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소림이고 나발이고. (4)
당소소가 바람처럼 비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사고!"
그리고 혜연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달려들어 유이설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유이설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잘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조금만 대치가 지속되었다면 아마 의식을 유지하기도 어려웠으리라.
"제가 도와드릴게요."
"……부탁할게."
당소소가 유이설을 부축한 채 몸을 일으켰다. 유이설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기."
그런 유이설의 등 뒤로 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이설이 뒤를 돌아보자 혜연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떻게……."
사실 혜연은 입을 떼면서도 지금 자신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무상대능력을 뚫고 검을 휘두를 수 있었느냐를 묻고 싶은 건지.
아니면 압도적인 차이를 절감하면서도 어떻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를 묻고 싶은 건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멍청한 짓이란 건 알지만, 그는 물어야 했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그와 유이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실력차가 있다.
백 번을 싸운다면 혜연이 백 번 다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그중 대부분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상처야 요행이라 치더라도, 두 번째 상처는 절대 입지 않아야 했을 상처였다.
그런데 저 화산의 유이설이라는 검수는 그의 상식을 파훼하고 그에게 상처를 남긴 것이다.
만약 유이설에게 조금만 더 힘이 더 남아 있었다면, 저 검은 분명 그에게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을 터.
"……어떻게?"
유이설은 말없이 혜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창백한 안색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닿아야 했으니까."
"……."
"그것뿐."
혜연은 그저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다시 비무대를 내려가려던 유이설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겼는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같지 않나요?"
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이설은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없이 당소소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섰다.
비무대 아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이 우르르 그녀를 둘러쌌다.
"사매! 괜찮으냐?"
"사고!"
"발목은! 아까 보니 부상을 입은 것 같던데!"
유이설이 그저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백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부상은 제때 치료해야 한다. 어서 의약당으로 가 보거라. 소소야, 네가 네 사고를 데리고 가라."
"예! 사숙!"
당소소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백천이 살짝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러더니 작게 헛기침을 했다.
"……훌륭했다."
유이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웬만해서는 볼 수 없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그래."
당소소가 유이설을 잘 부축해 의약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여 백상도 그 뒤를 따랐다.
'으음.'
유이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천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기에서 한 번 더 휘두른다.'
과연 그였다면 할 수 있었을까?
글쎄. 확답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애초에 무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의지의 문제다.
전신이 으스러지고 의식이 흐려지는 상황에서도 승리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다들 봤느냐?"
"예, 사숙."
"잘 봤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저마다 느낀 것이 있었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들이 그와 맞붙었다면 싸우기도 전에 의욕을 모조리 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이설은 결국 그 압도적인 실력차를 뚫어 내고 혜연의 몸에 일 검을 그었다.
"결국……."
등 뒤에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 고개를 획 돌아보았다.
"발전이라는 건 그 한 끗을 넘는가 넘지 못하는가에 따라 갈리는 거야."
"……한 끗?"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힘을 다한다는 의외로 누구나 할 수 있어. 더 중요한 건 몸 안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극한의 상황에서 마지막 한 번을 더 휘두를 수 있느냐지."
청명의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걸 할 수 있는 이는 강해진다. 사고는 오늘 비무로 인해 더 강해질 거야."
청명이 모두를 쓱 돌아보았다.
"사숙들은 할 수 있어?"
"……."
청명의 말을 들은 백자 배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말로 할 때는 쉬워 보이지. 의지만으로 되는 일 같으니까. 하지만 평소에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보지 않은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넘지 못해. 사고니까 할 수 있는 거야. 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거든."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제 이 대회는 끝났어."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남은 것은 이 대회에서 사숙들이 그리고 사형들이 무얼 얻었는가겠지. 여기서 얻은 걸 바탕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으면, 내가 끌고 가는 데도 한계가 있어."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더없이 진중해졌다.
그 눈빛들을 보며 청명은 슬쩍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사고가 한 건 해 줬네.'
지금까지 화산의 수련은 청명이 목줄을 잡고 끌어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한 상승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진할 필요가 있다. 이제 육체적인 노력만으로는 더 오를 수 없는 곳까지 올랐으니까.
저 혜연을 상대로 유이설이 휘둘렀던 일 검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줬을 것이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훨씬 재미있었겠지만.'
거기까지 바라서는 안 되겠지.
사실 유이설이 혜연의 무상대능력을 뚫고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힌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청명도 여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포기하지 않는 모습만 보여 줘도 충분했는데.
"어떠냐, 이 땡중 놈들아!"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과연.
법정이 낭패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니 십 년 먹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했다.
법정 역시 청명이 아닌 유이설이 혜연에게 상처를 입히는 상황은 상상조차 못 했을 테니까.
"낄낄낄낄. 머리가 반질반질해졌는걸?"
"청명아."
"으헤헤헤헷!"
"청명아."
"왜?"
"……올라가. 너 다음 비무잖아."
"응?"
아, 그랬지?
청명이 머쓱한 얼굴로 주섬주섬 검을 챙겨 들었다.
유이설의 비무에 집중하느라 아직 그의 비무가 한 번 남아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쯧. 이런 실수를.'
그래도 나름 사강까지 올라온 상대인데 너무 무시했다. 이건 무인으로서 좋은 자세가 아니다.
"그런데 상대가 누구라고 했지?"
"글쎄?"
"모용 뭐였던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머리를 굴리는 다른 화산 제자들을 보며 청명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하나같이 이리 등신 같은지.'
내가 이런 놈들을 믿고, 어? 이런 것들을?
"일단 올라가라!"
"끄으응."
청명이 고개를 내저으며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입맛을 다셨다. 주변이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그렇겠지.
다른 이들은 조금 전의 비무를 화산의 제자들과 다른 결로 받아들였을 테니까.
혜연이 보인 무학이 무상대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챈 이들은 아마 지금 충격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에서도 난해하기 짝이 없어, 소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익힌 이가 몇 되지 않는다는 절기 중의 절기.
그런 절기를 바로 눈앞에서 보았으니 이어지는 비무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절기를 눈앞에서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을 테니까.
청명의 입장에서는 그런 무상대능력을 뚫어 내고 혜연의 몸에 상처를 입힌 유이설에게 조금 더 집중해 주면 좋겠지만, 결국엔 그 무상대능력으로 혜연이 화산의 검수를 꺾어 냈다는 결과만이 남겠지.
'마음에 안 드는데.'
지금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결국 우승은 혜연의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보여 준 칠십이종절예가 벌써 몇 가지던가?
게다가 칠십이종절예 중에서도 상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무상대능력마저 선보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땐 우승을 하지 못하면 이상할 정도다.
"그렇단 말이지?"
청명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모용세가의 모용명입니다."
"응?"
어느새 건너편에 올라온 상대가 살짝 뿔이 난 어투로 소리쳤다.
청명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 죄송, 죄송."
이것도 예의가 아니지.
예의는 진즉에 팔아먹고 남은 게 일절 없다는 평을 받는 청명이지만, 그래도 남들 눈이 있는 곳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를 차릴 줄 알아야 한다.
"화산의 청명이에요."
스르르릉.
청명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가만히 늘어뜨렸다.
동시에 검을 뽑은 모용명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검을 뽑았음에도 여전히 관중들은 이 비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선은 비무대가 아닌 소림이 있는 곳으로 향해 있었다.
"흐음."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그리고 단상 위의 법정을 슬쩍 보았다. 드물게 입매를 굳힌 그의 얼굴에서 미약한 불만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욕심 많은 땡중이네.'
혜연이 세인들의 관심을 완벽히 끌고 온 것이야 그가 바라던 일이겠지만, 그 와중에 상처를 입은 것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더 압도적인 승리를 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뭐, 좋다.
혜연이 중인들의 관심을 받는 건 그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모두가 소림이 우승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
"각오하시오!"
모용명이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쾌속하게 청명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쇄애애액!
사강에 오른 이 중 실력이 떨어지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새하얀 검기를 머금은 모용명의 검이 순간적으로 비무대 위를 가득 채웠다. 유이설이 펼쳤던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기세와 속도 면에선 오히려 더 뛰어난 구석이 있었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고, 새하얀 검기가 청명의 전신을 뒤덮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멀었어."
청명이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검기를 향해 되레 달려들었다.
스으으읏.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한다 싶더니 이내 쏟아지는 검기의 파도를 흘려내며 모용명을 스쳐 지나갔다.
파앙!
짧은 파공음이 일었다.
미약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처럼 작은.
모용명은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턱.
청명이 검을 회수해 검집 안에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모용명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몸에는 단 하나의 상처조차 남지 않았지만, 쓰러지기도 전에 모용명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쓰러진 모용명과 홀로 서 있는 청명.
싸늘한 침묵이 비무대 위를 채웠다.
일 검.
단 일 검이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집중하지 못하던 이들이 뒤늦게 혼비백산하여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일 검이라고?"
"세상에……."
이건 천하비무대회의 사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관중 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청명이 천천히 단상 위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법정을.
늘 평정을 잃지 않던 법정의 눈에 경악이 어리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우승?"
웃기고 자빠졌네.
청명이 씨익 웃었다.
"소림이고 나발이고. 남 기분 내는 거 뒤엎는 게 내 특기거든."
그쪽이 잘 차려 놓은 밥상, 내가 통째로 꿀꺽 삼켜 준다.
그럼 저 얼굴이 대체 어떤 표정으로 뒤덮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는가?
이건 성격이 나쁜 게 아니다.
- 맞는데?
아, 이럴 때만 자꾸 나오지 말라니까, 이 양반아!
청명이 낄낄대며 비무대를 내려갔다.
가라앉은 법정의 시선이 그런 청명의 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천하비무대회.
그 길고 길었던 대회는 소림과 화산의 결승으로 마무리되게 되었다.
수백 년간 강호의 북두로 불려 온 소림.
구파에서 퇴출당하고도 기적같이 부활한 화산.
수많은 것이 얽혀 든 비무대회는 이제 단 한 번의 승부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