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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33화 (333/1,567)

333화. 이게 왜 여기서 기어 나와? (3)

아직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

풍성하게 내려온 수염.

정광을 담아 반짝이는 눈과 더없이 온화해 보이는 미소.

그리고…….

그 허리춤에 언제나 함께하던 자하신검(紫霞神劍).

청명이 눈이 자하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게 여기서 나온다고?'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뭐가 나올지 이것저것 예상을 했었는데, 정말 이게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자하신검이라니…….

청명은 허탈하게 웃었지만, 현종은 격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자하신검을 바라보았다.

"대현검(大賢劍) 청문……."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화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 화산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그 이름.

"어, 어찌! 어찌 이 물건이 소림에 있다는 말입니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현종이 노기를 숨기지 않고 크게 역정을 내었다. 하지만 법정은 그런 현종을 무례하다 탓하지 않았다. 입장이 바뀐다면 그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그만큼 이 자하신검은 화산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물건이었다.

신물(神物).

문파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물건.

신물은 그 문파의 권위를 대변한다. 소림의 녹옥불장(綠玉佛杖)이 때때로는 방장의 권위 이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화산에도 화산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자하신검.

문파의 입장에서는 장문령부(掌門令符)와 함께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자하신검은 십만대산에서 유실되었을 텐데, 그동안 소림이 이 물건을 보관해 오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법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 물건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그리고 소림은 이 신검을 손에 넣기 위해서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현종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 검은 화산의 역사와 함께해 온 검이자, 화산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이다. 과거로부터 남은 것이 거의 없는 화산이기에 반드시 회수해야 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이 일의 대가로 화산에 자하신검을 돌려드리겠습니다."

"……."

현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북해에 가서 상황을 알아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 자하신검을 이대로 놓고 물러나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정이 그런 현종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대가가 자하신검이라면 화산의 입장에서도 나쁜 거래는 아닐 겁니다."

법정의 미소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근거는 확실했다.

문파에 있어서 신물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 신물을 잃은 문파는 그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달리 얘기하자면 잃은 신물을 회수하는 것만으로 문파의 권위가 확고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화산은 더없는 기세로 그 세를 불리고 있다. 그런 문파에게 자하신검을 회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결코 작을 수 없다.

그러니 현종은 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자하신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은 법정이 상자를 치우고 검을 다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현종 쪽을 향해 쭉 밀었다.

"원한다면 지금 이 검을 가져가셔도 됩니다."

"……지금이라 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해 소림과 화산이 지금 좋은 관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화산이라는 문파를 신뢰합니다. 신뢰하는 이에게 보상을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현종의 엉덩이가 살짝 들썩였다.

알고 있다.

법정은 절대 좋은 의도만으로 저 검을 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음모를 꾸미는 것까지야 아니겠지만, 북해를 조사하는 것이 법정이 말한 것보다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현종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저 검은 과거 화산의 영화를 상징하는 검이다.

문파의 신물인 동시에 지금은 그저 추억할 수밖에 없는 화려한 화산의 상징이다. 그런데 어찌 쉽사리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현종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이 손을 불쑥 내밀어 자하신검을 잡아 들었다.

"음?"

태연하게 검을 가져온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 자하신검이 방 안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가만히 그 검신을 바라보던 청명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 검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현종과 법정은 동시에 숨을 죽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기세가 아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의 표정이 두 거인의 입을 막은 것이다.

'청명아.'

현종은 그저 말없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때때로 이 아이는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현종은 청명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무거움 앞에 침묵해야만 했다.

청명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검면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은 그는 한참 후에야 아주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현종은 비로소 마음을 굳혔다.

'자하신검은 화산에 있어야 한다.'

청명이 저 검을 든 모습을 보니 확신이 섰다. 저 검은 언제고 청명의 손에 들려 천하를 누벼야 한다.

"화산은 방장의 요청을……."

탁!

그 순간 청명이 검을 검집에 소리 나게 꽂아 넣더니, 다탁 위에 올렸다. 그러더니 살짝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검을 뚫어져라 보았다.

"흐으으음."

법정은 조용히 웃었다. 지금까지 소림과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걷어차고 시작했던 청명이 저만한 반응을 보이고 있단 것만으로도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소도장.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하신검을 내어 줄 수도 있네. 그 대가는 강호의 안녕을 위한 것이니 소림이 화산에 명을 내리는 것도 아니네. 그렇지 않은가?"

청명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법정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말이다. 그러더니 고개를 슬쩍 들어 법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요?"

"……으응?"

그리고?

무슨 그리고?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네만?"

법정의 물음에 청명이 심드렁하게 다시 물었다.

"또 뭘 주실 건데요."

"……또?"

이번에는 법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화산의 신물을 주겠다는데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소도장, 신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법정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방장."

"……."

청명은 잠깐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이며 말했다.

"방장께서 이 깊은 산속에서 사시다 보니 영 현실감각이 없으신 모양인데."

"……."

깊은 산속?

현실감각?

청명이 다탁 위에 놓인 자하신검을 툭툭 건드렸다.

"뭔 낡아빠진 철 쪼가리 하나 들고 와서 대가가 어쩌고 그러십니까. 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향화객들이 와서 돈 주고 가니까 세상 일이 다 그리 만만해 보이시는 모양인데. 개방 거지 놈들도 그렇게 구걸하다가는 쪽박 깨지고 쫓겨납니다. 예?"

"처, 철 쪼가리?"

법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화산의 신물을 두고 철 쪼가리라 말한 것인가?

"이, 이보시게. 화산신룡. 잘 이해가 안 되나 본데, 이것은 화산의 신물이네."

"그게 왜요?"

"……모르겠는가? 화산파의 신물이라니까!"

"아, 알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는데요?"

청명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다.

"문파에서 신물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가?"

"거참 이상한 분이시네?"

"……뭐?"

법정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아니. 내가 화산파 사람인데, 저 검이 화산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왜 방장이 결정합니까. 남의 집 밥그릇 개수 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어……."

법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혹시나 하여 현종을 보았지만, 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종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청명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처, 청명아. 아니, 그래도 조사의 신물인데……."

"뭐 신물이 별거예요? 문파랍시고 모여서 툭탁거리던 양반들이 대충 비싸고 예쁜 것 있으면

'이제부터 이게 우리 상징이다.'

하고 정하는 게 신물이지. 뭔 신물이 하늘에서 점지해 줘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물건은 그냥 물건이죠. 뭔 물건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해요? 저게 없다고 화산이 화산이 아닌 것도 아니고, 저게 있다고 화산이 대단해지는 것도 아닌데, 미쳤다고 검 쪼가리 하나 받자고 북해를 가요? 북해를?"

슬슬 청명의 눈이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현종은 움찔하며 생각했다.

'아, 아니. 그래도 조사의 신물인데…….'

'대체 이놈은 뭘 배우고 자란 거지?'

두 사람의 당황스러운 눈빛이 청명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태연하게 이죽거렸다.

"뭐 물론 손에 들어온다면야 돈 받고 팔아먹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신물 때문에 제자들이 위험에 뛰어드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어느 선조가 제자보다 신물 따위를 귀하게 여기겠어요?"

"……."

이쯤 되니 법정도 더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럴 의욕도 사라졌다.

청명은 그런 그의 눈앞에 슬쩍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랗게 만들어 보였다.

"뭐 다른 거 없어요? 돈이라든가. 아니면…… 돈? 아, 어음도 괜찮겠네요. 전표나, 아니면 보석……."

"청명아. 그거 다 같은 것이지 않느냐?"

"어. 그렇죠. 그런데……."

청명이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자하신검을 법정 쪽으로 쭉 밀었다.

"생각해 보니 웬만큼 받아서는 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네요. 이게 참 좋은 검 같은데, 잘 뒀다가 쓰세요."

청명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현종도 뒤따라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청명이 휙하니 돌아서자 법정이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소도장! 이리 끝낼 일이 아니잖은가?"

"그럼요?"

그는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으로, 말이 점차 빨라졌다.

"제시한 대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꾸어 주겠네. 이건 천하를 위한 일일세."

"아. 그렇죠. 천하. 그거 참 중요하죠."

청명이 몸을 획 돌리더니 자세를 반듯하게 세웠다. 그리고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법정을 향해 포권 했다.

"과거 화산이 천하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일은 화산 제자들의 가슴에 무한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방장."

법정이 입을 다문다.

다시 아픈 곳을 찔린 것이다.

"물론 그 일은……."

"과거를 들춰 내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화산은 많은 것을 잃었으나, 또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

"그러니……."

청명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그 자부심을 소림도 꼭 한번 느껴 봤으면 좋겠네요."

"……."

그의 얼굴에 걸린 웃음은 말문이 막힐 만큼 밝았다.

"소림이라면 분명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섬서에서 최선을 다해 응원할 테니 반드시 저 간악한 마교의 종적을 밝히고, 강호를 도탄에서 구해 주십시오!"

"아, 아니……."

"이 일을 소림이 아니면 감히 어느 문파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쵸? 장문인?"

현종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크으. 그렇죠, 그렇죠. 이건 소림 정도는 돼야 할 수 있는 일이죠. 힘내십시오, 방장! 혹시 마교랑 싸우실 때 저 자하신검 쓰실 일 있으면 잘 써 주세요. 검날이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그럼."

청명은 손까지 살래살래 흔들더니 벌컥 방문을 열고 나갔다.

현종이 홀린 듯한 얼굴로 그 뒤를 따르는 걸 보며, 법정은 또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정말 선조의 신물을 포기할 셈인가? 그게 화산의 선택인가?"

돌아가려던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한심하다는 듯한 그의 눈빛에 법정은 움찔하였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신물은 얼어 죽을."

검은 검.

그저 검일 뿐이다.

설사 저 검이 화산의 신물이었다 해도, 저 검이 장문사형의 애병이었다 해도, 검은 그저 검에 지나지 않는다.

화산의 뜻은 저따위 검에 어려 있지 않다.

화산의 제자들이 이어 가는 것이 화산의 뜻이고, 화산의 검법에 녹아 있는 것이 화산의 뜻이다. 한낱 철 쪼가리 따위가 무슨 수로 그 깊은 마음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선조다, 인마.'

어디 청명 앞에서 선조를 운운하는가.

선조의 뜻이 여기에 있는데, 쇠붙이를 신물 운운하는 게 우습기 짝이 없다.

"그 좋은 신물 소림이 잘 쓰시죠."

청명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며 씩 웃었다.

설사 청문이 직접 저 말을 들었다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쇠붙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 아니, 인마! 그래도 저건 회수해야지!

어?

아냐?

"그럼 와서 직접 회수하시든가."

아이고, 나는 몸이 쑤셔서 못 하겠네.

낄낄낄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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