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소림이고 나발이고. (3)
혜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날카롭다.'
검이?
아니.
내딛는 걸음, 취한 자세, 그리고 내보이는 눈빛까지! 어느 것 하나 날카롭지 않은 것이 없다.
'검수!'
천하십팔반병기(天下十八般兵器)에 모두 능통한 곳이 소림이지만, 사실 소림의 진정한 무학은 권장지각(拳掌指脚)에서 나온다.
병기보다는 육체를 사용하는 것에 더욱 힘을 쓰는 곳이 소림이란 의미다.
그렇기에 아무리 혜연이라고 한들, 이만한 경지에 접어든 검수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이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가 혜연의 전신을 찔러 들어왔다. 마치 바늘로 피부를 찔러 대는 듯한 느낌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촤아아악!
물 위로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기를 머금은 유이설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졌다.
강호에서는 선인지로(仙人指路)라 거창하게 부르는 초식이지만, 그 실체는 그저 단순한 일자 찌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기본 중의 기본.
하지만 그 기본이 유이설의 손에서 펼쳐지자 천하의 절기나 다를 바 없었다.
쿵!
혜연이 반사적으로 진각을 내밟았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에 붙어 있던 주먹이 탄성을 실은 채 일직선으로 내질러졌다.
그가 사용한 초식 역시 단순한 정권 지르기.
그간 이 주먹을 얼마나 내질렀을까?
수십만 번? 아니면 수백만 번?
글쎄. 셀 수 없겠지.
미련할 만큼 반복하고 또 반복한 권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형(形)이 된다.
천고의 절기라 해도 갈고닦지 않는다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
한 번 한 번을 내지를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온 정권은 스스로 완전해진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단전이 움직이고, 진각을 내딛은 발끝부터 밀려 올라온 회전력이 고스란히 주먹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방출!
화아아악!
혜연의 주먹 끝에서 황금빛 권기가 세찬 물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일직선으로 찌르고 들어가던 유이설은 그 모습을 보고 슬쩍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우로 일 보.
화아아아악!
권기가 유이설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권기를 회피해 낸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혜연의 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본디 권호를 상대하는 검수는 거리를 벌리는 것이 상식.
하지만 유이설은 되레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쇄애애액!
가볍게, 하지만 정확하게 손목을 흔든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은 검병을 지나 검 끝에 이르러서는 혜연의 전신을 노리는 커다란 움직임으로 화했다.
검이 흔들리며 수십 개의 검영을 그려 낸다.
그 날카롭고도 정교한 검의 형상들은 금방이라도 혜연의 몸을 난도질해 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스스슷.
혜연의 몸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그 자리에서 퍽 꺼지는 것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유이설 역시 바닥을 박차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쇄애애액!
이윽고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얼핏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지만 그 순간 유이설이 검을 휘두르는 곳에 혜연의 모습이 나타난다.
마치 적당히 휘저은 그물에 물고기가 절로 뛰어드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천하의 혜연도 이 순간만큼은 당황했는지, 안색을 굳히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녀의 매서운 검을 완전히 피해 내는 건 불가능했다.
서걱.
검이 혜연의 어깨를 스쳤다.
그 순간 그는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오히려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느라 비어 있는 유이설의 배에 어깨를 들이받았다.
쿠웅!
유이설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던 유이설이 허공에서 두어 번 몸을 돌려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주륵.
그녀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혜연 역시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검이 베고 지나간 어깨의 황포 자락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화산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
윤종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세상에.'
따지고 보면 겨우 일 합이라고 해도 좋을 공방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공방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었는가?
무엇보다 윤종을 놀라게 한 것은, 두 사람이 보여 준 정확한 초식과 순간적인 판단력이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만을 선택해 나간다.
쌓아 온 것들에 대한 믿음.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고가 저렇게 강했나?"
조걸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혜연과 싸워 봤기에 알 수 있다. 저 홍안의 무승이 얼마나 강한지 말이다. 그가 눈앞에서 초식을 전개할 때 조걸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았나.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운용과, 수도 없이 갈고닦아 군더더기라고는 일체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까지.
직접 겪은 혜연의 무위는 정말이지 충격적일 정도였다.
그런데 유이설은 그런 혜연과 어우러지고 있다. 압도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밀리지는 않는다.
"사형들이 드러누워 잘 때, 사고는 검을 휘둘렀거든."
"……."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노력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건 아니니까. 다만 사고는 그저 먹고 자는 시간 외에 모든 것을 검에 걸었을 뿐이야."
조걸이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말은 쉽다.
하지만 그걸 진짜 실천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는가?
청명이 그들을 지옥처럼 몰아붙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청명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가 가르칠 때와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이는 이곳에 누구도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걸 해낸 이가 지금 비무대 위에 있었다.
"지켜봐."
청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느끼는 게 있을 테니까."
유이설이 가볍게 복부를 슬쩍 만져 보았다.
내장이 뒤흔들리긴 했지만 내상을 깊게 입지는 않았다.
이 짧은 경합으로 느낀 것은 두 가지.
첫 번째는…….
'강해.'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강하다.
마치 철벽에 검을 휘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떤 공격도 저 사람의 방어를 뚫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깨에 상처를 입힌 것도 실전 경험이 부족한 이의 당황을 이끌어 낸 결과일 뿐, 실력으로 해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같은 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정면으로 맞붙으면 절대 못 이긴다.'
내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유이설의 내력도 어디에 뒤지지 않았다.
물론 화산은 기본 심공을 잃었기에 제자들의 내력을 강하게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혼원단과 자소단을 복용한 유이설은 결코 명문의 제자보다 내력이 달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격한 차이가 난다.
혜연의 일 권, 일 권에 실린 막대한 내력이 몸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았다. 단 한 번의 권격만 허용해도 더는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해야 하는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
단 한 번도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은 채, 상대의 철벽을 뚫고 검을 박아 넣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유이설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언제 강해지나, 언제! 해 봐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거 아냐? 맨날 할 수 있는 것만 하다가 평생 그것만 반복하게? 요즘 것들은 향상심이 없어, 향상심이!
'꼰대.'
하지만 맞는 말이다.
- 강자를 만났다고? 그럼 기뻐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던져도 문제없이 받아 낸다는 뜻이잖아. 그럼 있는 대로 후려 갈겨 버려.
'말하지 않아도.'
유이설의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그럴 생각!'
쩌적!
청석 바닥에 금이 가는 것과 동시에 유이설이 쾌속하게 혜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전광석화처럼 내리친 일 검이 혜연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검기가 있는 대로 뽑혀져 나온 검을 맨손으로 막았는데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예상한 바.
유이설의 검이 혜연의 손바닥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강(强)에서 유(柔)로의 전환.
부드럽게 팔을 타고 흘러내린 검이 혜연의 가슴을 노린다. 하지만 혜연도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퉁!
그의 팔이 반탄력을 뿜어냈다. 팔뚝을 타고 흐르던 검이 반탄진기에 튕겨나가며 유이설의 전방이 뚫렸다.
이어지는 일 권!
투웅!
가볍게 내뻗은 권이 유이설의 왼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단 한 번으로 전신이 모두 뒤틀릴 정도의 충격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하지만 유이설은 선지피를 왈칵 토해 내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콰득!
되레 앞으로 한 걸음 움직인 유이설의 발이 진각을 뻗느라 내디뎌진 혜연의 발목을 짓밟았다. 혜연의 발이 두꺼운 청석을 부수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탓!
그리고 유이설은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붉은 매화를 줄기줄기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한 수!
상대를 묶어 두고 거리를 벌린다.
물론 혜연에게 있어서 바닥에 발이 박힌 정도는 그저 찰나의 지연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그 찰나면 충분했다.
'더 완벽하게.'
이 정도로는 안 된다.
더! 더욱!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단순히 정교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무리 완벽한 매화를 그려 낸다고 해도 거기에 만족하면 종남과 다를 것이 없다.
그 안에 진의(眞意)를 담아 내야 진정으로 화산의 매화가 되는 법!
유이설은 점차 스스로를 잊어 갔다.
'나는…….'
어두운 밤.
그리고 하늘에 뜬 그믐의 달.
그 아래 한 남자가 검을 휘두르고 있다.
더없이 아름답게. 더없이 처절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기던 검이 툭 떨궈진다. 참지 못하고 무너져 흐느끼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새겨진 듯 잊히지 않는다.
'여기.'
여기에 있다.
피워 내지 못했던 매화가. 결코 개화할 수 없었던 매화가.
사내가 평생에 걸쳐 그리려 했던 매화가 지금 유이설의 손에서 펼쳐진다.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매화 잎이 검 끝에서 흘러나온 바람을 타고 소용돌이치며 혜연의 전신을 뒤덮어 갔다.
누가 보더라도 혜연이 이 검을 모두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나, 그 순간.
"아미타불!"
우우우우우우웅!
혜연의 전신이 황금빛의 광채로 뒤덮였다.
반개한 눈.
자연스레 취해진 반장(半掌) 자세.
그 자세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누군가가 발작적으로 외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혜연의 전신이 마침내 완전한 금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사방으로 붉은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웅혼하고 성스럽다.
금방이라도 혜연의 전신을 난자해 버릴 것 같았던 매화는 쏟아지는 황금빛 광채 속에 햇살을 만난 눈처럼 녹아내렸다.
파사(破邪)의 기운을 품은 불광(佛光)은 모든 거짓된 것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에 머물지 않고 유이설의 전신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저 밀려날 터.
하지만 유이설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우드드득.
전신의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를 악문 유이설은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전진했다.
혜연의 눈이 흔들렸다.
'왜?'
이미 승부는 났다.
유이설의 검은 그의 몸에 닿지 못했고, 앞으로도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전진하는가. 아무리 악을 써도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더 낼 수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텐데.
'어리석은!'
혜연이 내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저 밀려나 비무대 밖으로 떨어질 뿐이다. 그런데 왜 굳이 저항해 몸을 상하게 한다는 말인가?
우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내뻗은 유이설의 발목이 뒤틀렸다.
턱!
하지만 유이설은 그 뒤틀린 발목을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다음 발을 다시 앞으로 내디뎠다.
피가 앞섶을 완전히 적시고도 남을 만큼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눈만큼은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째서!'
이윽고 유이설이 검을 치켜든다.
팔이 무거운 검을 들어 올리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내리쳤다.
아니 그건 내려친다기보다는 힘을 잃고 떨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기세도 없고, 내력조차 담겨 있지 않다.
서걱.
하지만 혜연은 그 검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팍이 길게 갈라졌다.
기껏해야 피륙의 상처.
하지만 원래라면 입지 않았어야 할 상처였다.
"……닿았다."
마침내 유이설이 힘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승패는 명확하다.
하지만 유이설의 얼굴은 패한 이의 것이 아니었고, 혜연의 얼굴은 승리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혜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단 말인가?
혜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
화산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청명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할 거다. 이 땡중 놈아."
혜연의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