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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22화 (322/1,567)

322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2)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말은 좋지만 결국 따져 보면 화산더러 소림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뜻이잖아요. 그럼 구파일방이라는 감투를 던져 주겠다. 이거죠?"

"……."

법정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어지간한 일로는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당황을 숨기지 못할 만큼 당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다 떠나서, 한 문파의 삼대제자가 감히 장문인들의 앞에서 꺼낼 만한 말은 아니다.

"소림은 달라진 게 없네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

법정의 물음에 청명은 대답 대신 피식 웃기만 했다.

화합? 감투?

뭐, 다 좋다.

그리 나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닐 거란 건 청명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문제였다.

'이 새끼들은 지들이 당연히 강호를 이끈다고 생각한다니까.'

소림이기에 당연히 가지는 오만이다.

"일 없으니 돌아가세요."

법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미타불. 객으로 왔으니 웬만해선 내가 참으려 했다만, 그 말은 한낱 삼대제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본승은 지금 네 장문인과 협의를 하고 있는 중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을 자른 건 현종이었다.

조금 놀란 법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화산의 소속이라면 누구나 화산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저 아이의 의지가 곧 제 의지이고, 또한 화산의 의지입니다."

"……장문인."

말문이 막힌 법정이 잠깐 침묵했다. 그때 청명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소림은 언제나 강호를 주도해 왔죠. 오십 년 전에도, 그리고 백 년 전에도."

백 년 전이라는 말이 나오자 법정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래서, 화산이 몰락해 망해 갈 때 소림은 뭘 했죠? 백 년 전 화산의 의기에 감사한다던 그 소림은?"

"……아미타불."

"돌아가세요."

청명의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和)를 말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진심을 보일 수 있는 이뿐이에요. 소림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소도장!"

"방장께서 지키려 하는 것은 천하의 화합이 아니라 소림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강호겠죠.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소림의 방장이신 이상 당연히 그러셔야겠죠. 하나."

청명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입으로만 말하는 화합에는 관심 없어요. 제멋대로 이용하면 이용하는 대로 당하다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험은 더 이상 필요 없거든요."

청명을 보는 법정의 얼굴에선 표정이 싹 사라져 있었다.

"화산은 천하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미요?"

"네."

"……대체……."

"천하를 생각해 모든 걸 희생했던 화산에게, 천하는 대체 무엇을 해 줬죠?"

"……."

"이제 와 적당한 감투 하나 던져 주면 다시 말 잘 듣는 개처럼 달라붙을 거라 생각하셨나 본데…… 과히 순진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구파일방에 오르지 못한 도전자가 어찌 되는지 알고 있소?"

"공격받겠죠."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화산이 종남에게 두들겨 맞고 있을 때 누구 하나 말린 문파라도 있었나요?"

"그건……."

"똑똑히 알아 두세요."

그리고 싸늘하게 입가를 굳히며 일갈했다.

"화산이 몰락했을 때 구파는 아무것도 돕지 않았죠. 화산이 다시 힘을 되찾을 때도 구파는 무엇 하나 도움 준 게 없었어요. 그러니 화산이 다시 천하를 웅비할 때도 구파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

"그 낡아 빠진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에 화산이 혹할 거라 생각하신다면 오해라고 대답해 드리죠. 화산은 그저 화산! 그 자체로 충분하니까."

그의 차갑고 투명한 눈동자가 법정을 압박했다.

'개 같은 놈들이.'

이딴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화산이 있어 강호가 버티고 있다.'

'화산이 있어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의기.

그래, 의기.

그 엿 같은 의기 때문에 화산이 무슨 꼴을 당했던가.

그의 사형제들이, 그의 사질들이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모조리 죽어 나갈 때, 이 개 같은 것들은 제 전력을 온존하고 미래의 희망을 남겼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소림은 여전히 소림이고, 구파는 여전히 구파이건만 화산만은 몰락하여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뭐?

화합?

청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법정에게 달려들어 저 잘난 주둥이를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다.

백 년이 지났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화산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때는 알고 있음에도 당해 주었다.

누구 하나 나서서 이끌지 않으면 강호는 정말로 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까.

희생이 크더라도, 그 후유증이 더없이 크다 해도 강호가 마교에 지배당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했다.

- 알아주길 바라진 않는다. 그저 해야 할 것을 할 뿐이다. 청명아. 이익도 물론 중요하다. 하나 이익에 눈을 빼앗겨 해야 할 일을 도외시 한다면 너는 제자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느냐?

'사형이 틀렸어요.'

그 대가로 화산의 선인들은 정말로 제자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위선을 저지른 것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인과응보?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조금도 빠뜨리지 않는다고(天網恢恢疎而不失)?

개 같은 소리.

하늘은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 인과응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건 사람이고, 죄인에게 벌을 주어야 하는 것 역시 사람이다.

청명은 인과응보 따위는 기다리지 않는다.

화산에 죄를 지은 이가 있다면 그가 직접 벌을 줄 것이고, 화산에 은혜를 베푼 이가 있다면 직접 그 은혜를 갚을 것이다.

하늘이 하지 않는다면 그의 손으로 한다.

그게 청명이 화산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소도장은 지금 소도장의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고 있소?"

"협박인가요?"

법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이 얼핏 지쳐 보였다.

"선의를 가지고 찾아온 이를 이리 핍박하는 것이 아니오."

"선의?"

청명이 피식 웃었다.

"방장."

"……."

청명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흡사 상처 입은 늑대 같았다.

"최소한의 선의라도 논하고 싶었다면, 제안을 할 게 아니라 사죄를 했어야 합니다."

"……."

"물론 억울할 수 있겠죠. 그건 방장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니까. 하나 그게 억울하다면 지금 소림의 이름으로 방장이 누리고 있는 것 역시 내어 놓아야죠. 소림이 저지른 일로 얻은 영화는 고스란히 누리면서, 그 잘못에 대해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진정 소림의 방식입니까?"

법정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 역시 힘 있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화산에는 소림과 척을 져 가며 대립할 힘이 아직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어린 도사는 그에게 이를 드러냈다. 그것도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이를.

"돌아가세요."

"……."

"소림이 재편하는 질서에 화산은 들어갈 생각이 없어요. 화산은 화산의 질서를 세울 겁니다."

"화산은 그럴 힘이 없소."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청명의 얼굴이 다시 평소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법정의 옆에 앉은 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은 그걸 증명하는 자리가 되겠죠."

파르르 떨리던 법정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는 고개를 획 돌려 현종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의 방자한 말이 정말 화산의 입장이오, 장문인?"

현종은 그 질문이 퍽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치기 어리고, 감정적이고, 뒤를 보지 않는 말이지요."

"그럼……."

법정이 막 말을 받으려는 찰나, 현종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데 이 아이의 말에 틀린 것이 있습니까?"

"……."

그 조곤조곤한 말에 법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저도 말리고 싶습니다. 그저 고개 한 번 숙이고 없던 일로 치면 얻을 것이 너무 많은데, 왜 방장의 뜻대로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하나, 방장. 방장이 소림의 장문이듯 저 역시 화산의 장문입니다. 화산의 장문인이 되어서 어린 제자에게 옳은 것을 억누르고 이익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화산은 그저 화산일 뿐입니다. 구파일방에 들든, 들지 못하든 화산은 그저 화산이지요. 그런 감투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화산은 화산의 길을 갈 뿐입니다."

법정은 떨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리 답답한 이들일 줄이야.'

적어도 실리를 알고 대계를 안다고 생각했건만, 사소한 과거의 원한에 집착하여 소림이 내민 손을 걷어차다니.

"……장문인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법정은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들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혜연도 가만히 일어섰다.

법정은 몸을 획하니 돌리며 말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결승이 끝난 뒤 다시 한번 대화를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방장."

"그럼."

그리고 홀연히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하지만 법정과는 달리, 혜연은 걸음을 옮기지 않고 빤히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이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마주했다.

"뭐?"

"……시주."

마침내 조곤조곤 입을 연 혜연의 시선은 다소 싸늘했다.

"시주가 잘못되었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이는 자신만의 뜻이 있고 그 뜻을 논할 수 있는 법이지요. 하나."

혜연이 작게 반장한다.

"그 뜻을 전함에 있어서는 예와 배려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 시주에게는 그 예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례는 오만에서 나오는 법이라 했습니다. 하여 저는 내일 시주의 오만함을 조금 눌러 주려 합니다."

"호오?"

이거, 내일 너를 개처럼 때려잡아 주겠다는 도발인가?

청명은 그런 혜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소심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혜연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노기가 드러났다. 심지어 눈빛에는 명백한 적의마저 어려 있었다.

청명에게 화산이 그러하듯, 혜연에게도 소림은 더없이 중요한 곳일 터.

그런데 그 소중한 소림의 방장이 화산의 새파란 삼대제자에게 망신을 당했으니, 그 꼴이 혜연에게 어떤 감정을 주었을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해보시든가."

"아미타불!"

혜연은 강한 어조로 불호를 외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몸을 획 돌렸다.

"각오하고 나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서려는 혜연을, 청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어이."

그러자 혜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말 기억해 둬."

"뭘 말이오?"

"오만을 눌러 주겠다는 말."

"……."

"그 말 그대로 돌려줄 테니까."

그는 이윽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음."

청명이 슬쩍 현종의 눈치를 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장문인, 저는……."

"괜찮다."

"아니, 그게…… 열이 너무 올라서."

"괜찮다 하지 않았더냐."

뒤늦게 민망한 얼굴로 사과하려는 청명을 말리며 현종은 빙그레 웃었다.

"청명아."

"예, 장문인."

"나는 몰락하는 화산을 보며 한 가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없는 의기는 아무런 의미를 담지 못한다."

청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종은 그런 그에게 진중하게 물었다.

"너는 그 힘을 증명할 수 있느냐? 우리의 뜻을 천하의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 관철할 수 있겠느냐?"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그건 제 특기죠."

실로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현종은 가만히 웃었다.

"그래. 그걸로 됐다. 보여 주자꾸나. 화산은 더 이상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말이다."

"예!"

의지견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청명을 보며 현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청명아.'

이 아이의 저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아이의 저 분노는 또 어디에서 오는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아이다.

'언젠가는 말을 해 주겠지.'

언젠가는 청명이 자신의 속에 품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화산에는 짙은 매화주의 향이 진동하겠지.

옅은 웃음과 아련한 슬픔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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