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334화 (334/1,567)

334화. 이게 왜 여기서 기어 나와? (4)

법계가 노기를 어쩌지 못하는 얼굴로 방장의 거처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사라지는 현종과 청명에게로 향했다.

"……방장."

울분을 참아 내는 듯한 법계의 목소리에 법정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법계가 물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말이더냐."

"화산 말입니다!"

법정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불자라는 이가 노기에 마음을 빼앗겨 그리 높은 목소리를 내다니. 너나 나나 아직은 멀었구나."

"하나, 방장!"

"목소리를 낮추거라."

준엄한 목소리에 법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속에서 노기가 치솟아 오르지만, 방장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가 불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 가장 속이 타는 이는 법정이리란 걸 아는 탓이었다.

"그리 화낼 것 없다."

법정이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불호를 외었다.

"저들은 결국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되겠습니까?"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법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자하신검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신물이라는 건 그저 문파의 상징이 아니다. 그 문파의 역사와 얼이 담겨 있는 물건이지. 너는 소림의 녹옥불장을 타문파에서 보관하고 있다 하면 어찌하겠느냐?"

"그 문파와 소림 둘 중 하나는 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 저들의 말은 다르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화산은 소림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있다."

법정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러니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화산은 지난 마교와의 전쟁으로 과거의 많은 것을 잃었다. 전통이 끊긴 이들은 더더욱 전통에 집착하기 마련. 지금이야 저리 말하지만 내일쯤 되면 제 발로 나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법계는 괜히 문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방장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차오르는 미묘한 불안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소림의 사사로운 감정을 채우기 위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천하를 위한 일이지. 정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천하를 위한 일을 거부한다면 어찌 정파라 할 수 있겠느냐?"

법정이 불호를 외더니 잠깐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은 그리 많이 알려진 이가 아니지만, 군자이자 도인이라 들었다. 그런 이가 천하를 도탄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그리되겠습니까?"

"내 말이 언제 틀린 적이 있더냐?"

법계는 살짝 대답을 망설였다.

과거였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법정의 예상이 화산에 한해서는 계속 맞아떨어지질 않고 있으니까.

아직 조금 미심쩍어하는 듯한 법계의 표정을 보며 법정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실수는 누구나 저지르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느냐다.

화산이 소림에게 큰 망신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나, 이 상황을 잘 수습해 화산을 소림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 망신은 이내 망신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화산이 저 남만야수궁의 마음을 녹인 것은 명백한 사실.

그건 소림뿐 아니라 천하의 어떤 문파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마교의 종적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산의 협조를 끌어내야 한다.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 두고서라도 말이다.

"부모 잃은 자식은 부모를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화산은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문파지. 그런 이들이 화산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현검의 애병이자 화산의 신물을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미타불."

"……."

"매화검존의 유진(遺塵)을 수습할 수 있었다면 좀 더 확실했겠지만, 대현검 역시 화산에는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두고 보거라. 지금이야 기분 좋게 나갔지만, 오늘 밤 저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쯤이 되면 제 발로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겠지."

여유로운 법정의 얼굴을 보며 법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법정이 저리 자신하는 것을 보면 이번 일도 결국은 그가 안배한 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리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되어야 했는데…….

다음 날 아침.

"……갔다고?"

맹세코, 법계는 법정의 저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언제나 현기로 넘치던 법정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고개를 뒤틀고 있었다.

"……예."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갔다고?"

법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 하고 있나 확인을 하러 가 보았더니, 전각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

법정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뒤흔들렸다.

"아, 아니. 자, 잠시……. 잠시.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듯 연신 불호만 외어 댔다. 그러더니 물었다.

"어디, 어딜 갔단 말이더냐?"

"……그야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이 상황에 그냥 가 버렸다고……?"

법계는 대답 대신 멍한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방장이 이런 멍청한 질문을 연이어 해 대는 꼴도 단언컨대 살면서 처음 보았다.

"전각을 맡은 소동(小童)의 말로는 해가 뜨기 무섭게 전각을 나섰다고 합니다."

"……."

법정의 고개가 더욱 삐딱해졌다.

"가? 아, 아니.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절대 이럴 수가 없는데? 이 상황에 그냥 가 버린다고? 이 상황에서?"

법정은 정말로 당황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방 안을 걸어 다니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불호만 주구장창 외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계는 심란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나름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이리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역시나 소림의 방장…….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니! 빌어먹을 아미타불이고! 아미나발이고!"

"……."

아니네.

아니야.

법정의 눈에 화르륵 불꽃이 타올랐다.

"아니, 저 화산인지 뭔지 하는 미친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냐! 여기서 그냥 가 버린다면 소림과는 척을 지고, 천하는 도탄에 빠질 상황인데! 이대로 그냥 손 놓아 버리면 뒷수습은 누가 한단 말이더냐!"

그야 우리가 하겠죠.

몰라서 물으십니까?

법계는 입을 뚫고 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평생 그래 본 적은 없지만, 지금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방장이 다탁에 놓인 목탁을 집어 들고 그의 머리를 깨 버릴 것 같았다.

"아니. 화산 이 미친놈들이!"

"진정하십시오, 방장. 듣는 귀가 많습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 지옥 불에 떨어질 것들!"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 소리를 질러 대는 법정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법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여튼 화산이 문제구나.'

대회 시작부터 결승까지, 화산이 엮인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소림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이 대회를 통해 얻으려 했던 명예는 땅에 떨어지다 못해 저 깊은 지하에 처박혀 묻힌 수준이고, 이 대회를 발판 삼아 천하로 웅비하길 바랐던 혜연은 결승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수련동에 처박혀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소림의 방장마저 화산 때문에 이성을 잃고 욕지거리를 마구 내뱉고 있다.

'마구니가 낀 것이야. 마구니가.'

법계의 눈앞에 낄낄대는 청명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화산도 문제지만 그 마귀만은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마귀가 들어앉아 주변을 물들이는 이상, 앞으로도 화산은 반드시 소림의 앞길을 막아 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슬쩍 숭산 아래로 시선을 주는 법계의 등 뒤에서 노한 법정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잡아! 당장 잡아라! 아니다! 내가 직접 간다!"

"지, 진정하십시오. 방장! 방장께서 떠나는 이들을 따라가 잡아 대면 소림의 체면이 무엇이 됩니까?"

"지금 체면이 문제더냐! 저 미친놈들! 화산! 화산신룡. 화……. 어억!"

"방장! 정신 차리십시오! 방장!"

법정이 뒷목을 잡고 넘어가자 법계가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다.

무학이 강해도 혈압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 * *

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많이도 멀어진 숭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뭔가 비명 소리 같은 게……."

"늙은 너구리가 제풀에 엎어지는 소리겠지."

"응?"

백천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청명은 반질반질한 얼굴로 배부른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중 새끼가 어디 화산을 호구로 보고.'

뭐?

천하?

그거야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청명은 더 이상 화산의 제자들이 그 의미도 없는 천하라는 이름에 함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천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도 돌아오는 게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는데, 미쳤다고 저들 좋은 짓을 하겠는가?

"크으. 속이 시원하네."

청명이 호리병을 들고 술을 꼴꼴꼴 마셔 댔다.

그 모습을 보며 백천이 눈을 가늘게 뜬다.

'아니. 대체 소림 방장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분명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 같은데, 아무리 캐물어도 청명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제자들에게 미소와 함께 설명을 해 주었을 현종도…….

백천은 슬쩍 현종을 향해 곁눈질했다. 그는 저 뒤쪽에서 터덜터덜 느리게 따라오고 있었다.

자애로운 눈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할 현종이 지금은…… 뭐랄까…….

'뭔 죄라도 지은 사람 같은데?'

심지어 그는 연신 초조한 얼굴로 숭산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뭔가를 자꾸 중얼거렸다.

"회수…… 회수해야 하는데……. 회수. 서, 선조께서…… 선조께서 이걸 아시면……. 무량수불. 무량수불! 아이고, 무량수불!"

몇 발짝 걷던 현종이 또 크게 움찔하더니 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작하듯 숭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했다. 옆에서 현종을 감시하고 있던 현영과 현상에게 가로막혀 질질 끌려온 것이다.

"놔라! 놔라, 이 무도한 놈들아! 세상에, 그게 어떤 물건인데!"

"장문인. 일단 화산에 가서 이야기하십시다."

"청명이 놈이 절대 장문인을 소림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시지요."

"아이고……. 아이고, 그건 안 된다! 아이고, 이놈들아. 내가 죽어서 선조들을 어찌 뵈라고! 아이고오오오오!"

"……."

장로들과 장문인이 하는 모양새를 가만 보던 백천은 묘한 시선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응?"

"……장문인께서는 왜 저러시는 거냐?"

"글쎄? 뭐 숭산에 중요한 거라도 두고 온 모양이지."

"중요한 거?"

"낄낄낄낄. 뭐 중요할 게 있겠어? 중요한 건 저기 다 챙겼는데."

청명이 무언가를 쭉 가리켰다.

덜컹. 덜컹. 덜컹.

"……."

화산의 제자들 뒤로 따라오는 커다란 수레가 네 대.

저마다 뭔가가 잔뜩 실려 있고 그 위로는 커다란 천이 덮여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다 돈이란 말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저게 다 이번에 화산과 청명이 벌어들인 돈이다.

더욱 소름 돋는 점은 화산이 번 돈은 겨우 한 수레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청명이 번 돈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숙. 이번 소림행은 성과가 많았어."

"……그렇지."

"중놈들이 자비가 많다더니, 아낌없이 퍼 주네. 잘 먹고 갑니다. 낄낄낄낄."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귀 놈 같으니.'

소림의 실수는 단 하나다.

화산에 이런 아수라도 돌아누울 놈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감히 비무대회를 연 것. 그리고 소림은 그 대가를 앞으로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여하튼……."

백천은 살짝 진중한 눈으로 청명에게 말했다.

"고생 많았다."

"응?"

"이번 대회는 네가 아니었으면 이리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뭐래?"

청명이 눈을 찌푸렸다.

"거 애새끼들 노는 비무대회 가지고 뭔가 이룬 듯이 말하지 마, 사숙."

"……."

청명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구파의 무학은 정공이야. 정공은 그 깊이가 깊어질수록 급격하게 강해지는 법이지. 이대제자 따위는 그 문파의 힘을 대변할 자격도 없어. 각 문파의 진짜 힘은 장로와 일대제자지. 그러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제일 망한 해남파조차도 아직은 화산보다 강해. 아직까지는 말이지."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앞으로도 해야 할 게 많아. 죽어라고 구르고 굴러야지. 그럼 언젠가는……."

말을 하던 청명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래. 언젠가는."

백천은 굳이 그 뒷말을 묻지 않았다.

그저 청명의 옆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화산이 천하제일문파로 당당히 서는 날이 올 것이다.

이 사악한 놈과 함께라면 말이다.

"가자! 화산으로!"

"그래!"

길고 길었던 임무를 마친 화산의 제자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섬서로 향했다.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