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소림이고 나발이고. (2)
법계는 아무 말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법정을 바라보았다.
가슴까지 기다랗게 자란 흰 수염이 인상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노승일 뿐이다.
소림을 상징하는 황포를 입지 않는다면 누구도 이 노승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법정의 모습은 평범 그 자체였다.
하지만 때때로 법계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체 이분은 얼마나 많은 것을 머리 안에 품고 계신 것일까?'
소림의 장문.
법정.
혹자는 법정이 소림의 장문인치고 그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고 한다.
천하를 이끌어 온 소림의 방장들은 역대로 강호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드높은 불법과 깊은 심계로 천하를 이끌 만한 거인들만 소림의 방장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역대 방장들에 비한다면 당대의 방장인 법정은 과히 소탈했다. 하여, 소림을 이끌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이 암암리에 돌았다.
하지만 법계만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법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온 그는, 이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야말로 소림을 이끌기에 어떤 부족함도 없는 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소림의 방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역대 그 어떤 방장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
"방장."
가부좌를 틀고 있던 법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가만히 자신의 앞에 앉은 법계를 본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품더니 입을 열었다.
"세간의 반응은 어떠하더냐?"
"아미타불. 방장께서 원하신 대로입니다."
"그렇구나."
법정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오늘도 동쪽에서 해가 떴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담담함을 보고 나니 법계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방장."
그의 목소리에 법정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네 목소리에 화(火)가 깃들어 있구나."
"……송구합니다."
"그래. 물을 것이 있으면 묻거라."
법계가 낮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던 겁니까?"
살짝 떨려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법정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물음이란 우선 상대에게 정확한 뜻을 전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네가 물으려는 것이 무엇이더냐?"
"……방장께서는……."
법계는 슬쩍 시선을 내려 이제 겨우 넷이 남은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이 그림을 처음부터 그리셨던 것이외까?"
그러자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딱히 의미도 없는 것을 궁금해하는구나.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하냐? 중요한 건 일이 이리 흘러 버렸다는 것이겠지."
법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저렇게 하시지만, 법계는 법정이 이 모든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유?
무척 간단하다. 지금이 소림이 그릴 수 있는 최상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를 통해 소림이 노렸던 것이 무엇이던가?
'화합.'
그래. 좋게 말하면 화합이다.
"……세인들은 오해하곤 합니다."
법계가 가만히 눈앞의 방장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화합이라는 것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어찌 오해더냐?"
"중요한 한 가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법계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양보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방장께서는 구파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이해시키려 하신 게 아닙니까?"
법정은 대꾸 없이 나지막하게 불호를 외었다.
"여기까지 와 보니 방장께서 그린 것이 무엇인지 이 우둔한 놈도 알 것 같습니다. 소림을 제외한 구파는 단 한 명의 제자도 사강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공교롭게도 이제는 구파에서 쫓겨난 화산이 아닙니까."
소림을 제외한 구파일방이 사강 중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화산의 약진이다.
만약 이대로 소림이 우승을 해낼 수 있다면, 구파는 구파일방의 북두로서 건재함을 과시한 소림과 어마어마한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화산의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리된다면 구파일방은 소림이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강호의 태산북두임을 다시 증명한 소림이 저들은 인정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명예회복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이 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소림의 뜻대로 흘러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소림이 아니라 방장의 뜻대로 흘러간 것이지.'
법계는 순간 등골에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부드러운 미소 속에 세상을 잡고 뒤흔드는 귀계가 숨어 있다. 하나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법정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이는 소탈하고 평이한 겉모습을 그의 본질이라 믿어 버릴 것이다.
"방장.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오늘 네 안에 혼란이 가득하구나. 무엇이 그리 궁금하더냐?"
"방장께서는 화산이 이리 강할 것이라 처음부터 예상하신 것이외까?"
그 질문에 법정이 빙그레 웃는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럼?"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면 내가 부처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나는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하나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멍청한 놈일 뿐이다."
살짝 내리깔린 법정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나는 그저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바랐을 뿐이다. 소림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으니 좋을 테고, 구파일방은 깊은 오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 알 수 있을 테니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화산은……."
잠깐 정적이 내리깔렸다.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뗐다.
"화산은 길었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겠지. 아미타불."
그러더니 낮게 불호를 읊조리며 법계를 응시했다.
"화(和)란 뜻(意)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화는 오히려 법(法)을 통해 만들어지는 법이지. 불법을 따르는 소림조차도 계율원(戒律院)을 두어 불자의 방종을 벌하는 법이거늘. 불법의 귀의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저 화합을 논하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이 대회가 끝나게 되면 천하의 모든 문파들이 다시금 제 역할을 찾게 될 것이다."
"아미타불."
법계 역시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대체 법정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그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다만……. 다만 한 가지.
"한데 방장."
"음?"
"그 모든 것은 소림이 이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까? 만일……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혜연이 그 아이를 이기지 못했을 시에는……."
"화산신룡 말이더냐?"
"예."
법정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법계는 놀라움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평소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법정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숱한 감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타까움과 기대. 그리고 즐거움과 슬픔.
"화산신룡. 화산신룡……. 그는 정말 인재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지."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 그의 재능을 살리기에 지금의 화산은 부족한 곳이다. 화산은 각고의 노력으로 매화검법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구파일방에 복귀하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매화검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아쉬운 일이지. 더없이 아쉬운 일이야. 그가 소림에 입문했다면 혜연과 더불어 천 년간 이어질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을."
법정의 눈에 단호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그 아이도 받아들여야겠지. 그 아이가 설사 혜연을 뛰어넘는 천재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매화검법으로는 결코 칠십이종절예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건 젓가락으로 장검을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미타불. 그렇다면 방장의 대계가 어그러질 일은 없겠군요."
"그래. 그리될 것이다."
법정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만약 나의 계획이 어그러진다면…….'
그가 계획한 화합은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천하의 축이 소림과 화산으로 양분되게 될 테니까.
지금은 그저 작은 균열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 작은 균열이 천하를 다시없을 혼란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아미타불."
법정이 외는 불호에 힘이 들어갔다.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 * *
"사매."
"네."
대답하는 유이설의 목소리가 가벼웠다.
백천은 가만히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기색은 없는 것 같군.'
그의 사매지만, 유이설은 참 보면 볼수록 특이한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가 상대해야 할 이는 다름 아닌 혜연이다.
백천은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처럼 평온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듯했다.
심지어 청명을 제외한다면 화산의 제자들 중 가장 강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하기야 사매는 언제나 그랬지.'
검수로서 지녀야 할 필수적인 자질이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면, 어쩌면 그녀는 화산에서 가장 검수다운 검수일지도 모른다. 청명이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은?"
"없어요."
"……그런가."
말수가 적은 유이설이지만 이번만은 말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음?"
유이설이 살짝 고개를 돌려 비무대를 바라본다.
"이기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
백천은 잠깐 말없이 유이설을 보았다. 그러다 가만히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
어느새 잊고 있었다.
이 대회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는 걸.
처음 이곳으로 올 때 그들이 원했던 결과는 화산이 돌아왔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들은 충분히 그 결과를 얻어 냈다.
남은 것은?
'배우는 것.'
그리고 더 성장하는 것.
화산의 대사형인 그조차 잠시 잊었던 것을 유이설만은 올곧게 잊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야…….'
백천이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사매."
"네."
"너는 무얼 위해 검을 휘두르느냐?"
별것 아닌 질문이다. 어쩌면 그저 살짝 어색해진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나온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유이설은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매화."
"매화?"
그녀의 투명한 시선이 다시금 백천에게로 향했다.
"그저 피워 내고 싶을 뿐."
"……."
"보여 줄 수 있는 매화를."
백천이 살짝 눈을 감았다.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무거움은 충분히 전해져 온다.
그는 눈을 뜨고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싸움은 그 길을 앞당겨 줄 것이다."
"네."
"그러니 후회 없이 싸우고 오거라."
"네. 사형!"
유이설이 백천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비무대로 향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청명이 보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앞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평소라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발은 청명의 앞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청명이 슬쩍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유이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청명이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유이설은 청명에게서 무언가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청명 역시 그녀의 그런 기분을 알고 있는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
"사고가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이 진짜라면, 검은 대답을 해 줄 거야."
딱히 응원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유이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고!"
당소소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우려의 시선을 무표정하게 본 유이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고 있어."
"……네."
그거면 충분하다.
이윽고 검을 허리에 찬 채 천천히 비무대에 올랐다. 화산 제자들의 신뢰와 걱정이 동시에 담긴 시선을 그 등으로 오롯이 받으면서.
마침내 비무대에 오른 유이설은 먼저 올라와 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혜연.
소림의 정화를 이은 자.
어쩌면 상대조차 되지 않는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상대는 천년소림이라 불리는 강호 제일의 문파에서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천재.
그리고 유이설은 구파에서 쫓겨났던 화산에서조차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던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그 둘이 승부를 겨룬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혜연의 승리를 점칠 것이다.
하나.
스르르릉.
유이설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매화검.
그래, 매화검.
그녀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바로 이 매화검을 든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것에 비한다면…….
유이설이 날카롭게 벼린 듯한 눈빛으로 혜연을 바라본다.
"화산의 유이설이에요."
"소림의 혜연입니다."
대화는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남은 건 그저 증명하는 것.
"후."
짧게 숨을 내쉰 유이설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 고동이 잦아들고 근육의 떨림이 가라앉는다.
동시에.
검 그 자체가 된 유이설이 물 위를 박차는 제비처럼 혜연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