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4)
각 파의 장문인들이 모인 단상의 중앙은 허도진인이 차지했다.
본디 법정이 있어야 할 자리지만, 오늘은 법정과 현종 모두 단상에 오르지 않고 자파의 제자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으음."
비무대를 바라보는 허도진인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허허. 마침내 결승입니다."
"정말 훌륭한 기재들이 아닙니까? 누가 이기더라도 좋은 일이지요."
주변에서 나누는 대화에, 허도진인의 눈이 못마땅한 듯 가늘어졌다.
'좋은 일이라고?'
웃기는 소리.
둘 중 누가 이기더라도 구파일방에 좋은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소림의 혜연이 우승을 한다면 소림의 지배체제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고, 화산의 청명이 우승을 한다면 구파는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화산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 승부가 향후 수십 년을 가른다.'
결승에 오르지 못한 구파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은 대부분 후기지수 비무대회에 불과하다며 이 승부의 의미를 평하절하하려 들었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지.'
소림의 혜연도, 화산의 청명도 결코 평범한 후기지수가 아니다.
혜연은 그 소림에서도 몇백 년에 한 번 나올 인재로 평가받고 있고, 청명 역시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말해, 저 두 사람이 강호를 쥐고 흔드는 날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무는 차후 강호 전체의 향방을 결정함과 동시에, 훗날의 천하제일인 후보 중 누가 더 그 자리에 근접해 있는가를 가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의미를 어찌 작게 볼 수 있겠는가?
허도진인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으로는 평온한 말을 해 대고 있지만, 비무대를 바라보는 장문인들의 눈빛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이 승부의 결과로 어디에 줄을 댈지를 결정하겠다는 의미겠지.
그 눈빛의 의미를 파악한 허도진인은 미묘한 지으며 비무대 앞에 앉아 있는 법정을 바라보았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속상하시겠소, 방장.'
구파일방의 배제와 소림의 완전한 승리.
아마 그것이 혜연이 이 비무대회를 시작하며 준비한 각본일 것이다. 물론 구파일방의 배제는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사강에는 소림을 제외한 구파일방의 제자가 단 하나도 오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이 비무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
혜연이 승리한다면 법정의 계획은 완벽해진다. 아니, 오히려 처음 짜 놓은 것 이상으로 화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패한다면?
'오히려 이 상황을 만들어 내지 않은 것만 못해지겠지.'
다른 구파일방에게 패한다면 나름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구파일방에서 쫓겨났던 화산에게 패해 우승을 내어 준다면 소림에 대한 책임론이 생겨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화제를 끌어모았던 만큼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소림이 온전히 져야 한다. 만약 이 결승에서 패한다면, 소림은 얻는 것 하나 없이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저 법정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허도진인의 시선이 비무대 위로 향했다.
청명과 혜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재미있구나.'
저 둘 중 누가 훗날의 강호를 대표하는 이가 될지 모르겠지만, 누가 되었든 후인들이 저들의 업적을 논할 때는 이 비무대회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패한 이는 필연적으로 상대를 빛내 주는 악역이 되겠지.
"역사란 그런 것이니까."
그럼 둘 중 누가 화려한 양지로 나설 것인가?
조금은 즐기는 심정이 된 허도진인이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처음에는 귀가 먹먹할 만큼 환호성이 쏟아졌지만, 두 사람의 대치가 길어질수록 그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해졌다.
그 정적 속에서, 청명은 말없이 혜연을 바라보았다.
혜연의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때때로 비무대 위에서 보이던 수줍음은 찾아볼 수 없다. 되레 중이라는 신분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투지로 넘쳐나는 눈이었다.
'악당을 보는 눈인가?'
그렇겠지.
네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겠지.
천하를 웅비하는 소림의 방장이 직접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고사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자신이 하늘처럼 여기던 방장이 새파란 삼대제자에게 무안을 당했으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 다른 문파의 삼대 제자에게 장문사형이나 현종이 타박을 받는 걸 청명이 보았다면?
그날로 그 문파는 현판을 내려야 한다. 청명이 입에 거품을 물고 개처럼 미쳐 날뛸 테니까.
그러니 혜연의 입장은 당연히 이해한다.
오히려…….
'나는 그러지 못했지.'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문사형이 말하는 의기와 대의를 그대로 지키려 했다. 천하와 강호라는 이름을 화산의 앞에 두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혜연의 모습은 청명에게 묘한 감회를 불러왔다.
'너는 틀리지 않았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었을 것이다.
다만.
청명의 눈이 혜연을 넘어 비무대 뒤에 앉은 법정에게로 향했다.
굳은 얼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뒤틀렸던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화난 얼굴로 보지 말라고.'
정말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이쪽이니까.
그때 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선을 넘으셨소."
청명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뭐래. 대머리가."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딱히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 넘은 건 그쪽이지."
"시주!"
변하지 않는 청명의 태도에 결국 혜연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최대한 좋게좋게 말을 해 보려 했지만, 이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한때 명문검파로 천하를 호령했던 화산파의 제자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어찌 그리 경망……."
"아가리 닥쳐. 멍청한 새끼야."
"……."
혜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청명이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 뽑아 들었다.
"뭐 대단한 소리라도 지껄이고 싶은 모양인데, 잘난 소림에 들어가 온갖 귀여움 다 받고 자란 놈한테 훈계 듣고 싶은 생각 없어."
"이 무도한……!"
"네가 지껄이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
혜연의 눈에 의혹이 차올랐다.
어디에서?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런 혜연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은 더없이 싸늘했다.
"네가 소림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너는 지금 내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겠지."
네가 거들먹거릴 수 있는 이유야 간단하지.
너는 소림의 제자니까.
천하제일문파, 소림.
하지만 말이야.
그 소림이 지금껏 떵떵거릴 수 있게 만들어 준 건 다름 아닌 화산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훈계가 올바른 것이든 아니면 헛소리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확실한 건 단 하나.
"너희는 나를 훈계할 자격이 없어."
구파일방이라는 이름하에 있는 이들은 감히 청명의 앞에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아니, 감히 화산의 앞에서 주둥이를 나불대서는 안 되는 법이다.
"너는 모르겠지."
몰라.
절대 알 수 없지.
청명이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를 말이다.
단 한 곳이라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모두 모인 이 소림에서 단 한 문파만이라도 먼저 화산을 찾아와 존중을 보였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 한 곳.
그저 단 한 곳만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명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
거들먹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보자니 속에서부터 살의(殺意)가 끓어오른다.
'불과 백 년 전의 일이다.'
잊히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적어도 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라면 화산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 돌아온 화산에게 형식상으로라도 사과하려 들지 않았다.
철저한 무시. 그리고 외면.
화산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나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물을 보내오며 과거를 묻으려 했을 뿐이다.
청명을 정말 참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무얼 위해 죽어 갔는가?
그의 사형제들은 대체 무얼 위에서 그런 희생을 치렀는가?
저 개 같은 것들이 편히 삶을 즐기게 만들기 위해 그 생때같은 목숨을 내던졌던가?
청명은 기다렸다.
비무대회 내내.
그 긴 시간 동안 억지로 웃고 떠들고, 소리치며.
이곳에 모인 누구라도 이곳에 화산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도록, 떠들썩하게.
하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화산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지고, 그들이 좋은 성적을 내보이고, 과거의 실전된 유학을 복구하여 스스로를 다시 증명하는 와중에도 저들은 화산을 그저 부활하는 과거의 문파로 치부했을 뿐이다.
그 누구도.
그 어느 곳에서도 화산 사형제들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려 하지 않았다. 그 누구 하나도 화산의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면 족했다.
화산이 있어 강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대단한 찬사도 필요 없다.
눈물겨운 읍소도 필요 없다.
그저 그 한마디면 됐다.
하지만 저들은 그 한마디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모든 일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양 입을 닦고 기특하다는 듯이 화산을 내려다보았다.
그 개 같은 상황이 청명을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 침묵이.
입을 닫는다는 건, 저들에게 아주 작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침묵이 사형제들의 숭고한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었다.
개죽음으로…….
"……뭐, 됐어."
쿠우웅!
청명이 검을 검집째 비무대에 그대로 박아 넣었다. 단단한 청석이 쩌적쩌적 갈라졌다.
그 괴이한 행동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이어진 청명의 행동도 상식과 예상을 모두 간단하게 벗어나 있었다.
그가 바닥에 꽂은 검을 내버려 둔 채 앞으로 한 발짝 나선 것이다.
마치 검 없이 혜연을 상대하겠다는 듯이.
"……시주?"
혜연의 의아한 목소리에, 청명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굳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아.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테니까."
선의를 내보이며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그렇게 만들어 주지.
"힘으로 때려눕히고, 강제로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조아리게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물론 장문사형은 싫어하겠지만, 어차피 나는 옛날에도 그 양반 말 안 들었거든."
혜연이 안색을 굳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 없이 소승을 상대하려 드는 것은 만용이오."
"만용?"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검을 드시오. 그리고 제대로……."
그 순간이었다.
청명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청명의 종적을 놓친 혜연은 기겁을 하여 감각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찾았……!'
청명의 종적은 발견했다. 하지만 혜연은 그 사실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감각이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청명이 바로 코앞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은 혜연의 턱에 청명의 주먹이 틀어박힌다.
쿠웅!
예상도 하지 못한 일격에 튕겨 나간 혜연이 바닥을 뒹굴었다. 몇 번을 구르고서야 비무대의 끝을 잡고 멈출 수 있었다.
혜연은 경악 어린 시선을 보냈다. 황망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청명은 그저 차갑게 일갈했다.
"일어나."
혜연은 소림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인재다.
다시 말하자면 소림의 자존심이고, 저 콧대 높은 구파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러니 여기에서 시작한다.
"일어나."
망연해진 혜연의 눈과 싸늘한 청명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 마주쳤다.
하나 청명이 보고 있는 건 혜연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혜연만큼이나 적잖이 당황한 법정은 물론, 그 노승을 지키고 있는 소림의 제자들까지 모조리 시야에 담고 있었다.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일어나. 그 알량한 자존심이란 걸 아주 제대로 뭉개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