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화산은 화산의 길을 간다. (3)
"……이겼다."
백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겼다.
저 청명이 마침내 소림의 혜연마저 꺾었다.
"저 망할 놈이……."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기뻐해야 한다.
밀려드는 기쁨에 날뛰어야 한다.
하지만 백천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입을 열면 그 순간 눈물이 터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옷자락을 움켜쥔 채 눈물을 참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이었다.
"사숙!"
모두 비슷한지, 그의 어깨를 움켜잡은 윤종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났다.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청명은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건 화산의 제자들에게 있어 절대 꺾이지 않는 믿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을 졸였다.
물론, 설령 청명이 패하고 돌아온다고 해도 그들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청명 본인이 그 패배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기기를 바랐다.
저 작은 등에 화산을 짊어지고 묵묵히 걷는 이의 무릎이 꺾인다면, 그걸 지켜보는 그들은 무릎을 잘라 내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으리라.
"……이겼습니다, 사숙! 저놈이 이겼다고요!"
조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친다.
"그래. 이겼……."
그런데 그 순간.
가만히 비무대를 바라보던 유이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와 좀 달라."
"……응?"
백천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거."
유이설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다소 미묘했다.
"나쁜 생각 중."
"……."
"응?"
백천의 고개가 비무대를 향해 획 돌아갔다.
서, 설마?
혜연에게 검을 겨눈 청명을 바라보며 허도진인은 놀라움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놀란 것은 단지 그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방금 그건 불광보조(佛光普照) 아니었습니까?"
"세상에. 불광보조마저 익히고, 그걸 펼쳤음에도……."
장문인들이 말을 잇지 못했다.
불광보조는 칠십이종절예 중 최고의 방어 초식으로 치는 무학이다.
물론 혜연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나이가 어리니 아주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을 것이나, 그렇다 해도 불광보조는 불광보조다.
그런데 청명은 그 최고의 방어을 뚫고 혜연을 무릎 꿇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진짜 천재는 따로 있었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불렸다고는 하나, 그 명성에 과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거늘……. 되레 그 칭호가 저 아이를 제대로 표현해 주지 못했단 느낌입니다."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고소함.
그리고 부끄러움.
거금을 들여 천하비무대회를 준비한 소림이 화산에 그 영광을 넘겨주게 되었다는 데서 비롯한 고소함.
그리고 청명의 발언 이후로 내심 찔리는 것이 있었던 이들이 느끼는 부끄러움. 이를 숨기기 위해 더욱 과장되게 늘어놓는 찬사들.
'결국, 사람이란 이런 게지.'
허도진인은 알고 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니 다들 떵떵거리기는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도 결국은 사람이다. 지위가 높다 해서 딱히 수준이 높을 것도 없고, 대단한 진리를 아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 머리가 좋아 장문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일 뿐이다. 혹은 배분이 높았거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방장의 머릿속이 꽤 복잡하겠습니다그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허도진인이 슬쩍 법정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승의 얼굴은 이 이상 참혹할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리될 바에야 차라리 결승에 오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천하의 모든 강호인이 주목하는 결승에서 화산에 패하느니 말이다.
소림이 혜연에게 주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영광은 화산과 화산신룡의 것이 될 터. 정성들여 준비한 만큼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겠지.
게다가…….
'이것으로 무림의 판도도 흔들린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보유했다는 것은 절대 작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화산은 본파의 후기지수들이 천하제일임을 증명했다. 이 우승은 그 증명에 찍는 방점이 될 것이다.
후대의 천하제일인과 당대 최강의 후기지수들을 보유한 문파가 훗날 어찌 되겠는가?
당장 이곳에 있는 이들만 해도 어떻게 화산에 줄을 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 눈덩이가 가파르게 굴러간다면 어쩌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변되던 강호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구파일방이 저지른 죄악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화산이 지금 이 순간까지 구파일방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이 비무대회의 결과는 그저 구파일방 내의 서열이 요동치는 수준에서 끝날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화산은 구파일방이 아니고, 화산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파를 내쫓아야 한다.
누가 그 일을 하겠는가?
화산에 밀려 주도권을 내어 준 소림이?
허도진인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법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방장. 속이 말이 아니시겠구려.'
황포 자락 안에 감춰진 법정의 주먹은 숫제 피가 날 정도로 꽉 쥐여져 있었다.
혜연의 목에 검을 겨눈 청명의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미타불.'
이곳에 모인 모두가 소림의 자존심이 꺾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말은 천 리를 쉬지 않고 달리는 법. 오늘 일은 모두의 입을 타고 순식간에 천하로 퍼져 나갈 것이다.
법정은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려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유를 보여야 한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보일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소림이 여전히 힘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소림이 건재하다 믿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그저 여지를 던져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법정은 하얗게 질려 있던 주먹을 서서히 풀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아주 간단하다.
저 화산신룡을 상찬하는 것.
패자에게도 패자로서 지켜야 할 품위가 있다.
청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격을 올려 줌으로써 승리한 이도 정당함을 가지게 되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소림의 격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법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화산신룡의 승리를 선언하고 패배를 인정한다.'
계획이 틀어진 이상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잘 수습할 수만 있다면 결국은 소림의 힘이 발휘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비무는……."
법정이 막 청명의 우승을 선언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획.
청명이 검을 회수하더니 몸을 획 돌렸다.
법정의 입이 어색하게 다물어졌다.
뒤돌아 걸어가는 이에게 승리를 선언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
그가 멈춰 서야만 우승 선언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게 아닌가.
물러선 청명은 주위를 두리번대더니 바닥에 떨어진 매화검의 검집을 주워 검을 밀어 넣었다.
스르르릉.
그러더니 검을 옆구리에 차고 의관을 다시 정비했다.
법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화산의 제자로구나.'
그 언행이 거친 면은 있지만, 정당히 싸운 비무를 마무리할 줄은 아는 모양이다.
법정의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았는지 의관을 정제한 청명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양손을 모았다.
이제 저 손을 내밀어 포권 하고 나면 법정이 청명의 우승을 선언하면 된다.
당분간은 청명이 모든 영광을 가져가겠지만, 언젠가는…….
그 순간이었다.
'음?'
양손을 모은 청명이 슬쩍 법정을 바라보았다.
사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행동이다. 비무가 벌어지는 내내, 아니, 그 전부터 저 화산신룡은 법정을 의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그럼에도 법정이 순간 당황한 이유는 저 청명의 입가에 살짝 비뚜름하게 걸린 미소 때문이었다.
'미소?'
물론 웃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천하비무대회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이니 웃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나 저 미소는 이상하리만치 법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청명과 법정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미묘한 호선을 그리는 청명의 눈을 보는 순간, 법정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돼!'
정확하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놈이 분명 일을 벌이려는 게 분명하다.
그 꼴만은 볼 수 없단 일념으로, 법정이 발작하듯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이 채 열리기도 전에 청명이 양손을 내밀어 혜연에게 포권 하며 크게 외쳤다.
"화산의 청명은 부족함을 알고 이 승부에서 기권합니다."
법정의 몸이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포권을 받은 혜연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정적.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이 소림 전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턱.
백천이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저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이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꼴통."
윤종과 조걸은 입을 쩌억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뒤에서 비무대를 바라보던 백상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허허허……. 제정신이 아닌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저 미친놈 같으니."
화산의 제자들도 충격을 받았지만 법정이 받은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의 눈에 실핏줄이 잔뜩 섰다.
소림의 방장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기권이라니!"
"말 그대로예요. 기권한다고요."
청명은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으로 훅 불더니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드려요. 우승은 소림이네요."
"이……."
법정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과 경련을 멈추지 못하는 몸. 그리고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핏줄이 터지며 빨갛게 물들어 가는 눈은 지금 그가 얼마나 큰 노화에 휩싸였는지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저, 저 지옥에 떨어질 놈이…….'
기권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누가 이겼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달린 건 당연히 옹이구멍이 아니다.
그런데 다 이겨 놓고 되레 기권을 해 버린다?
우승자가 이보다 더 우스워지는 상황이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이, 이……. 이!"
이 사실이 퍼져 나가면 소림은 말 그대로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
노호성을 내지르려던 법정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방장!"
"방장! 정신 차리십시오, 방장!"
"우웨에에에엑!"
내기가 뒤틀렸는지 법정은 끝내 바닥에 피까지 토했다. 당황한 소림의 제자들이 황급히 모여들었다.
청명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상한 양반이네. 왜 혼자서 피 토하고 난리래."
그리고 혜연과 법정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주저 없이 돌아섰다.
객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단순히 소림을 망신 주기 위한 행동만은 아니다.
'이딴 건 필요 없어.'
이 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림이 준비한 것.
이 대회의 우승자가 가질 영광 역시 소림이 공증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화산더러 소림이 주는 영광을 넙죽 받아먹으라고?
'웃기는 소리.'
세상의 그 어떤 좋은 것이라 해도, 소림이 주는 거라면 필요 없다.
소림이 주는 명예를 받아들인다는 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현 강호에 순응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청명은 더 이상 그 길을 갈 생각이 없었다.
"화산은 화산의 길을 간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온 것보다 더 험한 길이 될지 모른다.
하나.
청명의 눈이 이쪽을 멍하게 바라보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못 할 것도 없잖아?'
그렇죠?
장문사형?
- 이 망둥이 같은 놈아!
내 욕할 줄 알았지.
에이.
청명은 피식 웃으며 그를 기다리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걸어갔다.
- 잘했다.
청명의 시선이 저 높은 하늘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유독 푸른 하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하늘을 향해 씨익 미소 지은 청명은 달리듯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뛰어들었다.
천하비무대회.
긴 시간 동안 치러진 그 대회의 우승은 모두가 처음 예상했던 대로 소림에게 돌아갔다.
다만.
대회의 파급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