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그 거지 새끼 지금 어디에 있어? (4)
죄를 지은 인간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건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치에 가깝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이치가 고대로부터 이 순간까지 언제나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던 이유는, 적절한 벌의 수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합의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종팔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좀……."
살짝 불만을 표하려는 그 순간 바로 칼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말을 해?"
"눈을 떠?"
"숨을 쉬어?"
"……."
종팔이 찔끔하며 냉큼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속으로 못다 한 말을 중얼거렸다.
'지은 죄에 비해서 벌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지만 어떠한 항변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이유? 너무도 간단하다. 지금 그의 주변에는 산길을 호령하던 녹림도들이 팔뚝만 보고서도 형님! 하며 모실 인간들이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체구.
그리고 광활한 어깨와 험상궂은 얼굴까지.
이들이 과연 명문검파의 후예들인지, 녹림에서 갓 내려온 산적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소림에서 대회를 지켜보던 이들에게는 이제 나름 익숙해진 모습이지만, 어제 막 소림에 도착한 종팔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양반들이 산에서 도는 안 닦고, 영업만 하다 왔나?'
이쯤 되면 외모 하나만으로 천하에 퍼져 있는 일흔두 곳의 녹림산채에서 영입 전쟁이 벌어질 판이다.
게다가…….
"눈 돌아가지? 확 먹물을 쪽 뽑아 버릴라."
"너는 여기가 소림인 걸 하늘에 감사해야 해. 화산이었으면 네가 아직 살아 있을 것 같냐? 매화나무 밑에 파묻혀서 염불 외고 있겠지."
"생각할수록 열받네. 콱 낙안봉 꼭대기에서 굴려 버릴라!"
인성도 녹림에 더없이 걸맞다.
종팔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가.'
홍대광은 소림으로 올라오자마자 종팔을 이 짐승 같은 화산 놈들 한가운데에 던져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 버렸다.
어떻게 이토록 무책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개방의 칠결개쯤 되는 이라면 자문의 제자를 보호해 줘야 할 것 아닌가?
뭐?
거지는 원래 무책임하다고?
어…… 그건 그런데…….
종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책임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거지가 되지 않았겠지.'
거지가 되었다고 해도 금세 다른 살길을 찾았겠지.
바로 저 초삼이 놈처럼 말이다.
비무대를 몰래 보는 종팔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초삼……. 아니, 청명이 놈이 비무 상대를 말 그대로 개 잡듯이 잡고 있었다.
"이 새끼가 도망을 가?"
"히, 히이이익!"
상대가 기겁하며 달아나다시피 몸을 물리고 이리저리 피했지만 청명은 눈을 희번덕대며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한 놈은 도망가고 한 놈은 눈에 불을 켜고 쫓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종팔의 얼굴에 허탈함이 스쳤다.
'이게 뭔 경극도 아니고.'
여기는 천하비무대회가 벌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천하비무대회의 팔강전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비무대회에 살아남은 이들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덞 명의 후기지수라는 뜻이다. 그러니 하나하나가 막강하기 짝이 없어야 하는데.
"어디 먹물 놈이 비무대회에 올라와서 부채 펼치고 있어! 부채를 콧구멍에 처박아 버릴라!"
"이, 이건 전통……."
"옛날부터 그 전통이 마음에 안 들었어! 뭐? 선법(扇法)? 선버어어업? 어디 이것들이 건방지게 부채질로 싸움을 하려고 해!"
제갈세가 특유의 하얀 깃으로 만든 부채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종팔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무식한 놈.'
제갈세가의 선법(扇法)은 천하일절(天下一絶)로 알려져 있건만, 저 괴물 같은 놈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선법과 함께 제갈세가를 천하오대세가의 반석에 올린 환영팔괘보(幻影八卦步)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펼쳐지고 있지만, 저 찰거머리 같은 놈을 떼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체 지난 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종팔이 기억하는 초삼은 딱히 모난 곳 없이 평범한 거지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사람이 삼 년 사이에 저리 변해 버린단 말인가?
'어디서 이무기 내단이라도 주워 먹었나?'
그렇다면 그건 분명 악룡(惡龍)이 될 이무기였을 것이다. 사람의 성격이 저토록 악독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대가리! 대가리!"
"아아아악!"
청명의 검집이 무식하게 제갈송(諸葛松)의 머리를 후려 깐다.
제갈송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갈세가 머리가 그렇게 좋다는데! 어디 그 좋은 머리 한번 까 보자! 팔 내려, 인마! 막으려다 팔 부러진다!"
"아악! 소협, 소협! 팔! 내 팔!"
"어쭈? 이게 또 막아?"
종팔은 더 이상 그 참담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돌렸다.
'강호가 거꾸로 돌아가는 거지.'
제갈세가는 선법과 보법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들이 천하에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무엇보다 뛰어난 지력(智力)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지력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제갈세가의 대가리(?)가 화산의 폭력 앞에 무너지고 있었다.
이건 정말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도 이제는 감탄을 넘어 황당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게 진짜 이래도 되나?"
"그래도 명색이 비무대회인데……."
비무라는 건 서로의 무를 견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적인 의미의 비무대회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남은 것은 오로지 화산신룡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가 지켜보는 것뿐.
그리고 눈앞의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오직 화산파의 제자들밖에 없었다.
"빨리 기권이나 하지."
"자존심 문제지, 자존심. 둘 중 하나를 택일하는 거야. 대가리가 깨지거나 자존심이 깨지거나."
"그럼 후자가 낫잖아?"
"제갈세가가 머리가 좋다는 말도 다 헛소문인가 보네. 저놈이랑 맞붙을 생각을 하다니."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혀를 차며 한마디씩 보탰다.
남들은 화산을 과격하다 하지만, 화산은 단 한 번도 과격해 본 적이 없는 문파였다. 그들의 과격함은 오로지 저 미친 망둥이 놈에게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발악해 온 결과일 뿐이다.
강호의 지낭(智囊)을 자처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상황 파악 능력은 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저 제갈가 놈은 조상의 슬기를 이어받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
뭐 간단하지.
쿵!
제갈송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바닥에 철퍽 엎어진 그의 머리에선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문사(文士)라서 내가 살살 한 줄 알아."
청명이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던 백익선(白羽扇)을 받아 들고는 살랑살랑 부치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모습을 화산의 제자들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팔강쯤 되면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무리지. 무리야. 후기지수들에게 저놈은 너무 버겁지."
청명은 비무대회에서도 화산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압도적인 강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희망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희망은 청명이 놈이 끌고 가는 대로 잘 따라가기만 한다면 구파고 나발이고 다 엎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슬픔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앞으로 살아 숨 쉬는 동안 저 망할 놈을 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당장 명문의 제자들도 빗자루에 쓸려 나가는 낙엽 꼴로 박살이 나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청명을 이기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젖은 낙엽처럼 어떻게든 바닥에 납작 달라붙는 것뿐이다.
"그럼 일단 사강에 한 명은 오른 건가?"
"그리고 두 명째가 문제인데……."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보았다.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봅니까?"
"아니, 뭐 딱히……."
"괜찮아. 괜찮아. 여기까지만 해도 잘한 거지."
모두의 시선 속에 조걸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제가 이길 수도 있잖아요."
"하하하. 그럼그럼."
"뭐 일단은 사매가 누구랑 붙는지 한번 볼까?"
숫제 그의 승리는 제쳐 두고 생각하는 듯한 말에, 조걸은 살짝 발끈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윤종이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걸아."
"예?"
"말로는 아무리 해 봐야 의미가 없다. 네가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비무대 위에서 너를 증명하거라!"
그 말에 조걸의 눈이 불타올랐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형!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의욕으로 가득 찬 조걸이 허리춤의 검을 움켜잡고 비무대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비어 버린 의자를 향해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와 앉았다.
"고생했다."
"뭐 이런 것 가지고. 그런데 다음 비무가 조걸 사형이야?"
"그래."
"상대가 누군데?"
"어……."
윤종이 어깨를 으쓱하며 빙그레 웃더니 답했다.
"소림의 혜연."
"아. 밥이나 먹으러 갈까?"
"……."
그리고 그 즉시 청명은 조걸에게서 관심을 끊어 버렸다.
그 칼 같은 반응에, 백천이 슬그머니 청명에게 물었다.
"그런데, 청명아."
"응?"
"차이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냐?"
"응?"
백천이 슬쩍 비무대를 바라보며 말한다.
"물론 조걸이가 엄청나게 센 건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진금룡이나 남궁도위와 붙어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다. 어쨌거나 제 능력으로 팔강까지 오른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화산오검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천하의 많은 이들이 조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아. 조걸 사형? 아, 음……. 세지. 어, 세고말고."
청명의 목소리에 미묘한 심드렁함이 묻어난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냐."
"……그럼?"
"강함이라는 건 상대적인 거잖아."
청명이 턱짓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차분히 비무대로 올라오는 혜연이 있었다.
"저거한텐 안 돼."
"……."
"보면 알겠지."
청명의 눈이 혜연에게 똑바로 고정되었다.
"후우."
비무대에 선 조걸이 심호흡하며 양손을 모았다.
"화산의 조걸이오!"
그러자 황포를 입은 중이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림의 혜연입니다."
나긋나긋하고 작은 목소리.
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조걸은 그런 혜연을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는 정말 강해 보이지 않는군.'
물론 그렇다고 상대를 경시하거나 방심할 생각은 없다. 겉보기에 강해 보이지 않는 것은 청명도 마찬가지니까.
오히려 강호에서는 이런 놈들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아 버린 조걸이었다.
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느낌이 확연히 달라.'
혜연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 온 무인들과는 뭔가 달랐다.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이질적이다.
소림에 와서 소림승들을 꽤 많이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혜연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들은 없었다.
차분하다기보다는 정말로 숫기가 없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지금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게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슬쩍슬쩍 얼굴을 붉히고 있지 않은가?
"……시작해도 되겠소?"
"예? 아…… 예. 아, 아…… 아미타불. 그, 그, 그러십시오!"
"……."
조걸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청명이 놈이 인정한 강자니까 분명 말도 안 되게 강할 터인데.'
청명이 인정한 인재가 이놈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 혜연을 두고 말할 때는 분명 그 어투가 달랐다.
그렇다는 건 이놈이 지금 이 비무대회에서 청명을 제외한다면 최고로 강한 자란 뜻이다. 그런데 저렇게 패기는커녕 숫기 하나 없는 모습이라니.
조걸은 살짝 심호흡하며 검을 뽑아 앞으로 겨누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나와는 관계없다.'
스스로의 검을 완벽히 다룰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승리할 수 있다.
"그럼 간다! 타아아아앗!"
조걸이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상대는 강하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바짝 얼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상대의 실책을 놓치지 않는 것도 검수의 소양!
상대가 이 상황에 익숙해지기 전에 먼저 승기를 잡는다……!
한편 조걸이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자 혜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반사적으로 황급히 우수를 뻗어 냈다.
'그런 어설픈 일권으로……. 응?'
우우우웅!
혜연의 육체가 황금빛의 서기로 물든다 싶더니 이내 수천 마리의 벌떼가 동시에 날갯짓하는 것 같은 진동음이 비무대를 가득 채웠다.
이윽고 사람 몸뚱어리만 한 황금빛의 권기(拳氣)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둑에 구멍이 뚫려서 터져 나온 물처럼, 과격한 기세를 담은 황금빛의 기가 비무대를 넘었다. 그리고 관중들의 머리를 지나 먼 소림의 전각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그 광경을 본 중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 저거……."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전각이 무너지고 있다.
아니, 저건 무너진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부적절하다.
권이 품은 와류(渦流)가 전각을 말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전각이 갈기갈기 찢기며 중앙으로 모여들더니 이내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우르르르르르릉!
전각이 말 그대로 순식간에 폭삭 내려앉았다.
단 일 권.
단 일 권만으로.
"……."
입을 반쯤 헤 벌린 채 그 광경을 보던 조걸이 움찔움찔 몸을 떨기 시작했다.
딸꾹!
'저걸…… 맞았으면?'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렀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연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제, 제가 너무 당황해서……."
아. 당황해서 사람을 가루로 만들 뻔하셨군요.
거…….
거, 진짜…….
조걸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살려 줘!'
눈앞에 괴물이 하나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