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3)
창밖에서 햇살이 밀려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침상에서 명상을 하던 청명은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을 느끼고야 눈을 떴다.
'오늘이로군.'
가만히 창밖을 보던 그는 손을 뻗어 침상 옆에 놓인 검을 들었다.
스르르릉.
천천히 검을 뽑아 검면을 손끝으로 살짝 튕겼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어디 가 볼까?"
재미있는 하루가 되겠지.
아주 재미있는.
청명은 세안을 마치고 의관을 정제했다. 평소에는 이런 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지만, 오늘은 모든 준비를 끝내는 데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딱히 오늘을 경건히 준비해야 한다 생각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청명은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벅. 저벅. 저벅.
일 층에는 이미 모든 화산의 문도가 준비를 끝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찍 나오셨네요."
그 천연덕스러운 말투를 들은 현영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긴장될 만도 할 터인데.'
실력이 있다고 해서 긴장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실력이 확고한 이들은 반드시 이뤄야 할 것 있다고 생각하기에 평범한 이들보다 더 긴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명의 얼굴은 평소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잘 잔 모양이구나."
"네. 푹 잤죠."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참.'
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른 화산의 문도들도 같은 느낌을 받은 건지, 분위기가 순식간에 훈훈해졌다.
그때 현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너는 이 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나는 네게 굳이 우승을 바라지는 않는단다."
청명은 말없이 현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저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화산이 더는 무시받을 문파가 아님을 증명해 준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단다."
청명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될 겁니다, 장문인."
시원한 대답이었다. 현종은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기이한 일이지.'
사고뭉치.
언제나 화산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녀석.
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가장 믿음직한 녀석이다.
"자, 그럼……."
현종이 모두를 돌아보았다.
결승에 오른 것은 청명.
하지만 청명 홀로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 이토록 활약해 주지 못했다면, 청명이 결승에 올랐다 해도 그저 작은 파란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둬 준 덕분에 청명의 결승 진출이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화산을 무시하지 못한다.
'화산은 강해졌다.'
살짝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 현종은 고개를 돌려 활짝 열린 전각의 문을 바라보았다.
"다들 어깨를 펴거라."
"예. 장문인."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희의 동작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가자꾸나. 가서 보여 주자꾸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두 눈에 의지를 담고 현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눈들을 보며 현종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결과 따위는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지.'
삼 년 전에는 이 아이들에게 이런 눈빛을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화산이 이 대회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명성도, 실리도 아닌 '자신감'.
"가자."
"예!"
현종을 필두로 화산의 제자들이 보무도 당당히 전각을 나섰다.
* * *
"아! 밀지 말라고!"
"여기 안 밀리는 사람 어디 있어?! 유난 떨지 말고 그냥 참아!"
"세상에. 사람이 이리 많이 모인 건 살다 살다 처음 보는군!"
소림은 말 그대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대회 내내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지만, 오늘은 결승이다 보니 평소보다 그 인원이 배로 많은 것 같았다.
그로도 모자라 아직도 소림으로 몰려드는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역시나 우승은 소림의 혜연 아니겠는가? 나는 아직도 그가 보여 준 무상대능력을 잊을 수 없네. 정말 강렬했지!"
그 말을 들은 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모르는 소리! 화산의 화산신룡은 사강에서 단 일 검만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네. 그리고 혜연은 화산의 제자에게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사강에 오른 이들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저 화산신룡은 혜연보다 한 차원 위의 강자라고 봐야 하는 법이지!"
"실력이라는 게 어디 그런 식으로 견주어진다던가! 직접 붙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걸세!"
"이런, 빌어먹을! 그 옹이구멍 같은 눈깔로 대체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나?"
"뭐야, 이 자식아?"
처음엔 점잖은 척 대화하던 이들이 감정이 격해지자 서로의 멱살을 틀어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선 말리기는커녕 찰나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모두 결승이 언제 시작되는지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게다가 이미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이다.
소림의 분위기는 숫제 달아오르다 못해 거의 과열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비무대회 전반에 대한 평과 우승자 예측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의 논리와 근거로 말을 늘어놓으며 모두가 마지막 비무대회를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삐 도박 좌판에 판돈을 걸고, 먹을 것을 사고, 우승자를 예측하며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마침내 해가 중천에 올랐다.
소림이 미리 예고했던, 결승의 시간이 온 것이다.
떠나갈 듯 시끄러웠던 소림이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림이다!"
"소림이 온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중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저 멀리 전각 사이로 소림의 황포를 입은 이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다.
그 무거운 기세를 온몸을 느낀 이들이 더욱더 열광하여 소리를 질러 댔다.
"역시 소림이다!"
"어차피 우승은 소림이 하게 되어 있어!"
"방장께서 직접 소림을 이끄신다!"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도 소림 문하들의 발걸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 소림은 강호의 북두 자리를 태산같이 지켜 왔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어찌 그들에게 도전하는 이가 없었을 것이며, 어찌 부침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소림은 그 모든 도전을 이겨 냈고, 그 모든 부침을 극복해 냈다. 그렇기에 강호의 모든 동도가 소림을 천하제일문파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소림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신뢰가 어려 있었다.
화산의 도전이 거세기는 하지만, 오늘도 소림은 결국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리고 소림이 천하제일문파임을 다시 한번 세상에 각인시킬 것이다.
그 신뢰 어린 눈동자가 소림과 그들의 가운데서 걸어오고 있는 혜연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그 환호성은 또 다른 환호성 앞에 무색해져 버렸다.
"화산이다아아아아!"
"화산이 온다! 화산신룡이다!"
"화산! 천하제일검문이다!"
그 환호는 소림에게로 쏟아지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정된 체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변혁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원한다.
설사 그 변혁이 끝끝내 이뤄지지 못한다고 해도,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는 이들은 응원과 지지를 받기 마련이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화산이 그 새로움의 상징이었다.
소림. 그리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수백 년을 이어 온 강호의 체계를 상징하는 이들. 화산은 그 낡고 둔해진 체계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구파일방의 오랜 집권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모두가 화산에 환호했다.
강호라는 거대한 집단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겨우 한 줌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한 줌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당연히 화산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산신룡! 소림을 쓰러뜨려 줘!"
"구파일방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라!"
"저 빌어먹을 땡중 놈들을 쓸어버려라!"
중앙에 위치한 비무대를 끼고, 좌우로 열린 길을 따라 소림과 화산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그들을 향한 함성이 우레처럼 쏟아졌다.
윤종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걸음이 조금 둔해지자 조걸이 의아한 눈으로 물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아니. 다름이 아니라……."
윤종은 어색하게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느냐. 화산이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환호를 받다니."
"……."
조걸도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다?
그래, 이상하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화산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는 문파였다. 심지어 화산에 입문하여 검을 익히고 있던 윤종과 조걸조차도 화산이 다시 부활할 거란 희망 따윈 품지 않았었다.
그저 인연이 이끌었으니 그 인연을 지켜 나갈 생각이었을 뿐.
하지만 지금 화산은 천하가 주목하는 문파가 되었다.
이 쏟아지는 환호가 거짓말 같기만 했다.
'결국은 그때가 시작이었지.'
조걸은 청명이 처음 화산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작고 꾀죄죄하던 아이. 조걸의 방을 둘러보고 있던,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던 그 모습.
조걸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청명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등.
하지만 저 등이 지금 화산의 모두를 이끌고 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저 청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자 결심했을 때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사형."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기는."
윤종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조걸이 하고픈 말이 뭔지는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윤종 역시 격정이 가슴에 차올라 말을 잇기 힘드니까.
"사형. 청명이 놈은 대체 어디까지 갈까요?"
"……글쎄."
윤종이 다시금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라……. 그건 누구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다.
"청명이 놈이 어디까지 가든, 어떤 세상을 걷든, 그 옆에는 우리가 있을 것이다."
윤종의 말에 조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들뿐만 아니라 청명의 곁에는 화산이 함께할 것이다.
이윽고 비무대에 다다른 청명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걷던 백천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청명아."
"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으음……."
백천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게 얻어맞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너를 능가하는 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뭐래?"
"그러니……."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돌아와라."
청명이 뭐라 한 소리를 하려는데, 유이설이 뒤에서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엥?"
툭툭.
가볍게 청명의 머리를 두 번 두드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겨."
"……."
윤종과 조걸도 다가와 청명의 어깨를 주물렀다.
"할 수 있다. 청명아."
"네가 지는 건 말이 안 되지!"
당소소와 백상, 염진을 비롯한 청자 배, 그리고 백자 배들까지도 모두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기고 와라."
"믿는다."
"네가 지는 건 상상도 안 된다. 당연히 이길 거다!"
그 모든 행동들에, 청명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이 양반들이……."
하지만 무안을 주려던 그는 이내 모두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믿음만 가득한 눈빛.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의 눈빛.
그가 이런 눈빛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
물론 과거의 화산도 그를 신뢰했다. 그의 실력만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눈빛들은 그때와 조금 다르다. 실력을 떠난 신뢰. 그들을 이끌어 가는 이에게 보내는, 존중이 가득 담긴 눈빛이다.
"……거참."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떨고 있어."
그리고 몸을 다시 슬쩍 돌려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기다려."
그런 그의 옆얼굴에 화산 제자들의 눈이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화산이 최고가 되어 있을 테니까."
다만, 담담한 선언을 마지막으로 비무대를 향해 올곧게 걷기 시작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네.'
자꾸만 고개가 뒤를 향하려 하지만, 의식적으로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지금은 뒤를 돌아볼 때가 아니니까.
'장문사형.'
때때로 그럴 때가 있었다.
청문이 홀로 앞서서 걸어갈 때가.
그럴 때면 화산의 누구도 그의 곁에 서려 하지 않았다. 뒤에 서서 이끄는 자의 등을 보는 것만으로 괜스레 힘이 나고 의지가 솟아나는 법이니까.
그리고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청명의 등을 보고 있다.
과거 청문이 했던 역할을, 이젠 청명이 하고 있는 것이다.
무겁다.
그래서 이상하다.
온 천하의 기대를 받으며 마교와 싸울 때도 청명은 조금도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적은 더없이 강했고,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청명이 느꼈던 부담은 지금 그가 느끼는 무거움과 그 결이 다르다.
누군가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
그게 이토록 사람의 어깨를 무겁게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것만은 아니야.'
밀어 준다.
저 신뢰 가득한 눈빛들이 청명의 등을 밀어 주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 보답해야겠지.
멈춰 선 청명이 앞을 응시했다. 혜연이 비무대로 올라오고 있었다.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목은 씻고 왔겠지, 문어 대가리?"
이제 세상을 뒤엎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