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이게 왜 여기서 기어 나와? (1)
"……그리하여 방장께서는……."
"끄으……."
"장문인과 다시 한번 대화를……."
"끄으으으."
"……장문인. 듣고 계십니까?"
법계의 물음에 현종이 하얗게 뜬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돌리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 청명아. 마, 마실 것. 뭐라도 마실 것 좀 있느냐?"
"여기요."
청명이 미리 준비했다는 듯 새하얀 호리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호리병을 본 현종은 되레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해 댔다.
"끄윽……. 수, 술은 아니겠지?"
"물이에요. 물."
"끄으으응."
이제는 저 흰 병만 봐도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그렇지, 장문인에게 술을 먹여 기절하게 만들다니. 이게 어디 도가의 제자가 할 짓이던가?
하기야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다가 의식을 잃은 그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약간 찝찝한 마음으로 청명이 내민 물을 쭉 들이켠 현종은 그제야 속이 좀 풀린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깊게 한숨을 쉰 그는 법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흉한 꼴을 보여 면목이 없소이다."
"……."
보통 이런 말을 들으면
'괘념치 마십시오.'
라는 말로 받아 주는 게 예의겠지만, 법계는 도무지 그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이게 그냥 흉한 꼴이라는 말로 넘어갈 일이어야 말이지.'
방장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벌써 소리를 질러도 몇 번을 질렀을 것이다. 태연하게 소림의 경내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먹는 인간들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소림이 생긴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모든 것이 전대미문이구나.'
이제는 이 화산이라는 문파를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현종이 조금 여유로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고 하셨소이까?"
법계가 반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는 장문인과 다시 대화를 하고자 하십니다."
"흐음. 일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라면,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장문인. 방장께서는 이전에 누구와도 나눈 적이 없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음?"
현종이 조금 의문 어린 눈으로 법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화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서로의 불편한 마음일랑 잠시 접어 두고 강호의 미래와 안녕을 위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때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퉁명스레 물었다.
"뭐가 그렇게 거창하대요?"
미처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한 법계가 슬쩍 언짢은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예의라고는 찾을 수가 없군.'
하지만 어떠한 분쟁거리도 만들지 말라는 법정의 신신당부가 다시 한번 귓가를 스쳤다.
살짝 심호흡을 한 그는 청명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자세한 일은 방장께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화산신룡도 함께 보고자 하셨습니다."
"흐음."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내가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법계는 이곳에 한시도 더 머무르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청명을 흘끗 보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살벌해라."
청명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너스레를 떨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어찌 생각하느냐?"
현종의 물음에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뻔한 소리나 늘어놓지 않을까요?"
"흐으음. 뻔한 소리라."
"저쪽에서야 할 수 있는 게 몇 없으니까요."
현종이 가만 턱을 쓸어내렸다.
청명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현종은 그와는 달리 방법이 아닌 '방식'에 집중했다.
'법정.'
소림의 방장.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청명의 행동에 피까지 토하며 쓰러진 게 바로 어제인데, 불과 하루 만에 이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고?
"허어."
그 성정이야 어쨌건 이 대단한 행동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쯤 되어야 소림이라는 거대한 문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반성을 해야겠구나."
"네, 너무 드셨죠. 좀 과하긴 했어요."
"……."
그건 너 때문이잖아, 인마!
"……다녀……오십시오, 장문인……."
"청명아……. 우욱. 너도…… 너도 조심하거라."
"장문……. 우웨에에에엑."
현종은 숙취로 반쯤 시체가 된 제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으니. 미리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거라."
"예, 장문인……."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청명을 대동한 채 전각을 나섰다.
"으음."
그렇게 둘이 가만히 전각 사이를 걷던 도중, 현종은 주변을 둘러보다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곳 같구나."
"관람을 왔던 이들이 다들 돌아갔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 말인즉슨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평소 소림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곳곳에 향화객이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현종은 중간 중간 스쳐 가는 소림승들의 눈에 담긴 작은 적의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나 좋은 눈으로는 보아 주지 않는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너는 방장이 무슨 말을 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음."
"아니. 그 전에."
현종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화산이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어쩌면 한 문파의 장문인과 삼대제자가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대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종은 지금까지 청명을 단순한 삼대제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흐음."
청명은 볼을 긁적이며 빙그레 웃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래. 역시 모르……. 응?"
현종의 고개가 천천히 청명에게로 돌아간다.
"……몰라?"
"네."
"……그럼 그 비무대에서 한 말은 무엇이었느냐?"
"뭐가요?"
"화, 화산은 화산의 길을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냥 내키는 대로 가면 그게 길이죠, 뭐. 꼭 정해 놓고 갈 필요가 있나요."
"……."
현종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놈을 믿은 게 정말 잘한 짓이었을까?
현종의 표정을 본 청명이 피식 웃었다.
"여하튼 하나는 확실하죠."
"음?"
"소림과는 함께할 게 없어요."
"……그렇구나."
현종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법정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만나고자 했단 것은 그 모든 상황을 뛰어넘을 만한 제안이 있다는 뜻. 그 제안을 들어 보기 전까지는 숭산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디 한번 들어 보자꾸나.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서 오십시오."
법정이 반장을 하며 현종과 청명을 맞이했다.
안색은 살짝 창백해 보였지만, 그래도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현종이 가만히 포권 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방장."
안부를 묻는 말에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별 탈 없이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못난 꼴을 보여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법정이 부드럽게 말하며 앞쪽을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예."
현종이 나직하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방문한 것도 이번이 두 번째다.
소림에 처음 입산했을 때 이곳에서 법정과 환담을 나누다가 청명이……. 아니, 화산의 제자들이 해남파의 제자들을 신나게 까고 있다는 말을…….
'아니. 그러고 보면 그때도 결국에는 이 녀석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었구나.'
돌이켜 보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불과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건만,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입장은 그 짧은 기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변해 있었다.
법정이 가만히 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잔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딱히 다도(茶道)랄 것도 없이 평범하고 소탈한 모습이었다.
"드시지요."
"예."
현종은 차를 받아 든 뒤, 꿈쩍도 안 하는 청명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제야 청명이 마지못해 불뚝대는 얼굴로 잔을 들었다.
평소에도 차를 마시느니 냉수를 먹겠다던 청명이니 더욱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때 법정이 가만 웃으며 대뜸 말했다.
"좋은 밤을 보내신 모양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되묻는 현종을 보며 법정은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
"주향(酒香)이 풍기는 듯하여."
현종의 얼굴이 민망한 듯 슬쩍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제자들을 달랠 필요가 있을 듯해서 그만."
"그렇지요. 그럴 수도 있지요."
나름 큰 무례를 저질렀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법정은 딱히 탓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예. 본론을 바로 말씀드리지요."
법정이 낮게 한숨을 쉬더니 살짝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장문인."
"예."
"어제 대회에서 화산이 한 행위로 인해 소림의 입장이 무척이나 곤란해졌습니다."
현종은 대답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법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괜히 미안하다는 말을 하여 이쪽의 입장을 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 소림은 그 일에 대해 화산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예?"
"따지고 보면 소림이 시작한 일입니다. 아니, 강호가 시작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염치가 있다면 어찌 화산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현종이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때 옆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대회 전에 나온 말이면 의미가 있었을 텐데요."
"……."
"하다못해 결승전 전에라도 말이죠."
법정의 눈가가 살짝 꿈틀댔다.
하지만 그는 금세 평온한 안색을 되찾았다.
"소도장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습니다. 다 제가 미욱한 탓이지요."
의외의 반응에 청명이 흥미롭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것 봐라?'
그래도 소림의 방장.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이 말이렷다?
이쯤 되자 청명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 소림의 방장이 자존심마저 굽혀 가며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말이다.
'일단은 어떻게든 다시 손을 잡아 보려고 할 것 같은데.'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를 사람은 아니다. 그럼 화산이 절대 거부하지 못할 제안이 있다는 뜻이리라.
'이제 와 구파의 복귀가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진 않을 테고.'
만약 그딴 말이 나오면 저 반짝이는 대머리에 직접 매화 문신을 새겨 줄 심산이었다.
청명이 눈빛으로 재촉하자 법정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리 장문인을 청한 이유는 소림에서 화산에 요청할 만한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급한 일이라 하시면?"
법정이 슬쩍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법계, 안으로 들여라."
"예!"
문 밖에서 단호한 대답이 들리더니 이내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그리고 무언가 커다란 나무 상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 둘이 겨우 들어야 할 만큼 커다란 나무 상자.
그 물건의 정체가 관이라는 것을 알아챈 현종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방장?"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종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단 얼굴로 관과 법정을 번갈아 보았다. 할 말이 있다더니 대체 왜 관을 들여온단 말인가.
법계는 관을 내려놓더니 반장을 하고 곧장 다시 나갔다.
세 사람과 관 하나.
방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아미타불."
법정은 나직하게 불호를 외고는 두 사람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소림의 속가는 천하에 퍼져 있습니다."
"그야 당연한……."
"지금 이 관에 들어 있는 시신은, 소림의 속가 중 하나인 삼광문(三光門)의 제자입니다. 그는 소림의 요청으로 북해를 정찰하는 임무를 맡았었지요."
"……북해(北海)라 하셨습니까?"
"예. 북해입니다. 다만 그래 봐야 기껏 북해의 초입 정도를 확인해 보는 역할이었지요. 중원인은 이제 더 이상 북해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한데, 어째서 이리 시신이 되어 돌아왔단 말입니까? 설마 북해빙궁과 충돌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그럼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다.
세외사궁과 중원은 작은 문제만으로도 금세 전쟁이 벌어질 수 있을 만큼 감정의 골이 깊고 또 깊었다.
그렇기에 청명과 그 일행도 운남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 개고생을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법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차라리 나을 것이외다."
"……차라리?"
그럼 대체?
현종과 청명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법정은 다시 한번 낮게 불호를 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손길로 관의 뚜껑을 열었다.
"음!"
현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시신을 코앞에서 보며 그리 유쾌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이런…….'
그 순간이었다.
움찔.
놀란 현종이 획 옆을 보았다. 옆에 앉은 청명에게서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살기는 미처 확인할 틈도 없이 신기루처럼 훅 사라졌다.
'착각인가?'
그런데 그때 청명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그러더니 관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차갑기 짝이 없는 시선이 관에 들어 있는 시신을 면밀히 확인했다.
역시, 시신의 창백한 피부 위로 붉고 검은 반점들이 선명하게 돋아 있었다.
"……마화(魔花)."
으드드득!
청명이 이를 갈아붙이며 법정을 노려보았다. 흡사 굶주린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마교?"
"아미타불. 소림도 그걸 의심하고 있네."
이를 악문 청명의 턱에 힘줄이 솟았다.
사실 의심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건 마화(魔花). 마공에 당한 이들의 몸에 생겨나는 상처다.
심지어 황 대인 사건 때 보았던 것처럼 어설픈 마화가 아니다. 과거에 수도 없이 보았던 '진짜' 마화다.
"마교……."
청명의 입가가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설명해 보세요."
그의 목소리에서는 한기가 뚝뚝 흘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