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그 거지 새끼 지금 어디에 있어? (3)
쪼로로록.
잔에 술이 따라졌다.
"자자. 시원하게 한잔하고!"
홍대광이 한껏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청명의 잔을 채운 뒤 술병을 내려놓았다.
청명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술을 쭉 들이켰다.
"그렇지. 술도 호탕하게 먹는구나! 하하하하!"
홍대광은 신나게 웃으면서도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구석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저 거지 새끼를 거꾸로 매달았어야 하는 건데.'
홍대광은 화산과 화산신룡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화산이 훗날 천하를 호령하는 문파가 되리라 굳게 믿어 낙양분타를 버리고 화음으로 가는 도박까지 벌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저 망할 거지 놈 하나 때문에 그 모든 계획이 다 박살이 날 뻔했다.
홍대광이 도끼눈을 뜨자 구석에 무릎 꿇고 있던 종팔이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대광은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저 미친놈이.'
깔 사람이 따로 있지, 화산신룡을 까?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거의 확실시된 게 화산신룡 청명이다.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기겁할 노릇인데, 청명이 몸담은 화산 전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거지 놈 하나 때문에 훗날의 천하제일문이 될 화산과 원한관계를 맺을 뻔했다.
그래도 홍대광이니 이 정도 선에서 처리한 것이다. 만약 이 말이 방주의 귀에 들어갔다면 종팔은 그날로 사지가 결박되어 화산에 공물로 바쳐졌을 것이다.
"하하하. 화산신룡. 멋모르는 어린 거지가 저지른 일 아닌가? 그러니 자네가……."
"저는 더 어렸었는데요?"
"에라, 빌어먹을!"
홍대광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종팔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종팔이 움찔하며 날아드는 잔을 피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쪽박 깨 먹지 않는다고 방 차원에서 그리 누누이 말했거늘! 저, 저!"
거의 눈을 까뒤집는 홍대광의 분노에 종팔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동냥질 안 하고 게으름 피우는 새끼 거지를 구박하는 건 어디서나 하는 일 아니던가? 물론 그날 좀 심하게 패기는…….
'아니.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초삼이라는 이름도 기억나고 과거의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어떤 놈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의 움막에만 비슷한 나이의 거지가 다섯이 넘었는데 어떻게 그걸 일일이 기억하겠는가?
그런데 하필 그놈이 종팔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고, 하필 그놈이 화산신룡이 되다니.
재수가 없어도 정도가 있다. 정도가.
하지만 아무리 억울해도 도무지 항변을 할 수가 없다.
칠결개이자 개방주 후보 중 하나인 홍대광이 마치 담을 타넘는 거지를 보는 사나운 개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으니까.
그를 보며 이를 으득으득 갈아붙이던 홍대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하. 화산신룡. 군자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법 아닌가?"
"전 도산데요?"
"……도사도."
"심지어 맞았을 땐 거지였고."
"……."
아, 거 신분 참 변화무쌍하시네.
홍대광의 눈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 식구였지 않은가?"
"네?"
"예전에 개방의 움막에 있었다면 개방의 소속이었다는 뜻이고, 그럼 한 식구라고 할 수 있지."
그러자 청명이 뚱한 눈으로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물론 홍대광도 이 논리가 억지라는 걸 알고 있기에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흠, 흠. 여하튼 이미 지난 일이고 저놈도 오늘 반성을 많이 했을 테니, 시원하게 마시고 풀어 버리세."
"흐으으음."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종팔을 흘끔 바라보았다.
"승질 같아서는 진짜 콱 그냥."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종팔이 움찔 몸을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가 그 움막 나오면서 나중에 거지 새끼들 싹 다 조져 버릴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이번에는 홍대광이 움찔했다.
이놈이 얼마나 강하고 집요하고 패악질에 능하며 잔악무도한지 아는 홍대광이다 보니 그 말이 너무나 진담처럼 들린 탓이었다.
청명이 고개를 슬쩍 돌려 돌처럼 굳어 있는 구칠을 바라보았다.
"얘 때문에 봐주는 줄 아세요."
"으응?"
"그래도 얘가 저를 도와줬거든요. 덕분에 화산까지 올 수 있었죠."
뜻밖의 희소식에 홍대광이 반색을 하며 구칠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구, 구, 구칠입니다."
"그래. 구칠! 그래! 네가 정말 큰 공을 세웠구나!"
그리고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구칠은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애초에 홍대광은 그가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평생 말 한 번 섞어 볼 일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존재였다.
그의 왕초인 종팔도 홍대광 앞에서는 바닥에 붙은 엽전처럼 납작 엎드려야 하는데 이결개인 그야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홍대광과 천하제일후기지수라 불리는 초삼……. 아, 아니 청명. 그리고 요즘 천하를 위진시키고 있는 화산오검까지 동석이라니. 심지어 칭찬을 듣다니.
'심장이 멎을 것 같아.'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구칠은 지금 자신이 입으로 말하는지 코로 말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홍대광이 그런 구칠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네 공은 내가 잊지 않으마. 네가 개방을 구했다! 네가!"
반쯤은 진심이었다.
세상 모든 이들과 원한을 맺어도 웃어넘길 홍대광이지만, 단 한 사람. 청명과는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청명이 구칠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밥 먹어, 밥."
"응?"
"배고프잖아. 밥 먹어."
구칠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몰려왔던 개방의 고수들은 이미 이 일이 자신들의 손을 떠났음을 알아 버렸는지 삼삼오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일행들도 구석 자리에 앉아 열심히 밥을 퍼먹는 중이었다. 얼마나 빠른지 손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거지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음식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구칠은 그럴 수 없었다.
"……체할 것 같은데."
"왜?"
"아니……."
구칠은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얘가 정말 내가 알던 그 초삼이가 맞나?'
움막을 뛰쳐나가기 전부터 살짝 맛이 갔다 싶었는데, 더 맛이 가서 나타났다.
그때 청명이 술병을 잡고는 구칠의 잔에 친히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너."
"응?"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선선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으로 올 생각 없어?"
"으, 으응?"
구칠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화산에 놀러 오라고?"
"아니. 개방 나와서 화산에 입문할 생각 없냐고."
"……."
청명의 대답에 구칠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얘 진짜로 미쳤나?'
그런 말을 어떻게 홍대광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가?
문파를 옮긴다는 건, 잘못하면 큰 사달이 벌어질 수도 있는 중대사가 아닌가?
구칠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홍대광의 눈치를 살피자 청명이 다시 웃었다.
"눈치 볼 것 없어. 이결개 하나 넘어간다고 개방에서 문제 삼을 일은 없으니까. 그죠?"
"응? 그럼, 그럼. 오히려 사이가 더 돈독해질 수도 있지. 하하하하."
홍대광이 호방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생각을 해 봤는데, 네가 개방에 있으면 내가 도와줄 방법이 많이 없더라. 그러니까 생각 있으면 화산으로 와. 그럼 내가 확실하게 고수로 키워 줄 테니까."
고수라는 말이 구칠의 귀를 파고든다.
이 얼마나 솔깃한 제안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 순간 보았다.
청명의 좌우에 앉은 화산의 제자들이 그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내는 걸 말이다.
'오지 마! 오지 마, 이 새끼야!'
'여긴 지옥이야!'
'거지가 낫다. 거지가 백배는 나아!'
'대가리는 튼튼해?'
그 간절한 눈빛을 받고서야 구칠은 조금 전에 들었던 백천의 말을 떠올렸다.
- 이 개 같은 새끼야! 너 때문에! 어? 너 하나 때문에 지금 화산에 희생자가!
"……."
정확하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산이 그리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구칠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나는 개방에 남으려고."
"왜?"
청명이 이해할 수 없단 듯 고개를 갸웃했다.
"거지로 사는 게 좋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구칠이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고, 고수가 되는 것도 좋지만…… 나는 개방도로서 자부심……. 그래,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 나는 개방에서 협의(俠義)를 지키며 살고 싶어."
곁에서 듣고 있던 홍대광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 화산신룡, 안타깝게도 네 친구는 화산보다 개방이 좋은 모양이구나."
"거 이해가 안 가네. 거지가 뭐가 좋지?"
청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함을 표하자 옆에서 사형제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나는 이해 가는데?"
"저도요."
"거지가 낫지."
청명의 뚱한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삽시간에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이렇게 하자꾸나!"
보다 못한 홍대광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화산신룡은 구칠에게 마음이 빚이 있다 이거지?"
"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데, 거리가 멀고 개방 소속이라 그게 잘 안 된다. 그러니 화산으로 데려가고 싶다?"
"그렇죠."
"그럼 별 문제될 게 없다. 내가 이 녀석을 화음분타로 데리고 가마."
홍대광이 껄껄 웃어젖혔다.
"그럼 네가 언제든 이 녀석을 봐줄 수 있으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 굳이 화산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흐으으음."
"네가 원하면 내가 이 녀석을 내 제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
가만 듣던 청명이 스읍,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고갯짓에서
'대체 네 제자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라는 뜻을 읽은 홍대광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 그럼 네가 이 녀석을 화산으로 부르기도 편해지지 않겠느냐?"
"아, 그건 그러네요."
이 새끼, 진짜 그렇게 생각했구나?
조금만 수습이 늦었다면 거지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뻔했다.
홍대광은 재빨리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하하하하.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홍대광이 다시금 구칠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한편 구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옛 친구를 만났다 싶었는데, 갑자기 왕초가 얻어맞고, 이제는 화음분타에 가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무한의 이결개였던 그에게, 이건 정말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저, 정말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다. 네가 세운 공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가, 감사……."
그때 청명이 눈을 찌푸린다.
"뭔 말씀이세요? 이게 상이 될 수는 없죠. 공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상은 따로 주셔야지."
"……그, 그러네."
"입 닦으려고 하지 말고, 애 고기라도 제대로 먹여 주세요."
"내가 이놈 입에서 평생 고기는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가 나오게 해 줄 테니 걱정 말거라."
홍대광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녀석 덕분에 그나마 상황이 좋게 풀렸다.'
개방은 지금 화산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보를 다루는 이들은 판도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정보란 애초에 판도를 누구보다 빠르게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까.
그들이 입수한 정보를 분석하면 화산의 약진은 절대 단순한 돌풍에서 끝나지 않는다.
문파원 몇몇만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거라면 돌풍이겠지만, 화산의 제자들이 모조리 강해진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변화였다.
'화산은 반드시 강호를 뒤흔드는 문파가 된다.'
그런 이들과는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화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화산신룡이 구칠을 아끼는 것 같으니 둘을 붙여 놓을 수 있다면 개방에도 큰 이득이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소 몇 마리 잡는 것쯤이야 일이겠는가?
그런데 청명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응?"
"쟤도 데리고 와 주세요."
"……쟤?"
"쟤."
청명이 턱짓으로 가리킨 건 종팔이었다.
일이 잘 마무리된 듯하여 살짝 안심하던 종팔이 다시 후다닥 움츠러들었다.
홍대광이 물었다.
"……쟤는 왜?"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저렇게 패 놓고 또 패겠어요?"
어.
너는 그럴 것 같아.
불신의 시선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냥 자주 보려는 거죠. 딱 보니 직위도 좀 되는 것 같고, 앞으로는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 처리할 것 같고. 군소리도 없을 것 같고."
"……."
"그러니까. 꼭! 꼭 좀 데리고 와 주세요. 꼭!"
희번덕대는 청명의 눈을 보며 홍대광은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절대 이놈이랑은 원한을 맺지 말아야지.'
사람이 이리 집요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할 지경이다.
"그럼 대회 끝나면 둘 다 화음으로 오는 거죠?"
"……그렇겠지?"
청명이 흐뭇하게 웃으며 구칠을 바라보았다.
"자주 보자."
"으, 응."
"그리고."
그의 고개가 삐딱하게 한쪽으로 돌아간다.
"왕초도 자주 보자고."
"……."
"자주."
"……."
구칠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그리고 동시에 종팔의 앞날에는 지옥도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