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1)
들어선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백천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포권 했다.
"바, 방장을 뵙습니다!"
덕분에 퍼뜩 정신이 든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일제히 포권을 했다.
"방장을 뵙습니다."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무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백천의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소림의 방장은 강호의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아니던가?
그런 이가 직접 발걸음을 해 주었으니 영광이면 영광이지, 실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는지……."
백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법정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물론 용건이야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안에 계시온지?"
백천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합니다. 진즉에 장문인께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백상아! 빨리 장문인께 소림의 방장께서 방문하셨다고 전하거라, 어서!"
"예, 사형!"
백상이 전력으로 질주해 이 층으로 달려갔다.
남은 이들은 대체 소림 방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때 방장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래."
그는 빙그레 웃으며 청명과 눈을 마주쳤다.
"결승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소이까, 화산신룡?"
청명이 그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딱히 준비할 게 있나요? 어차피 싸움박질인데."
"싸움박질이라."
법정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저 싸움박질일 뿐이지. 그걸 혜연도 알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음?"
청명이 막 반문하려는 순간 백상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이 층으로 드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청명아, 너도 따라오너라. 장문인께서 함께 오라 하셨다."
"네."
청명이 스스럼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리 오시지요."
"감사하외다."
법정이 웃으며 백상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법정과 혜연, 그리고 청명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남겨진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왜 온 거래?"
"……글쎄."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네 사람이 올라간 이 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방장."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거참 입장이 곤란합니다. 주인 된 입장으로 객을 받아야 할지, 객의 입장에서 주인을 받아야 할지."
현종의 말에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이 소림이라고는 하나, 이 전각을 화산에 내어 드린 이상 제가 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아."
"그러니 대접 한번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디 곡차라도 조금 내어 와 볼까요?"
"곡차가 있습니까?"
"농입니다. 농이에요."
"으음. 그것 아쉽군요. 농이 아니면 좋았을 것을."
"하하하하. 방장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이거 참 색다릅니다. 하하하하."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현종을 보며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땀이나 좀 닦고 웃지.'
말은 잘하고 있지만, 긴장으로 어색하게 굳은 얼굴과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하지만 청명은 그런 현종을 한심하게 볼 수는 없었다. 소림의 방장과 독대하는 자리는 천하의 누구라도 힘겹고 부담스러울 테니까.
"크흠."
청명이 슬쩍 헛기침을 했다.
그가 여기에 있으니 그리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현종이 슬쩍 고개를 들어 청명을 바라보았다. 구겨져 있던 얼굴이 그제야 살짝 풀렸다.
"그런데."
이대로 현종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었던 청명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웬일이세요?"
법정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그야, 결승을 앞두고……."
"곧 박 터지게 싸울 사이에 친분이나 나누자고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그렇죠?"
법정이 말없이 청명을 보며 미소 지었다.
'생각 이상으로 당돌하구나.'
그의 시선이 청명을 관조했다.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조차도 그를 앞에 두고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청명은 그와 혜연을 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금 지루하다는 기색마저 내보이고 있었다.
대범한 것인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인가?
'어느 쪽도 아니다.'
위화감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청명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자면, 강호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노고수를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가?'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
법정은 자신의 감각을 무척이나 신뢰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이치를 따져 묻는 것보다 번뜩이는 육감이 더 많은 것을 전해 줄 때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의 육감이 말하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선대를 대하는 느낌이라니.'
닮았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집착을 보이는 모습이나, 남들이 보는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점 따위가.
그리고 중간 중간 슬쩍슬쩍 던지는 별것 아닌 말이 미묘하게 핵심을 짚고 있는 것까지도.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소림의 태상장로들을 대할 때 가끔씩 받던 느낌이다. 그런 감각이 이 어린 검수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물론 법정은 그런 속내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화산신룡이 그리 말하니, 내 더는 너스레를 떨 수 없겠구려. 물론 소승이 이곳을 찾아온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장문인."
"말씀하시지요, 방장."
"장문인께서는 당금의 강호를 어찌 보십니까?"
"어찌 보냐 물으시면……."
법정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비무대회에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현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현종의 얼굴을 잠깐 살핀 법정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디 이 비무대회는 문파간의 화합을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제 결승을 앞에 두고 있건만 비무대회의 목적은 조금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문파간의 알력은 오히려 더 심해졌고, 서로를 견제하는 움직임만 심해지고 있습니다."
"……으음."
"마교가 다시 움직임을 보이고, 세외가 들끓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 끔찍한 전쟁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려를 거두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데 그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미타불. 화합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법정의 눈이 빛난다.
"하지만 그게 자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강제적으로라도 이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화산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말입니까?"
"예."
"아니……. 화산이 뭐라고……."
당황하는 현종을 보며 법정이 미묘하게 웃었다.
"장문인. 화산이 가지는 의미는 장문인께서 생각하시는 그 이상입니다."
"……으음."
"이번 대회에서 화산은 천하에 그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하나 겨우 후기지수의 활약이 아닙니까?"
"후기지수는 문파의 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문파들이 향후 강호를 선도해 갈 확률이 높다는 뜻이지요. 화산은 사강에 둘을 올렸을 뿐 아니라, 탈락한 제자들 하나하나가 그 실력의 녹록치 않음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천하의 어떤 문파도 화산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현종은 굳이 찾아와 이런 말을 늘어놓는 법정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 애썼다. 하나 노승의 얼굴에는 그 어떤 속내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러니 소림을 도와주십시오, 장문인. 화산이 소림을 도와주신다면 소림은 강호를 진정한 화합의 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소림 밑으로 들어오라?'
이 화상 보소?
얼굴은 순진하게 생겨선, 아주 정치질이 환관 뺨치시는데?
현종이 갑작스런 제안에 대한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하여 침묵하는 사이, 청명이 슬쩍 선수를 쳤다.
"그런데요."
"음."
법정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도움이라는 건 일방적일 수 없는 거죠. 서로 도와야 의미가 있지 않나요?"
"아미타불. 소도장의 말이 타당하네."
"그럼 소림은 뭘로 화산을 돕는다는 거죠? 저희는 받을 게 없어 보이는데요?"
그 당돌한 질문에 법정은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글쎄. 그게 나도 고민일세. 무엇을 도와야 할까. 흐음. 이건 어떤가?"
"……?"
"예를 들면……."
법정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화산의 구파 복귀를 소림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현종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움찔했다.
"구, 구파 복귀라 하셨습니까?"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현종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물론 이 이야기가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니다. 현종 역시 이대로만 간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라 내심 생각해 왔으니까.
하나.
그 말이 소림의 방장의 입에서 나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거기에 그냥 지지도 아니고 '전폭적인 지지'라는 말이 붙지 않았는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소림의 방장이다.
강호에서 소림이, 그리고 소림의 방장이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이뤄지지 않을 일이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이건 화산이 구파일방에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확약이나 다름없었다.
"어찌하여 그런 약속을……."
"장문인."
법정이 사람 좋게 웃었다.
"저는 화산의 가능성을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 그렇기에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있고 장문인이 있는 시대에는 소림과 화산이 서로 화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잠깐 멈추며 혜연과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대에는 반드시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
현종은 법정의 시선이 청명에게 향했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후대?'
그들이 죽고 난 직후를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리에 굳이 혜연을 대동했다. 즉 후대라 함은 혜연이 소림의 전권을 잡을 그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혜연이 소림의 방장이 될 때라면 화산은 당연히…….
'아니지! 아니지!'
현종은 속으로 몰래 진저리를 쳤다.
물론 청명은 굴러 들어온 복덩이이고, 화산을 등에 이고 미친 듯 폭주하는 우마 같은 녀석이다.
하지만 도무지 저놈에게 화산의 장문인 자리를 넘길 엄두는 나지 않는다.
장문인은 아니겠지, 장문인은. 백천도 있고 윤종도 있으니까.
하지만 누가 장문인이 되든, 청명이 살아서 화산에 있는 한 화산의 실권자가 누구일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하튼 그리하여 혜연의 소림과 청명의 화산이 양립하는 세상이 온다면?
'화합은 얼어 뒈질.'
기이할 정도로 구파일방에 악감정을 표출하는 청명이다. 지금도 그럴진대 실권자가 된다면 오죽하겠는가?
화합이고 나발이고 당장 전쟁만 벌어지지 않아도 다행이겠지.
그제야 현종은 지금 법정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 멀리 보시는 게 아닙니까?"
"저희가 앉은 자리가 본디 그런 자리이지요."
그 단 한 문장에 소림의 장문인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담겨 있었다.
"소림과 화산이 화합할 수 있다면 강호는 평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강호는 결국 다시 분열되겠지요."
"……."
"장문인. 현재의 상황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구파일방의 관계에는 미묘한 금이 가 있고, 오대세가는 구파와 알력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마교는 발호하고, 저 사파 세력들은 지금 이 순간도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나직하게 불호를 왼 법정은 진중한 눈으로 현종을 응시했다.
"난세란 이런 조짐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난세라니."
현종이 입을 다물었다.
가벼운 논의라고 생각했건만 일이 점점 커지고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그가 감당하기는 어려울 만큼 말이다.
"그러니 생각해 주십시오. 화산만 소림을 도와주신다면 소림 역시 화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화산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저이는 소림의 방장이니까.
강호의 북두라 불리는 소림이 다른 문파를 대놓고 지원한다면 어떤 이들이 감히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실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달콤함을 영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요."
법정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청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시는 거죠?"
"으음?"
"아직 결승도 남아 있는데 말이죠."
법정은 예상한 질문이었다는 듯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결승이 벌어지고 승패가 갈려 버린다면, 같은 말이라도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 소림의 진의를 전하기 위해서라면 지금이어야 했지."
하지만 청명은 피식 웃었다.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음?"
그를 보는 법정의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