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소림이고 나발이고. (1)
"걸이는?"
"아직 의식은 차리지 못했지만, 딱히 부상을 입은 건 아닙니다."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 어마어마한 권력에 휘말렸는데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살의(殺意)가 없었으니까요."
잠깐 침묵하던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산이 기거하는 전각 안. 언제나 떠들썩했던 이곳이 지금은 조용한 침묵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두 충격이었겠지.'
굳어 있는 사제들의 얼굴을 보니 절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혜연의 무위에 충격을 받은 건 백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지?'
물론 혜연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 청명이 천재 중의 천재라 인정한 무인. 그러니 누구보다 강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로 백천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초식의 정확도였다.
혜연이 일격에 전각을 날려 버린 건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진짜 놀라운 것은, 몇 초식 되지도 않는 찰나의 경합으로 조걸을 완전하게 제압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뒤에 이어진 백보신권은 마무리를 지은 것일 뿐, 이미 그 전에 비무는 끝나 있었다.
'내가 걸이를 상처 없이 제압하려면 최소 백 초는 필요했겠지.'
하지만 혜연은 단 삼 초 만에 조걸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대체 얼마나 강해야 그런 일이 가능한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백천마저 인상을 굳히자 슬쩍 눈치를 보던 백상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이 좋은 날에! 청명이도 유 사매도 사강에 진출했잖아! 사강에 둘을 올린 건 어떤 명문도 해내지 못한 쾌거라고!"
"그렇죠."
"네. 정말 좋은 성과기는 한데……."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들은 그리 밝지 못했다. 우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백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막 한마디 더 하려던 찰나.
쾅!
난데없는 소음에 백상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저리 강렬하게 문을 열고……. 아니, 차고 들어오는 이는 화산에 단 한 놈밖에 없다.
"청명아!"
백상은 귀인이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그에게로 얼른 다가갔다.
"얘들 좀 어떻게 해 봐라."
"응?"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아니……."
백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비무가 충격이었는지 영 분위기가 어두침침하고 우울하다."
그 말에 청명이 슬쩍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청명의 눈길을 받으며 표정을 풀려고 애썼지만, 그 기저에 깔린 불안감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흐으으음."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도 이제 병아리들은 좀 벗어난 것 같네."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백상이 놀라 반문했다. 숨죽이며 청명의 힐책을 기다리던 이들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뭘 잘못 처먹었나?'
'아니. 항상 잘못 처먹기는 하지. 도사가 고기만 먹고 사는데.'
'저러다가 갑자기 또 대가리 깬다고 달려드는 거 아냐?'
청명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천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을 받은 백천이 움찔했다.
'왜?'
'뭐라고 말 좀 해 보십쇼.'
'내가 왜?'
'대사형 아닙니까?'
백천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럴 때만 사형이지, 이럴 때만! 이 새끼들!
"크흐흠."
하지만 결국 나직하게 헛기침을 한 백천은 넌지시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화 안 내냐?"
"응? 내가 왜?"
"아니……. 또 기죽어 있다고 한마디 할까 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기가 죽어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걸 보고도 기가 살아 있는 것보다는 낫지."
"……응?"
혜연의 무위를 보고 기가 죽었다는 건, 그와 자신을 비교했다는 뜻이다.
당연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 절대 당연하지 않다.
과거 화산의 제자들은 혜연은커녕 진금룡과도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다. 아니, 비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왜?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교하지 않으면 절망할 일도 없다. 그리고 그 편이 더 마음이 편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지금, 화산의 모두가 혜연과 자신을 비교하며 절망하고 있다.
'발전이라는 건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실감하는 데서 시작하는 법이지.'
압도적인 차이에 절망하는 한이 있어도, 결국은 실감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 편이 압도적인 차이를 실감조차 하지 못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
"모두 주목해 봐."
청명이 바닥을 탕탕 소리 내어 밟았다.
이미 주목하고 있던 이들이 목을 아예 쭉 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아니, 저 새끼는 지가 주목하라고 해 놓고 거꾸로 물어보네?
백천이 고개를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그 소림의 혜연이라는 놈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
"으으으음."
청명이 볼을 긁적거렸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청명이 살짝 망설이는 듯하자 백천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지금껏 나름 강하다는 놈들을 많이 봐 왔지만, 이렇게까지 암담한 느낌이 드는 놈은 처음이었다. 뭘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지만……."
"아. 잠깐, 잠깐."
백천의 말을 끊은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설마 지금 그놈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타고났으니 우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길 수가 없겠구나, 뭐 이따위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
순간 찔끔한 화산의 제자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의 눈을 피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사숙이라고."
끄응 신음을 흘린 청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천재고 나발이고 세상에 못 이길 놈이 어디 있냐?"
"너."
"……나는 예외고."
못 이길 놈을 발견한 청명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여하튼! 그 땡중 놈이 대단한 건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야."
그리고 고개를 획 돌려 윤종을 보았다.
"사형!"
"응?"
"그 땡중 놈이 센 이유가 뭐야?"
"그야……."
윤종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내공."
"그리고?"
"완벽한……. 어, 그래. 완벽한 초식의 운용."
"그거지."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이고 나발이고 그놈이 센 이유는 수도 없이 초식을 갈고닦아 왔기 때문이야. 아마 그놈은 그동안 사형들이 해 온 수련 같은 걸 적어도 십여 년 이상은 반복했을 거야."
"……뭐를?"
"사형들이 한 수련."
"……너랑 한 거?"
"응."
사위가 정적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난 반년 간 해 온 수련을 십 년이 넘도록 해 왔다는 건가?
"……이게 더 절망적인데?"
"진짜 부처인가? 사람이면 그럴 수가 없는데?"
"미친놈 아냐?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오한이 든다.
지난 반년 간 그들은 청명의 무자비하다 못해 가혹하기까지 한 수련을 버텨 냈다.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그 덕분에 천하의 명문들이 즐비한 이 비무대회에서도 확실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미친 짓을 스스로 십 년 이상 해 왔다고?
"……그럼 세야지."
"그 정도면 원숭이도 호랑이 때려잡아야지."
다들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한 수련의 반만이라도 십 년간 해 왔다면, 약한 게 이상하다. 강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의미다.
"착각하지 마."
청명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사람들은 재능이라는 걸 이해력이라는 측면으로 한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 한 번 보고 초식을 익혀 낸다거나, 단숨에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뛰어난 두뇌가 천재의 상징이라고 말이야."
"……."
"하지만 그건 반쪽짜리도 못 돼. 진짜 천재는 남들은 절대 버티지 못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것들이야."
청명이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니 엄살 부리지 마, 얼간이들아. 다른 이가 십 년을 넘게 해 온 걸 불과 반년 만에 따라잡겠다고? 이 중에서 그 혜연을 넘어서기 위해서 십 년의 수련을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어?"
그의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건해졌다.
청명의 말대로 이 중 혜연을 따라잡기 위해 수십 년의 고련을 생각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를 둘러보는 그의 눈에, 답지 않은 차가운 냉기가 어렸다.
"언제부터 화산이 이리 대단하신 문파였지? 명문의 후예니 뭐니 하는 놈들을 때려잡다 보니 본인들이 대단한 분이 되어 버리셨나?"
"……."
그의 냉혹한 일갈이 화산 제자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이들, 그리고 스스로의 오만을 반성하는 이들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화산 제자들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놈이 대단한 이유는 다른 게 아냐. 항상 정진한다는 거야. 다시 말해서."
모두가 청명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진해라. 초심을 잃지 마라. 하루하루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라. 무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마라. 최선을 다해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더없이 뻔한 소리였다.
"윗분들이 항상 말하는 그 뻔한 소리를 정말 해내는 놈은, 그걸 십 년 이상, 이십 년 이상 해 버리는 놈은 저렇게 된다는 뜻이야. 말 그대로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놈이지."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혜연의 어마어마한 내력도, 그 내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칠십이종절예도 아니었다.
뻗어 내는 주먹 하나.
내딛는 진각 하나에 무언가 '다름'이 존재한다.
그 차이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자 혜연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소림에는 천하의 다른 무학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무학이 있고, 수많은 명문들의 절기보다 더 많은 비급이 존재한다. 무학이 넘쳐 나고 절기가 썩어 날 만큼 많아. 그런 소림에서 첫 일 년 동안 하는 일이 뭔지 알아?"
"……글쎄?"
"마보(馬步)."
"……."
"처음 소림에 입문한 이들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오로지 마보를 한다. 그걸 버텨 내면 추를 올려서 다시 마보를 하고, 그걸 버텨 내면 무게를 더 늘리지."
마보라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후에 일 년은 다시 정권 지르기 하나만을 연습한다. 완벽한 자세가 나오고 완벽한 기세를 만들어 낼 때까지.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사람들은 소림의 화려한 절기와 그 강함에 주목하지. 하지만 소림은 그런 것에 눈을 빼앗기지 않아. 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굳건한 기초를 좇는다. 혜연은 그런 소림의 철학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일 뿐이야."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함만을 좇을 게 아니라 어떻게 강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뜻이구나."
"그래도 사숙은 좀 알아먹네."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혜연이 강한 것 자체에 절망하지 마. 그건 차라리 희망이야. 지금 사형들이 가는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바로 그놈이 증명해 주고 있잖아. 되레 기뻐해야지!"
화산 제자들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청명의 말이 맞다.
'정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수준에 닿을 수 있다는 뜻이구나.'
그 날이 오면 그들의 매화는 얼마나 더 아름답게 피어날 것인가?
윤종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런데, 청명아."
"응?"
"너는 어때? 네 말대로라면 너도 그 혜연만큼의 수련은 하지 못했잖아. 그럼 너도 혜연을 감당 못 하는 거냐?"
"뭔 개소리야."
"……응?"
청명이 배를 쭉 내밀었다.
"지가 날고 뛰어 봐야 땡중이지. 어디 머리털도 없는 게 나를 이겨 먹으려 들어. 대가리를 확 마!"
"……."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인간이 안 된다.
모두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청명이 돌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소림 저 새끼들이 지금 각본 쓰는 모양인데,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해. 그거 통째로 내가 꿀꺽 삼켜 줄 테니까."
"……."
모두 청명이 어떤 인간인지를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럼 네가 결승에서 혜연을 이길 거냐?"
"흐음, 글쎄."
청명이 고개를 살짝 꺾어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 새끼가 사고를 이기고 왔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
모두의 시선이 유이설에게로 향했다.
부담스러울 만한 상황이었지만, 유이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모두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사매가 놈을 이길 수 있다는 뜻이냐?"
"그건 모르지."
"……그럼?"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청명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아마 그놈도 당황하게 될 거야.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은 이는 처음 만나는 걸 테니까."
"……."
"일단은 저 잘난 소림 놈들의 콧대를 한번 꺾어 놓고 시작하자고."
청명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주 제멋대로 가지고 노시겠다?'
예전에도 그러다가 개처럼 얻어맞아 놓고. 백 년이 지나도록 배운 것도, 달라진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너희 선조들이 너희에게 제대로 교훈을 남겨 주지 못했다면, 내가 다시 제대로 알려 주지.'
세상일이 너희의 반짝이는 머릿속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청명의 입에 기괴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화산의 제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불안하다.'
'저 새끼 저거, 뭘 꾸미는 것 같은데.'
소림의 앞날에 정체 모를 커다란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단 걸 느끼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