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5)
강한 욱신거림에, 혜연은 저도 모르게 턱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통증보다 황당함과 놀라움이 더욱 컸다.
'막아 내지 못했다.'
소림의 권은 정도이자 활인(活人)의 권.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자신의 중심을 세우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 소림의 권을 부족함 없이 익혀 냈다는 평가를 받는 혜연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상대의 일 권을 있는 그대로 얻어맞는다?
'기습?'
아니. 그럴 리가.
비무대 위에 기습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싸우기 위해 오른 곳에서 어떻게 기습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명백한 실력이다.
당황한 혜연이 살짝 주춤했다.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일갈이 꽂혔다.
"혜연!"
그는 그 준엄한 목소리에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소림의 방장 법정이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 차리거라! 너는 소림의 혜연이다!"
혜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세를 잡았다. 얼음장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득하다.
전신의 체온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혜연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소림의 제자.
그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던 이들 역시 다들 쟁쟁한 소림의 일대제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장로들마저 그를 친히 지도해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로님들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중압감이 어째서 이자에게선 전해진단 말인가?'
이 상황이 단순한 대련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비무대회의 결승이라는 상황에 그 자신이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정말 그런 것들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혜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눈앞의 상대가 소림의 장로보다 뛰어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무력이든, 그게 아니면 무인으로서의 자세든 마찬가지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듯한 새파란 청년이 평생 동안 불법과 무학을 닦아 온 소림의 장로보다 뛰어날 수는 없다.
결코!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동심을 유지했다면 청명에 공격에 맥없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공격을 허용했다 하더라도 이리 큰 격동을 겪지는 않았으리라.
"아미타불."
나직하게 불호를 외어 마음을 진정시킨 혜연은 흔들림을 억누르며 자세를 잡았다.
어깨너비보다 조금 넓게 다리를 벌리고, 좌수를 옆구리에 붙인다. 그리고 우수는 손바닥을 편 채, 가만히 가슴 앞에다 붙였다.
반장세(半掌勢).
소림 무학의 근본이 되는 자세이자, 소림의 기초 권법인 나한권의 기수식이다.
익숙한 자세를 취하자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는 깊게 심호흡했다.
- 네가 나약한 마음을 버리고 진정으로 호승심을 얻을 수 있다면, 세상 그 누구도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세워야 할 것은 너의 육신이 아니라 마음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두 발이 굳건하게 대지를 짓눌렀다.
청명은 그런 혜연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잘 배웠네.'
배웠다기보다는 타고난 것에 가깝지만.
소림은 저게 무섭다.
화산이 화려한 매화를 피워 내는 산 정상의 거목이라면, 소림은 그야말로 만년거암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부동(不動).
소림을 상징하는 말.
소림의 무학이 완성하는 데 오랜 세월이 필요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무학은 재능과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지만, 부동심(不動心)만은 세월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풍파를 겪고, 세상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마음을 세운 뒤에야 진정으로 소림의 무학은 그 힘을 발하는 법이다.
하나 지금 혜연은 저 어린 나이에도 그 부동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 천재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 할 만하다.
단…….
"부동이라고?"
청명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너희가?"
가증스럽다.
지금의 소림의 그 누가 부동을 논할 자격이 있나?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건, 그 뱡향이 올곧을 때나 의미가 있다. 뒤틀린 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부동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건 그저 악(惡)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물론 청명에게 악을 심판한다는 의무감이나 정의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
현재 천하에 저 소림과 구파일방의 위선을 단죄할 권한을 가진 이는 오로지 청명과 화산뿐이라는 사실이다.
청명은 차가운 눈으로 혜연을 응시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올곧은 눈이.
자신은 한 점 부끄럼 없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믿는 저 눈이 청명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든다.
'그 눈을 가져야 할 이는 네가 아니었어.'
화산의 제자들이 저런 눈을 가져야 했다.
자신의 문파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쳐나는 눈.
선조들이 이룬 일을 한없이 자랑스러워하며 그 의지를 지켜 나가려는 눈.
그래.
그건 화산의 것이어야 했다.
으드득.
질끈 깨문 청명의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어찌할 수 없는 노기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저 혜연이 소림의 모든 지원을 받으며 온실 속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동안, 본디 그걸 누렸어야 할 화산은 풍파 속에 깎이고 깎이며 움츠러들었고 고통에 신음했다.
제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화산을 다시 정상으로 이끈다 한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없애 줄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게.
그게 참을 수가 없다.
"타아아아아앗!"
쿠우웅!
혜연의 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더없이 강렬한 진각을 밟아 낸 그는 발끝에서 만들어 낸 회전력에 내력을 담아 주먹으로 뿜어내었다.
완전한 발경(發勁).
황금빛으로 빛나는 주먹의 형상이 청명의 얼굴을 향해 쾌속히 날아들었다. 초식을 전개하는 과정은 그리 빠르다고 할 수 없으나, 날아드는 권력(拳力)의 속도만큼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쿵!
짧은 폭음과 함께, 날아들던 권력이 과격한 속도로 옆으로 튕겨 나갔다.
비무대 바닥에 처박힌 나한권의 권력이 단단한 청석을 찰흙처럼 뭉개 버렸다.
하지만 혜연은 자신의 권력이 빚은 광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그저 경악하며 청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튕겨 낸다고?'
나한권을 저리 간단하게?
그의 시선이 청명의 우수로 향했다. 청명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의 기운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한편 아래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죽엽수(竹葉手). 그것도 극성의……?"
'대체 저 아이가 언제 죽엽수를?'
검을 익히기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검을 제외한 다른 무학은 전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죽엽수를, 그것도 극성까지 익혀 냈다는 말인가?
'대체 저놈은…….'
현상은 거세게 흔들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는 듯 죽엽수의 기운을 담은 손을 가볍게 떨쳐 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이 혜연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게 전부냐?"
"……."
"겨우 이 정도로 만용을 입에 담은 건 아니겠지?"
반장세를 취하고 있는 혜연을 향해, 태연한 신색의 청명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더 보여 봐라.'
너는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해야 한다.
네가 소림이 만들어 낸 천하의 기재이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납득시켜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겨우겨우 지켰던 천하가 만들어 낸 것이 고작 이 정도면 안 되지."
혜연이 진각을 밟고 다시금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빠르지만 무겁게.
단단히 세운 허리가 그의 올곧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청명의 눈은 오히려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의 배를 향해 쾌속한 일 권이 내질러졌다. 수도 없는 반복, 뼈를 깎아 내는 수련으로 완벽에 완벽을 추구한 초식에는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하나.
"약해."
쿵!
날아들던 혜연의 주먹은 청명의 죽엽수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혜연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철벽을 두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 밀어도 단 한 치도 밀려날 것 같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가?
그의 내력은 일대제자를 능가하여 장로들과 견줄 수준이다. 당연히 천하 어디를 뒤진다고 해도 그보다 내력이 강한 이대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대제자도 아닌 삼대제자가 그의 권을 이리 간단히 막아 내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이잇!"
혜연이 이를 악물었다.
뻗은 주먹을 회수하고, 다시 짧게 끊어 쳤다. 굳건한 하체를 바탕으로 일시에 삼 연격을 날린 그는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뒤틀며 청명의 몸에 어깨를 들이받았다.
아니, 들이받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채 앞으로 밀고 들어가기도 전에 청명이 내딛은 그의 발을 내리밟는다.
콰드드득!
발이 바닥으로 완전히 파고들었다.
순간 무게중심이 흔들리자 어깨에 온전하게 힘을 실어 내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는 너무도 빤했다.
쿠웅!
힘이 빠져나간 어깨가 청명의 손에 가로막혔다.
청명은 발이 묶인 혜연의 무릎을 짓밟고는 허리가 꺾인 그를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혜연이 아이가 걷어찬 공처럼 바닥을 굴렀다.
촤아아아악.
황포 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생경하게 들린다. 누군가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기라도 하는 듯 뒤로 밀려나던 혜연은 다시 발작적으로 바닥을 박차며 튀어 올라 자세를 잡았다.
"후욱! 후욱! 후욱!"
자세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표정만은 온전한 부동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혹감이 어린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청명을 쫓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자는 검수다.
화산은 검문.
과거에도 화산은 천하제일을 다투는 검문이었지, 권에 두각을 나타낸 문파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가 화산의 제자에게 권각술에서 밀릴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일련의 경합으로 완전한 우위를 점한 저 청명이 혜연보다 몇 배는 더 화가 나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이거냐?"
그의 표정을 보며, 청명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혜연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마다 분노가 끓어 넘친다.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저들은 화산이 누려야 할 것을 앗아 갔다. 저들은 화산이 얻어야 할 것을 빼앗았다.
청명이 살아남았다면, 아니 청명이 아닌 청자 배 중 몇이라도 살아남았다면 저들이 누렸던 영광과 영화는 모두 화산의 것이 되었으리라.
그랬다면 세상은 달라졌겠지.
지금 혜연이 서 있는 자리에 백천이 있었을 수도 있다. 저 자리에 혜연이 아닌 유이설, 혹은 윤종이나 조걸이 서 있었을 수도 있다.
청자 배의 지도를 받은 그들은 구파일방의 기대주로서 세상의 사랑을 받으며 더없이 훌륭한 검수로 자라났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이거라고?"
그렇게 아득바득 양심을 누르고 외면해 가며 만들어 낸 것이 고작 이것인가? 고작?
화산이 온전했을 때 키워 내었을 인재보다 나을 게 없는 실력이다. 이것이 청명을 더욱 화나게 했다.
"더 해봐."
청명이 핏발 선 눈으로 혜연을 노려보았다.
"더 해봐. 이 멍청한 새끼야. 겨우 이 정도는 아니어야지!"
혜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아아아아앗!"
우우우우우웅!
순간 혜연의 온몸이 황금빛의 서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금불(金佛)이 현신한 것처럼 웅혼한 황금빛. 이윽고 일순 뿜어졌던 빛들이 혜연의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배, 백보신권!"
"청명아!"
이미 몇 차례 견식 한 적이 있는 수법이 아니던가.
혜연이 백보신권을 펼친다는 것을 알아챈 화산의 제자들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채 비무대에 닿기도 전에, 혜연의 주먹이 터진 둑에서 쏟아지는 것 같은 막대한 권력을 뿜어내었다.
멀지 않은 거리.
이미 상대를 다치지 않게 만들 여유는 잃은 지 오래였다. 혜연이 전력으로 전개한 백보신권이 청명의 전신을 삽시간이 뒤덮었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뜬 화산의 제자들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보였다.
황금빛의 경기 사이로 붉디붉은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한 것.
그 붉게 솟아난 기운은 신권(神拳)이라 불리는 백보신권의 권력을 환상처럼 갈라 버렸다.
'어떻…….'
용솟음치는 황금빛 권력을 뚫고 나온 청명은 채 자세를 잡지 못한 혜연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각법(脚法)에 실린 힘을 감당하지 못한 혜연의 몸이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다.
적지 않은 타격에도 기어코 다시 고개를 든 혜연의 눈에 이제껏 없던 감정이 배어 있었다.
"일어나."
청명이 손을 휘둘러 바닥을 베어 냈다.
그의 차디찬 시선이 혜연을 넘어 그의 바로 뒤에 있는 법정에게로 꽂혔다.
"화산이 겪은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싸늘한 목소리가 법정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