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내가 네게 용서를 논할 자격은 없겠지만. (1)
위립산이 계속 뒤쪽을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옆에 있는 장문인을 보며 입을 뗐다.
"저기…… 장문인."
"음?"
현종이 위립산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화영문으로 가려면 저희는 이쯤에서 길을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 그렇구나."
그 말에 현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위 문주."
"예! 장문인!"
"이 기회에 제자들에게 화산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니겠는가?"
"물론입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제자들 역시 바라마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 저희가 이리 함께 따라가면 괜히 본산에 누가 되지 않을는지……."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게나."
현종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으려는데,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위 문주가 이번에 소림에서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누 같은 말을 하는가. 아무 걱정 마시게나."
"……."
현영이었다.
현종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거 좀 에둘러서 좋게 말할 수도 있는데, 저놈은 왜 이렇게 요즘 입만 열면 돈 이야기란 말인가.
아니, 하긴 예전에도 입만 열면 돈 이야기 했지. 예전에는 돈이 없다고 역정을 냈고, 요즘은 돈을 번다고 박수를 쳐 댄다는 정도의 차이뿐.
"그런데……."
"음?"
"소도장들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
위 문주의 물음에 현종이 조금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러 간 것이네."
"……."
그 표정이 무거워 보여 위립산은 차마 더 묻지 못했다.
"그보다……."
현종이 뒤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길이 조금 험해질 테니, 수레를 좀 더 잘 지키도록 하세나. 녀석이 돌아왔을 때 수레에 문제가 생기거나 돈이 빠지는 일이 있다면 끔찍한 일이 터질 걸세."
잠깐 멈칫한 위립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장문인. 제가 엽전 하나 흐르는 일 없이 지키겠습니다."
"부탁하네."
위립산과의 대화를 마친 현종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가만히 옆에서 듣고만 있던 현상이 넌지시 물었다.
"장문인."
"……왜 그러느냐."
"이설이를 보낸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굳이 아이들을 함께 보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 물음에 현종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다 답했다.
"그 아이들도 보아야지."
"……."
"진정 힘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언젠가는 그 아이들이 화산을 이끌어 나갈 것인즉, 그 아이들이 이설이의 아픔을 이해해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현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설아…….'
가만히 눈을 감은 현종은 입 속으로 조용히 도호를 외었다.
* * *
'어디까지 가는 거지?'
백천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앞서 달리는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이른 새벽에 출발을 했건만, 벌써 해가 서산 너머로 느릿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이설의 발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산이라.'
앞쪽에 보이는 건 모두 산이라 유이설이 말하는 산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천은 새삼 자신이 유이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당소소는 당가주의 딸이고, 조걸은 사천의 상가 출신이다. 윤종은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화산의 장로가 주워 온 아이고, 청명은…….
'그냥 거지지 뭐. 초삼이 새끼.'
하지만 유이설에 관해서만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유이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늘어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청명이 들어온 이후에야 말수가 좀 늘었지. 예전에는 한 달 동안 채 두세 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그저 같은 화산의 문도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그녀의 뒤를 따르다 보니 새삼 과거가 궁금해지는 백천이었다.
그리고 청명의 과거도…….
"……뭐가 이렇게 멀어?"
"내려와! 이 새끼야!"
"거 말이 말도 하네."
"사숙! 이 새끼가 등에서 안 내립니다! 이 새끼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아니.
저 새끼의 과거는 궁금하지 않다. 알면 속만 터질 것 같으니까.
해가 서산 너머로 완전히 넘어갈 즈음에야 유이설이 뜀박질을 멈추었다.
그녀는 꽤 험준해 보이는 커다란 산의 초입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올라가면 되는 거냐?"
그녀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흔쾌히 말했다.
"그럼 올라야지."
그때 청명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대체 뭐 한다고 하루 종일 달려와서 산까지 오르는 건데? 날도 저무는구만."
"너는 안 달렸잖아, 이 새끼야!"
조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청명이 슬쩍 시선을 내렸다.
"사형, 사형."
"응?"
"내가 사형이 하체가 부실한 것 같아서 일부러 단련이라도 시켜 주려고 이러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적당한 바위도 하나 올려 줄 수 있어."
"……산 정상까지 아늑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쯧."
유이설은 그런 청명을 흘끗 보더니 곧장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머지도 모두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로 뒤에 있던 당소소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사고. 많이 올라가야 하나요?"
"정상까지는 아니야."
조용한 대답에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이설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이들이야 저 무표정한 얼굴에서 별다른 차이점을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소소의 눈에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가는 게 확실하게 보였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복잡한 감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기쁨. 그리움. 아련함. 슬픔.
유이설의 표정에서 이토록 다양한 감정이 드러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 앞에 대체 뭐가 있기에 유사고를 저리 동요시킬 수 있는 걸까?'
항상 굳건한 마음을 유지해 오던 유이설이다. 저 청명조차도 검수로서의 마음가짐은 유이설이 화산제일이라 평하지 않았던가?
궁금증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런 당소소의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유이설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경공 전개 속도를 줄여 천천히 뛰더니 이내 걷기 시작했다. 따르던 이들 역시 그런 유이설에게 보조를 맞추었다.
저벅. 저벅.
나무가 점점 줄어들더니 우거진 숲도 조금씩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산의 제자들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너른 공터였다.
"……사매?"
백천의 의문 어린 목소리에도 유이설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한곳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홀린 듯 걸을 뿐이었다.
못 들은 걸까 싶어 백천이 다시 입을 뗐다.
"사매 대체 이곳은……."
"사숙, 잠시."
하지만 그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음?"
윤종의 목소리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아…….'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이설이 향하는 곳에, 살짝 돋아난 둔덕 같은 것이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 높이가 낮았다.
"……."
그것은…… 무덤이었다.
산 한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무덤.
그걸 보는 순간 그녀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그락. 사그락.
유이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 밟는 소리가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
바람이 스쳐 지나는 소리.
그리고 발에 밟히는 풀 소리까지.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무덤 앞에 도착한 유이설은 가만히 봉분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요."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아버지."
타닥타닥.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앞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봉분에서 꽤 떨어져 있는 오두막을 정비한 이들은 하루 묵어가기 위해 간단히 짐을 풀었다.
"어우, 추워."
청명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모닥불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을 흘끗 바라보았다.
얼마나 방치된 걸까?
5년?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낡았다.
'최소 10년은 된 것 같은데.'
중간 중간 무너지지 않게 손을 본 흔적은 보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지는 10여 년이 넘은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하면 10년 전에는 여기에 사람이 살았다는 건데.'
기이한 일이다.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 고행을 위해서 자신을 몰아붙이거나, 사람과 마주쳐선 안 될 죄인이나 숨어들 만한 곳이다.
청명은 유이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마 그녀는 과거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아마 그 무덤의 주인과 함께.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만 무심하게 이어졌다. 누구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분위기가 사람을 짓누른다고 느껴질 즈음, 유이설을 제외한 화산의 제자들이 백천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빨리 물어보십쇼.'
'…….'
눈으로 대화를 마친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매."
"네."
"조금 전 그 무덤은?"
"……아버지예요."
"아, 그렇구나……. 음."
백천이
'됐지?'
하고 묻는 듯 슬쩍 제자들을 돌아보자 모두가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망할 것들.'
여기서 뭘 더 물어보는 게 사람이 할 짓이냐, 이것들아?!
백천은 어물쩍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사매는 예전에 이곳에서 아버지와 살았던 건가?"
"네."
짧은 대답이었다. 그는 살짝 머뭇거리다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이제는 그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긴 사람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살았던 거지?"
유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백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당황한 백천은 얼른 덧붙였다.
"아,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천이 움찔했다.
"아니. 사매 내가……."
그런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대뜸 한쪽 구석의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응?'
손으로 바닥을 삽시간에 파낸 그녀는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반쯤 썩은 궤짝이었다.
손이며 옷에 흙이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궤짝을 소중히 들고 나온 그녀는 화산의 제자들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모두가 그것을 바라보자 유이설이 궤짝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서책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서책?'
'비급인가?'
하지만 그 많은 서책 어디에도 제목이라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유이설은 서책들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무심한 손길이었다.
그렇게 수십 권을 모조리 내려 둔 그녀의 손이 어느 순간 살짝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궤짝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두 권의 책자가 들려 나왔다.
그중 한 권은 갈가리 분해됐던 것을 이어붙인 듯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누더기 같은 서책의 중간 중간 검은 얼룩이 보였는데, 이게 피가 말라붙어 생긴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매…… 그건?"
반쯤 불타 버린 서책.
아니, 불타 버린 부분이 너무 많아서 서책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종이 쪼가리.
앞면에는 제목이었던 걸로 보이는 글자 몇 개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십사(二十四)와 매(梅). 그리고 법(法).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글자들만으로도 이 서책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모두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문이 그토록 찾아다녔던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비급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반 이상이 불타 버려 더는 비급이라 불릴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양손에 들린 서책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고요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화산의 제자였어요."
윤종이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 같지 않은 유이설의 목소리가 그를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달아난 화산의 제자. 화산의 제자로 살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문파를 뒤로하고 도망친 사람."
"……."
"그러면서도……."
유이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로 화산을 잊고 살 수는 없었던 사람. 화산을 뒤로했음에도 마지막까지 화산을 버리지는 못했던 사람. 그러니까……."
바보 같았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