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이게 왜 여기서 기어 나와? (2)
법계가 다시 돌아와 관을 옮겨 나갔다.
시취(屍臭)가 채 가시지 않은 방 안, 세 사람은 무거운 분위기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미타불."
불호를 왼 법정이 현종을 보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아시겠지만, 이미 십만대산에서 마인의 종적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청명이 슬쩍 현종을 돌아보았다.
"그래요?"
"음. 비무대회가 시작되기 전 장문인들끼리 따로 모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마인의 종적이라……."
청명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분명 중요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인의 종적이 발견된 것과 죽은 이에게서 마화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소림은 다른 문파들보다 한발 앞서서 이 정보를 손에 넣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알게 된 이상 나름의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속가들에게 주변을 다시 살피라 명하신 거로군요."
"예. 개방과 연동하여 마인들의 종적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 명이 떨어진 것은 대회 전입니다. 그런데…… 북해빙궁 주위를 살피던 이와 연락이 끊겨 확인해 보니……. 아미타불."
마공에 당해 죽어 있는 제자를 발견했다는 뜻이겠지.
청명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북해에 마교가?'
아니. 속단할 일은 아니다.
지금 이 정보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제대로 상황을 알아보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마교는 그런 곳이니까.
"마교의 종적을 발견한 것은 더없이 중차대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끔찍한 전쟁을 겪었습니다. 이 일을 좌시하게 되면 결국 또 다른 전쟁을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중원은 반드시 북해와 북해빙궁을 조사해 봐야 합니다."
"으음."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교에 관련된 일은 강호의 누구라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특히나 화산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천하에 아무리 많은 문파가 있다 한들 화산만큼 마교에 원한이 깊은 곳이 존재하겠는가?
"한데……."
현종이 살짝 인상을 쓰며 낮게 헛기침하고는 입을 뗐다.
"마교의 종적이 발견되었다는 건 분명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방장께서 이런 이야기를 왜 굳이 저희에게 하시는지 저는 잘……."
"장문인."
법정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소림의 장문으로서 화산에 한 가지를 요청드리고 싶어서 뵙자 하였습니다."
그는 현종과 청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으니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침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화산이 북해를 조사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현종이 눈을 치떴다.
"……북해빙궁을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법정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불호를 외더니 말을 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산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해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조금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다. 명쾌하게 대답을 내어 놓기 어려운 문제였다.
"방장께서 화산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대평가가 아닙니다."
법정은 심유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현종을 응시한다.
"아시다시피 새외사궁과 구파일방은 관계가 좋지 못합니다. 정확히는 원수에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현종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원수지간인 게 아니라, 새외사궁이 중원에 일방적인 원한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부분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외사궁은 구파일방을 넘어 중원인들에 대한 적개심마저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새외사궁의 영역에 중원인들이 출입하지 못한 지가 벌써 백 년입니다."
듣고 있던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제야 왜 법정이 자존심을 굽혀 가며 그를 보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법정이 덧붙였다.
"한데 최근 새외사궁의 영역에 발을 들인 문파가 있습니다. 그저 간단히 인사를 나눈 정도가 아니라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한 문파가 말입니다."
현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만야수궁과 저희 화산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법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원의 문파 중 새외사궁과 조금이라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낸 곳은 화산이 유일합니다."
현종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법정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물론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은 다르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새외사궁으로서의 유대가 있습니다. 남만야수궁의 친구라면 북해빙궁도 완전히 박대하지는 못할 터. 오직 화산만이 북해빙궁에 충돌 없이 들어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법정이 양손을 내리고 가만히 현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불문의 예가 아니라 인간의 예다.
"부탁드립니다. 장문인 천하를 위해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으으음."
현종이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관계가 틀어졌다고는 하나, 소림의 방장이 저리 자세를 낮추는데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다. 게다가 이 일은 온 천하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어찌해야 하는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현종이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옆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교의 종적은 어떻게 된 거죠? 이게 전부인가요?"
청명을 바라보는 법정의 눈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소림에게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던 아이가 마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소림을 밀어 두고 마교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아직은 확실한 것이 없단다. 다만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마화(魔花)를 남길 정도라면 손을 쓴 이의 마공의 화후가 굉장히 높다는 것 정도다."
청명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뭐, 사실 굉장한 것까진 아니고.'
하지만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정도의 마공을 익힌 이가 북해를 누비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중원과 북해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을 마교가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최악은요?"
"북해빙궁 자체가 마교에 장악되었을 경우네. 그렇다면 이다음엔 마교가 북쪽에서 중원을 향해 남하하게 되겠지."
"흐음."
청명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네. 뭐, 잘 알았고요."
그가 허리를 늘어져라 쭉 폈다.
그리고 평소처럼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현종과 법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 말 다 끝났으면 이제 가도 되나요?"
"……으음?"
놀란 법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간다고?
"소, 소도장.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네."
"네. 뭐, 아는데요."
청명은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대충은 알았어요. 그러니까 북해에 마교가 나타났고, 화산이 가서 그걸 확인해 달라는 이야기잖아요. 다른 중원인들은 새외오궁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는데, 화산은 남만야수궁의 영역에 들어가 친분을 쌓은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 말이네."
"그런데요."
청명이 손가락을 훅 불었다.
"우리가 왜요?"
"……."
법정의 얼굴이 넋을 놓은 듯 멍해졌다.
"……왜냐니? 마교가 나타났다고 하지 않았는가?"
"에이. 그건 저도 들었죠. 제 말은, 마교가 나타났는데 왜 화산이 가야 하냐는 거예요. 소림도 있고, 무당도 있고, 다른 문파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 화산이냐는 거죠."
"그건 이미 설명하지 않았는가?"
"아, 경험이 있으니까?"
청명은 마치 우스운 거라도 본 양 피식 웃었다.
"해 보셨어요?"
"음?"
청명이 심드렁하게 법정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화산이라고 뭐 대단한 게 있어서 야수궁과 친구가 되었겠어요? 어찌어찌 하다 보니 된 거지."
"……."
"그러니까 소림도 할 수 있어요. 제가 해 봐서 아는데, 이게 사람이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소림도 노력하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예요."
법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놈이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노, 노력?"
"네. 노력하는 소림에 비하면 화산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죠. 괜히 이 중차대한 일에 저희가 나섰다가 일이 틀어질까 겁나네요. 그러니까 저희는 그냥 섬서로 돌아가서 소림이 일을 처리하는 걸 지켜보고 박수나 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죠, 장문인?"
현종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청명과 법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현종의 얼굴 역시 평소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렇습니다, 방장."
법정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둘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말에 섞인 한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천하를 위한 일입니다."
"네, 알아요. 예전에도 그랬죠. 그렇지 않나요?"
청명의 말이 법정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법정은 이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괜한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만 가 볼게요. 빙궁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잘하면 대화가 통할 거예요. 그럼."
"잠시."
청명이 반쯤 몸을 일으키자 법정이 단호히 손을 들어 만류했다.
"잠시 기다리시게."
그 눈빛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청명은 두말없이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법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불호를 외었다.
"알고 있네. 아니, 알고 있습니다. 장문인, 소림은 감히 화산에 훗날 그 공에 대한 보답을 해 주겠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지금 장문인과 소도장의 반응도 십분 이해합니다."
청명의 눈이 의심으로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이 민머리가 또 무슨 수작질을 하려는 거지?'
솔직히 이쯤이면 물러날 만도 하다. 아무리 평온을 가장하고 있다고는 해도 법정이 화산을 보는 눈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대화를 더 이어 간다?
그럼 아직까지 숨겨 놓은 수가 있다는 뜻이다.
"신뢰를 잃은 이가 의뢰를 하기 위해서는 보상을 먼저 꺼내야 하는 법이지요. 그것이 순리이거늘 소승이 순서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보상이요?"
"그렇네."
"호오."
청명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개소리에 불과했지만, 보상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헛소리 정도로는 여겨 줄 여지가 있다.
"그래서 그 보상이라는 게?"
"법계."
법정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부르자 다시 문이 열리고 법계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 사람 엄청 바쁘네.'
아까는 관을 가지고 들어오더니 이제는…….
"응?"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의 제자들을 저 먼 북해까지 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보상이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법계의 손에 들린 것은 보상이라기에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다.
상자.
길쭉한 상자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저 안을 황금으로 가득 채운다고 해도 청명이 생각한 보상에는 전혀 미치지 못할 듯했다.
"여기 있습니다. 방장."
"음."
법정은 법계가 내민 상자를 받아 가만히 앞에 있는 다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럼."
법계가 반장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자신은 감히 저 상자가 열리는 모습도 볼 자격이 없다는 듯 말이다.
그 경건한 태도를 보니 더욱 짐작이 가질 않았다. 청명은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대체 뭐지?'
지금까지 저들의 행동은 청명의 손바닥을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빤한 말과 행동.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아무리 청명이라도 해석하기 어려웠다.
대체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다는 말인가?
"보상은 이것입니다."
"그 상자요?"
"정확히는 상자 안에 든 물건이지요."
"……돈도 아니라 물건이라."
청명의 눈이 다시 한번 가느스름해졌다.
그가 뭔가 고심하는 것을 알아챈 현종은 그를 대신해 넌지시 물었다.
"방장께서는 사람을 너무 놀리지 마시고,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여 주십시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법정이 상자의 뚜껑을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곧장 뚜껑을 여는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 물건이 대가라면 장문인께서는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이실 겁니다. 너무나도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지요."
"……."
현종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법정이 상자를 열어젖혔다.
'뭐지?'
물건을 본 현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부신 광채도, 놀라운 물건도 없었다.
비단이 깔린 상자 안에는 그저 고풍스러워 보이는 검 하나가 검집째 들어 있을 뿐이었다.
'뭐라 적혀 있는 거지?'
검집에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어떤 글귀가 새겨져 있었지만, 세월 때문인지 닳아 버려 정확하게 읽어 내기가 힘들었다.
"방장. 이 검은 대체……."
그때였다.
"어?"
청명이 얼빠진 소리를 내며 움찔했다.
'응?'
그와 동시에 현종도 움찔했다. 청명이 이렇게나 당황하며 놀라는 모습을 처음 본 까닭이었다.
청명은 눈을 끔벅이며 상자 안에 놓은 검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아니……. 이게 왜 여기서 기어 나와?"
현종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검이 무엇이기에 이 아이를 이토록 당황시키는 것인가?
그때 법정이 가만히 손을 뻗어 그 검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집에서 뽑아내었다.
현종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던 고풍스런 검집과 달리, 모습을 드러낸 검날에선 밝고 청아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 빛을 본다면 누구도 이 검이 신병이기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었다.
법정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 검의 이름은 자하(紫霞)라 합니다."
역시.
청명의 눈빛이 삽시간에 깊디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들은 현종 역시 얼굴을 굳혔다. 방장은 그 얼굴들을 보며 덧붙였다.
"자하신검(紫霞神劍). 화산파를 상징하는 신물이지요. 과거 화산의 장문인이었던 대현검(大賢劍) 청문의 애병입니다."
"아……. 아아……."
격정에 찬 현종의 두 눈이 폭풍을 맞는 갈대처럼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