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화산은 화산의 길을 간다. (2)
'이럴 수는 없다.'
법정은 혼백이 다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완벽했다.
혜연이 펼친 여래신장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그 화후(火候)가 깊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 작게 피어난 꽃 역시 꽃이듯, 이제 겨우 초입에 들어선 여래신장이라 해도 그 위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걸 버텨 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혜연에게는 마교와의 전쟁 후, 힘겹게 회복해 낸 소림의 모든 정화가 녹아 있다.
저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던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시 강호의 북두로 굳건히 일어서기 위해서, 소림은 혜연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 화산의 제자에게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소림은 천하제일문파다.
소림이 천하제일문파의 자리를 수백 년간 굳건히 지켜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학이 천하의 그 어떤 문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림의 무학을 온전히 익혀 낸 혜연이 타 문파의 제자에게 밀린다고?
'있을 수 없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저 청명은 이미 몰락한 화산의 삼대제자가 아닌가?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자리는 여전히 소림이 천하의 북두임을 천하에 선언하는 자리다.
"혜여어어어어어언!"
법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청명의 검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더없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내는 것을.
소림의 방장이라는 중책을 맡으며 스스로를 거의 버렸던 법정이지만, 그 역시 결국엔 무학에 평생을 바친 자.
무학을 잊고 살아왔다 한들, 그 황홀한 선 앞에서 혼을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건…….'
청명의 검을 보는 그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검을 잡은 손이 더없이 자연스럽다.
평생을 휘둘러 온 검.
휘두르고 또 휘두르다 보면 어느 순간 손에 검이 잡혀 있다는 것마저 잊게 된다. 몸에 팔이 달린 것처럼. 다리가 달린 것처럼. 검도 본디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새로운 몸을 얻으면서 생겨났던 위화감은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사라졌다.
청명의 눈이 낮게, 또 낮게 가라앉는다.
소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지난 백 년간 무엇을 쌓아 왔고, 무엇을 만들어 왔는지 혜연을 통해 증명했다.
하지만 헛되다.
'고작 그걸 위해?'
화산의 검을 버렸던가.
고작 저따위 것을 만들기 위해?
그러니 보여 주어야지.
저들이 놓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저들이 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청명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태초(太初)는 원(圓).
완벽이란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반원을 그려 낸 청명의 검이 하늘을 가리키며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원(圓)의 형태로 뭉쳐든 무극(無極)은 반으로 나뉘어 음(陰)과 양(陽)이 되어 태극(太極)을 이룬다.
이윽고 그의 검끝이 정중앙을 가리키며 멈춰 섰다.
양은 하늘이 되고, 음은 땅이 된다.
그 하늘과 땅 아래에 오롯이 선 것은 그저 인간.
아무리 하늘이 아름답고 아무리 땅이 굳건하다 해도 그 중앙에 사람이 없다면 그저 무용(無用)할 뿐.
하늘과 땅에 인간이 더해져, 천지인(天地人)이 삼재(三才)를 이룬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검술이란 그저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불과한 것.
하나 그 살인술에 도(道)를 담아 낼 수 있다면 검법은 그저 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곳에 있다.
화산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추구해 온 것.
누군가의 손에서 시작하여 전해지고 전해진다. 더해지고 또 더해져 수많은 날 동안 발전해 온 화산의 검도(劍道)가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청명의 손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시작은 육합(六合).
천지사방(天地四方).
천지사방을 검에 담는다는 것은 곧 세상의 만물을 담는다는 것과 같다.
검에 세상을 담아 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우주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검을 든 이는 소우주(小宇宙)가 된다.
그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검이다.
청명의 검이 천천히 위로 향하다 가만히 아래로 내려앉는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
그저 허공에 검을 단 한 번 내리그었을 뿐이다.
하나 혜연은 그 검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서걱.
그의 멍한 눈이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잘린 그의 소맷자락이 나비처럼 나풀대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
검기도 없었다.
베인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하나 저 검이 휘둘러진 순간 그는 이미 베여 있었다.
그의 얼굴이 망연해진다.
'심검(心劍)?'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완벽할 뿐이다.
극한까지 갈고닦아 완벽에 이른 검은 일체의 낭비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늘을 가르는 검기도, 바다를 가르는 패도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베어 낸다.
최소한의 힘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구현한다.
그것이 검의 극의(極意).
혜연의 심장이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얼마나 검을 갈고 닦아야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몸이 떨려 온다.
이 순간 혜연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무도(武道)란 무엇인가?
그저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이 무도인가? 더 강한 파괴력을 추구하고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것이 무도인가?
그렇지 않다.
무도란 무를 통해 육체를 이상에 닿게 하는 것. 마음으로 그려 낸 것을 그 몸을 통해 세상에 구현해 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혜연이 언젠가 도달하고자 했던 경지. 내력의 힘을 벗어나, 초식의 형태를 벗어나, 끝끝내 무(武) 자체에 이르는 경지다.
지금 그의 앞에 그 경지가 있다.
수십 년을 더 호되게 수련해도 닿을 수 없을지 모른다 의심했던, 그리고 의심해야 했던 그 무도(武道)가 지금 그의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거리를 몸으로 실감한 순간 혜연의 가슴속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문 혜연은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발작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소림의 혜연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한다.
조급한 마음은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초식을 찾게 만들었다.
콰아앙!
그의 진각이 비무대를 부쉈다.
우우우우우우웅.
이미 한번 선보인 적 있는 백보신권이 펼쳐진다.
청명을 향해 거대한 권기(拳氣)가 날아들었다.
청명이 반개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황금빛 권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이 위로 살짝 들렸다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촤아아악.
가른다.
너무나 당연한 것.
검은 베고, 찌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갈고 또 닦아 나가면 종래에는 세상 무엇도 가르지 못할 리가 없다.
도가의 검은 그러한 것.
베어 낸다.
공기를 가르고, 나무를 가르고, 기를 가르고, 종내에는 사람을 묶고 있는 오욕칠정과 세상의 이치마저 벤다.
쏟아지는 폭우에 불어난 급류처럼 청명을 덮쳐 온 황금빛 권기는 청명의 검에 좌우로 갈라져 방향을 잃고 여기저기로 뿜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비무대와 관중들을 넘어 날아간 권기가 커다란 전각을 일격에 날려 버렸다.
경이로울 정도의 내력.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이라 해도 닿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그가 뿜어낸 권기는 단 한 올도 청명의 몸에 닿지 못했다.
"아아아아아아아!"
그러나 혜연의 주먹은 지칠 줄 모르고 황금빛 불광을 뿜어냈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아라한이 마귀를 멸하기 위해 시전 했다는 권(拳)을 형상화한 소림 칠십이종절예.
무겁디무거운 권의 압력만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최상승의 절기가 혜연을 통해 구현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쇠가 구부러지고, 단단한 청석이 짓눌려 으깨질 정도의 압력이 비무대 위를 뒤덮었다.
압력에 소매 끝이 삭아 부스러진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솟구치듯 휘날렸다.
하지만 청명은 그 압력 속에서도 그저 초연했다.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은 여전히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쏟아지는 압력 속에서도 그의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청명의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안에 무엇이 있더냐?'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원하려던 부처의 가르침이 소림에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중원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달마의 가르침이 소림에 있는가?
스스로의 팔을 잘라서라도 깨달음을 얻으려 하던 이조 혜가의 가르침이 너희에게 남아 있는가?
헛되다.
스스로 이(利)를 추구하며 불법(佛法)을 좇지 못한 순간, 소림은 더 이상 소림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저곳에 있는 것은 그저 아집에 눈이 먼 이들일 뿐.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가 영화를 누린다. 하지만 그 영화가 이어지면 언젠가는 그 성세가 쇠하고 흐려지기 마련.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나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
화려했던 꽃이 진다 해도 언제가 꽃은 다시 피어난다. 피고 지고 또다시 피는 게 꽃이 아니던가?
그러니 피어난다.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절벽 위의 고목도 긴 겨울을 버텨 내고 나면 다시 꽃을 피우리라.
"피어라."
마침내 청명의 검 끝이 꽃을 그려 낸다.
그를 그려 내고.
화산을 그려 내었다.
시린 눈 속에서도, 부드러운 봄볕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은 불자의 권기 속에서도.
꽃은 결국 피어나는 법.
세상 어디에 꽃이 피지 않는 곳이 있던가?
'개죽음이 아니야.'
장문사형.
당신이 지켜 내려던 천하에서, 화산은 다시 피어날 것입니다.
설령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땅속에 뻗은 뿌리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결국 나무를 키워 내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헛된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허공에 작은 꽃이 그려진다.
작고 소담스러운 꽃봉오리는 쓸쓸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제가 아닙니다.'
하나 그의 검 끝에서 연이어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홀로 피어난 매화는 그저 쓸쓸한 것.
하지만 그 곁에 수많은 꽃들이 피어난다면 매화는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청명의 시선이 가만히 옆으로 향했다.
지켜보고 있다.
그의 사형들이, 그의 사숙들이.
그리고 그저 안쓰럽기만 한 그의 사숙조들과 그의 새로운 장문인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지켜보고 있다.
마치 그의 등을 밀어 주듯이.
'피어나라.'
저 하나하나가 화산의 매화다. 아직 봉오리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화산을 붉게 물들이고, 천하를 붉게 물들이겠지.
청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장문사형은 기뻐할까?
그의 매화에?
'아니.'
그럴 리 없겠지.
청명의 매화는 망령과도 같은 것.
이미 져서 사라져야 할 것이 원혼처럼 남아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기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걸이 피워 낸 매화에는 주먹을 쥐었을 것이다.
유이설이 피워 낸 매화에는 박수를 보냈을 것이고.
백천이 피워 낸 매화에는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지.
말라붙었던 화산이라는 땅에 새로운 매화들이 피어난다. 먼저 스러져 간 꽃잎들을 양분 삼아 다시금 매화는 피어난다.
그러니 어찌 꽃잎이 떨어졌다 해서 헛되다 할 수 있겠는가?
'사형.'
청명의 검 끝에서 매화가 만발한다.
작고 크고, 조금은 덜 여물어 부끄러이 웅크린 매화부터 활짝 피어나 만개한 매화까지.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문파를 이루듯,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는 매화가 모여 매화림을 이룬다.
이윽고 불어온 부드러운 훈풍(薰風)에 색색의 꽃잎이 환상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혜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세상이 붉은 꽃잎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하나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다잡아도 저 꽃잎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삿되다!"
버럭 소리를 지른 혜연이 반장을 한 채 크게 불호를 외었다. 그와 동시의 그의 몸에서 장엄한 금빛 서기가 쏟아져 나왔다.
불광보조(佛光普照).
불법이란 세상 모든 사특한 것들을 밀어 낸다. 진정으로 불법을 깨달은 이는 어떤 현혹에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
하나…….
'어째서냐?'
혜연의 눈이 뒤흔들렸다.
사라지지 않는다.
금빛의 서광에 닿은 꽃잎들은 사라지지 않고 외려 불광을 감싸듯 부드럽게 밀려들어 왔다.
"어째서……?"
혜연의 시선이 망연하게 청명을 쫓았다.
세상을 뒤덮은 매화의 꽃잎 속에서 청명의 검은 유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취한 듯 검무를 춰 대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그저 그러한 것.
그래.
그저 그러한 것(自然)이다.
꽃잎이 환상처럼 혜연을 스치고 지나갔다.
풍길 리 없는 매화향이 코끝으로 스며들고, 있을 리 없는 매화꽃잎이 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이윽고.
환상인지 아닌지 모를 광경이 모두 사라졌을 때.
소림의 정화를 이은 초인의 목 끝에는 매화가 소담스레 새겨진 장검이 겨누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