 무덤이 축축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이내 한 병이 모두 비워지자, 청명이 새 술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무덤에 뿌렸다.

한참을 그렇게 술을 뿌리던 청명은 이내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지체 없이 술을 꼴꼴 넘긴 청명은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훔쳤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같으니."

그는 이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라면 화산을 버리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망해 가는 문파를 버리고 나왔다면 잘살기라도 해야 한다. 더구나 어린 딸까지 딸린 놈이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목숨까지 내던진 것은 어떤 말로도 옹호받을 수 없는 일이다.

멍청하고, 한심하고, 병신 같다.

하지만…….

"그런데 나는 대체로 병신들을 좋아하거든."

청명이 피식 웃었다.

가만히 웃던 청명의 얼굴이 점점 변해 갔다. 무덤 앞에 주저앉은 그는 술을 들이켜고는 길게 탄식했다. 그 탄식의 끝에, 진심이 튀어나왔다.

"……미안하다."

알고 있다.

이것은 청명의 죄.

무너져 가는 문파를 버리고 떠난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세상 누가 무너져 가는 문파를 부여잡고 함께 죽어 가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남은 이들이 대단한 것이지, 남지 않은 이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왜 그랬느냐. 이 멍청한 놈아……."

버렸으면 잊어야지.

왜 멍청하게 버려 놓고도 잊지 못하고 후회했느냐.

멍청한 놈아.

"나는……."

청명은 봉분에 기대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사실 북해로 가고 싶었다."

마교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피가 거꾸로 솟았다.

옆에 현종이 없었다면 법정의 멱살을 부여잡고 거기가 어디냐고 악을 썼을 것이다. 세상에 마교와 관련된 것은 단 하나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죽어 간 사형제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직도.

"그래도 갈 수가 없지. 그래도……."

혹여 그가 해를 당하기라도 한다면, 남겨진 화산은 다시금 과거처럼 몰락할 것이다. 청명이라는 구심점을 잃는다면 지금의 화산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견제를 감당할 힘이 없으니까.

화산은 다시 몰락할 것이고, 유이설의 아버지 같은 이들이 다시 나타나겠지.

그래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으니까.

속이 문드러지고 찢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모습만은 다시 볼 수 없다. 화산이 다시 몰락하는 순간이 온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네게 용서를 논할 자격은 없겠지만……."

청명의 손끝이 젖은 봉분 위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제 쉬어라. 화산에는 다시 매화가 필 테니까."

그리고 술병을 문 채 격하게 고개를 젖혔다. 독한 화주가 목을 긁는 감각이 오늘따라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래."

던지듯 술병을 내려놓은 그는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화가 보고 싶다고 했지?"

스르르르릉.

검 뽑히는 소리가 고요한 산속에 울렸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보여 줘야지. 그래."

취한 듯 휘청이던 청명이 가만히 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것만 같다.

이 인적 없는 산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이의 모습이.

버리지 못한 미련과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고통받으며, 오로지 검 하나에만 집착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건 마치…….

스으으읏.

청명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매화점개(梅花漸開)를 시작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진다.

어떤 기교도 없는 완벽한 원형 그대로의 매화검법.

유이설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피우려 했던 화산의 매화가 지금 청명의 검 끝에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봐라.

이 멍청한 놈아.

이게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화산의 매화다.

한 번은 지고 말았던 것.

다시 피기 위해서 너무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

완전한 매화검법이 그려 낸 화산의 매화가 척박한 땅을 붉은 매화의 숲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화산의 매화가 피는 곳이라면 그곳이 화산.

그러니 이곳도 그저 화산이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의 숲에서 한 검수가 검무를 춘다.

아직 차마 보내지 못한 미련을 잘라 내듯이. 아름답게 움직이는 검 끝은 단호하지만 서글펐다.

그리고…….

멀리서 환상처럼 피어나는 매화를 바라보던 유이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

내리깔린 그녀의 속눈썹이 떨리었다. 그리고 이내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너의 매화를 찾았느냐?

아직.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유이설이 눈을 떴다.

환상과도 같은 매화의 숲이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의 검 끝에서도 완벽한 매화가 피어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되면 죽은 그녀의 아버지도 마침내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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