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군자는 괜한 수고를 하지 않는 법이다. (5)
소림이 위치한 숭산 앞마을 등봉(登封)의 주루, 해월루(海月樓)는 사람들로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다.
본디 등봉에는 소림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편이었다.
소림이 자체적으로 향화객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숙소를 내어 주기도 하지만, 소림을 보고 싶으나 엄격한 사찰의 계율은 겪고 싶지 않아 하는 이들은 숭산 아래 마을로 모여들기 마련이니까.
그런 와중에 천하무림대회가 열리며 등봉의 주루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여기! 여기 낙양연채하고, 동파육! 그리고 따뜻하게 데운 화주 한 병! 빨리빨리 가지고 와!"
"여기 소면 하나, 그리고 회면도!"
"예이!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소이들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랐다.
둥근 탁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이들은 다들 이번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중심 화제는 화산의 약진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게 말일세. 이 대회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소림과 무당의 격전이 될 줄 알았지. 거기에 하나 추가하자면 남궁세가 정도가 아닌가?"
"그렇지. 그렇지."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소림은 팔강에 겨우 하나를 남겼고, 무당 역시 한 사람이 남았을 뿐이네. 남궁은 하나도 남기지 못했지."
"끌끌끌끌. 다들 당황했겠구만."
중인들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들이 스쳐 갔다.
구파일방이라는 거대한 산이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강호인들에게 이중적인 감정을 주었다.
미묘한 쾌감과 미묘한 불안.
그 두 가지 감정이 주루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가면 화산이 우승하는 것 아닌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리 낙관할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 화산의 화산신룡은 이미 후기지수의 수준이라고 할 수 없네. 그건 숫제 괴물이야."
"하기야. 웬만한 문파의 장로급이라고 해도 단악검 남궁도위를 그리 일방적으로 때려잡을 수는 없을 텐데 말이지. 천하제일후기지수라는 명성이 거짓이 아니었던 게지!"
"그렇고말고! 그러니 이번 대회 우승도 화산신룡 몫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들뜬 목소리로 말할 때 한 사내가 딱 잘라 분위기를 끊어 버렸다.
"그래도 우승은 못 해."
탁자에 앉은 이들이 딱 잘라 단언한, 뚱뚱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왜 그리 생각하는가?"
"간단하네. 여기가 소림이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소린가?"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답했다.
"설마 자네들은 소림이 정말 강호의 화합을 위해서 이 대회를 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소림이 이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없었다면 절대 일을 벌이지 않았을 걸세. 생각해 보게. 내 집 마당에 연 대회에서 내가 진다니. 그게 무슨 망신인가?"
"으음."
"듣고 보니."
뚱뚱한 사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약진이 놀라운 건 사실이지만, 우승은 별개의 문제라 이 말이야. 아마도 우승은 소림의 혜연이 하겠지."
"그래도 너무 단정하는 것 아닌가? 화산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은데. 물론 이 대회만으로 화산을 평가하는 건 과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강호일절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아닌가?"
"쯧쯧쯧."
뚱뚱한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군. 나는 화산을 무시한 적이 없네. 그저 나는 소림이 이대로 당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네."
"으음."
"물론 화산은 대단한 문파가 되겠지. 그만한 인재들이 있고, 실적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소림은 소림이네. 그 정도 인재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있단 말일세. 강호의 천년북두(千年北斗)가 바로 소림 아니던가? 화산신룡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소림을 이길……."
그 순간이었다.
쾅!
갑자기 문이 터져 나가는 듯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뭐, 뭐야?"
"누가 저리 과격……. 어? 저 사람?"
주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산신룡?'
'화산의 화산신룡이잖아?'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천하비무대회를 보기 위해 소림까지 왔다. 그런 이들이 지금 대회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왜 화가 났지?'
'엄청 열받은 것 같은데?'
'설마 대화를 들었나?'
문을 박차고 들어온 화산신룡 청명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청명의 눈이 가만히 좌우를 훑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재빨리 눈을 내리깔며 딴청을 피웠다.
'눈 마주치면 망한다.'
'자는 척해. 자는 척!'
딱히 화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라고 해도, 소림 내에 암암리에 퍼져 나가는 한 가지 소문을 모를 수는 없었다.
- 천하제일후기지수 화산신룡의 성격이 개차반이다.
- 부처님도 돌아앉으시다 못해 자리를 떠 버리신다.
- 엮여서 좋을 일이 없다.
잘나가는 후기지수를 음해하는 일이야 허다하니 이런 뜬소문은 잘 먹히지 않는 편이지만…… 화산신룡 청명에 대한 소문만은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편이었다.
이유?
지켜보는 사람들도 눈이 있지 않은가?
비무대 위, 아래를 가릴 것 없이 공평하게 패악질을 저지르다 보니 워낙 목격자가 많았다.
결국 화산신룡의 인성에 대한 소문은 이제 거의 강호 공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니 다들 이리 황급하게 눈을 피할 수밖에.
핏발이 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청명이 움찔했다. 그와 동시에 주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움찔했다.
"자리!"
청명이 경공을 펼쳐 주루 안으로 날아들더니 구석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점소이!"
"예에에에에엡! 지금 갑니다!"
"여기, 여기! 일단 고기! 고기로 된 요리 아무거나 주고, 술! 여기 술 뭐 있어?"
"생각하시는 술은 다 있습니다!"
"그럼 백주 일단 다섯 병만!"
"예에!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내오겠습니다!"
"일단 술부터!"
"예!"
점소이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청명의 의자에 늘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 작은 마을에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문은 차는 게 아니라 손으로 여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이 썩을 놈아!"
"그만 포기하십시오, 사숙. 그게 고쳐지면 저놈이 아닙니다."
"소면. 소면. 소면."
"……사매. 소면 시켜 줄 테니 진정 좀 해."
"소면!"
백천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멀쩡한 인간이 없어.'
조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자리를 찾아서 다행입니다. 마을에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그래. 다행이네. 두어 곳만 더 돌았어도 저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니까."
물건이고 나발이고 일단 술부터 조지고 시작하자는 청명을 다독여 상점부터 들렀던 백천이다. 그러다 보니 그사이 들어찬 인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석임을 확인하고 돌아 나오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청명의 눈에 핏발이 서는 모습을 보는 건, 말 그대로 심장이 오그라드는 일이었으니까.
청명이 차지한 자리로 가 의자를 빼고 앉은 백천은 밀려드는 안도와 조금의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를 따라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점소이가 부리나케 술병을 들고 달려왔다. 탁자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청명이 술병 하나를 낚아채더니 뚜껑을 뽑아내고 병째 입에 박아 넣었다.
꼴꼴꼴꼴.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의 목젖을 보며 모두 흐뭇하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말코 같을까?"
"산적이 딱인데, 산적이. 산을 잘못 고른 것 아니겠습니까? 녹림이 있는 산으로 가야 하는데 실수로 화산으로 온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화산은 녹림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
"조걸아."
"예?"
"세상에는 사실이더라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엄중히 주의를 준 백천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크아아아아!"
청명이 단숨에 비워 버린 술병을 탁자 위에 쾅 하고 던지듯 내려놓았다.
누가 본다면 더없이 호쾌하다고 박수를 칠 만한 광경이다. 퍼먹는 놈이 도사만 아니라면 말이다.
기행이라면 기행이었지만, 사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명의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주기에는 지금 관심 줄 곳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앉은 탁자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이들은 저마다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람들 화산의 제자들이 아닌가?"
"그렇지. 중앙의 저자가 화산신룡, 그리고 건너편에 앉은 이가 화정검 백천이구먼."
"그리고 다른 이들도 다들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이들이 아닌가? 저 소저는 팔강에 진출한 이대제자 유이설이고, 그 옆에는 무려 삼대제자면서도 팔강에 진출한 조걸이로군."
"오오. 이렇게 보니 다들 헌앙하지 않은가?"
꿈틀.
쫑긋.
화산 제자들의 귀가 움찔움찔하고 입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화산을 이끌어 가는 후기지수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다니. 개안을 하는 기분이로군."
"화산만 이끄는 게 아니지. 저들이 훗날의 강호를 이끌 이들이 아닌가?"
"과연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군."
백천이 낮게 헛기침했다.
그의 얼굴이 답지 않게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민망하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화산의 무인으로서 누군가의 칭찬을 이리 가까운 곳에서 받아 본 적이 있던가?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어디를 가도 흠모와 질시의 시선을 받기 마련이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물론 소림에서 비무를 하고 환호를 받기는 했지만, 이것과 그건 느낌이 많이 다르다.
"화정검은 정말 절세의 미남이로고."
"유이설 검수도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내 생전 저런 미모는 처음 보는 것 같구만!"
"화산신룡도 저 정도면 훌륭하지."
백천이 쑥스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다 들린다고, 이 양반들아.'
저들끼리는 작게 말하고 있다지만, 화산의 제자들이 그걸 듣지 못할 리가 없다. 조걸과 윤종도 어색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유이설만이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응? 청명?
청명은 지금 두 병째를 나발 불고……. 청명아?
"저 옆에 있는 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다섯은 이미 오검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더군."
"오검(五劍)?"
"화산오검이던가? 매화오검이던가? 여하튼 화산신룡을 필두로 백천, 유이설, 조걸, 그리고 윤종까지 다섯을 화산 최고의 후기지수라 묶어 부른다지 않는가?"
"무당삼검 같은 느낌이로군."
"그렇지, 그렇지."
오검?
가만 듣던 백천이 눈을 끔벅였다.
'뭐지? 나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막상 본인은 자신의 유명세를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회에서 큰 활약을 한 덕분에 화산 제자들의 명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굉장한 속도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검이라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음? 뭐가?"
"팔강에 든 이는 셋인데 오검이라니."
"……그게 그렇지가 않네. 화정검 백천은 부상으로 기권하기는 했지만, 화산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고 하더군. 그리고 윤종은…… 음, 상대가 상대이지 않았는가?"
"듣고 보니 그렇군."
"여하튼 내게 따지지 말게. 이미 퍼지기 시작한 호칭에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법이니까. 이제 곧 저들 모두가 그럴싸한 별호를 하나씩 얻게 되겠지."
윤종과 조걸의 입가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별호라니.'
뭔가 싱숭생숭한 느낌이다.
별호를 얻는다는 건 그 사람이 강호에 회자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조걸과 윤종도 이제는 강호에 나가 당당히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좋아?"
청명이 묻자 두 사람이 헛기침을 해 댔다.
"조, 좋기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좋아 죽는데?"
"크흐흐흠."
그 모습에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직 갈 길이 구만리다, 이것들아.'
사실 이들이 해낸 것을 감안한다면 명성이 퍼지는 게 오히려 늦은 격이다. 대회가 끝나면 이들의 명성은 아마 강호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때 마침 점소이가 요리를 날라 왔다. 그 모습을 본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점소이! 여기 백주 다섯병 더!"
"그만 마셔, 인마!"
"뭔 다섯 병을 시켜 놓고 혼자 벌써 세 병을 동냈어?!"
"술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잔. 잔. 저도 잔 주세요. 잔."
화산의 제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닭다리를 뜯고, 술을 게걸스럽게 마셔 댈 때였다.
끼이이익.
주루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힐끔.
슬쩍 눈길을 주어 확인한 백천의 두 눈에 이채가 띠었다.
'개방인가?'
개방은 거지들의 문파.
평소에는 구걸을 해 가며 끼니를 해결하지만, 이런 식으로 행사가 있을 때는 돈을 지불하고 주루를 이용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물론 주루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겠지만, 돈을 내는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
"자리가……."
안으로 들어온 개방의 거지들이 자리를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백천은 관심을 끄고 다시 음식에 집중하려 했다.
"어?"
그런데 그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거지 중 하나가 눈을 크게 뜨더니 앞쪽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초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