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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09화 (309/1,567)

309화. 군자는 괜한 수고를 하지 않는 법이다. (4)

화산은 무려 세 명의 제자를 팔강에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청명과 유이설, 그리고 조걸까지 큰 부상 없이 모두 무난하게 승리를 거뒀다.

"……네가 왜 이겼지?"

"무슨 소리십니까, 사형?"

"아니. 좀 기이해서."

"이상한 소리 마십시오. 제가 이기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배를 쭉 내미는 조걸을 보며 윤종은 인생무상을 느꼈다.

누구는 청명을 만나서 살겠다고 기권을 하는데, 저놈은 대진운이 좋아 편안하게 승리하지 않았는가?

부전승으로 한 번 편히 이긴 것이 설마 이런 결과를 낳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하튼.

삼십이강에 네 명을 올린 것도 대단하다 할 수 있지만, 팔강에 셋이 오른 것은 그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성과다.

따지고 보면 화산이 그 힘을 강호 전역에 떨치던 시절에도 이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둔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화산의 문도들은 오히려 몸가짐을 조심했다.

- 기존의 문파들이 우리를 좋게 볼 리가 없다. 분명 눈에 불을 켜고 견제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다들 긴장을 풀지 말고 항상 언행을 조심하도록 해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순풍에 돛 단 듯 나아가는 화산의 기세를 가로막는 역적이 되고 싶은 이는 화산의 제자들 중 아무도 없었다. 다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펼쳐진 상황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이게 다 뭡니까?"

백천이 멍한 눈으로 전각 안에 쌓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웬 궤짝과 상자들이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선물이라는구나."

"선물이요? 어디 잔치라도 났답니까?"

"그게 아니라."

현영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축하한다며 선물을 보내 왔다."

"네?"

백천이 화들짝 놀라 선물의 탑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게 전부?'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심지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보내 왔단 말인가?

"아니…… 그들이 왜……?"

"화산과 친교를 나누고 싶다는구나."

"예?"

백천은 다시 멍한 얼굴로 되묻고 말았다.

그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고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구파일방이 은근히 그들은 경원시하던 모습을 똑똑히 보았는데, 갑자기 이리 태도를 바꾼다고?

"이건 청성에서 보낸 선물이로구나. 오? 이건 개방에서? 허허. 살다 살다 거지가 선물을 보내는 걸 다 보는군."

현영이 희희낙락하며 선물들을 분류했다.

"그리고 이건……. 허어? 무당까지?"

중얼거리던 현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 이리 많은 선물을 받아 보는 건 처음이구나. 그것도 화산이 아닌 소림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러더니 안쪽의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지금도 선물이 오고 있으니 일단 이것들 모두 저 안쪽으로 나르거라."

"예, 장로님!"

화산의 제자들이 우르르 다가와 선물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행렬을 보던 윤종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구파일방이 저희에게 선물을 보내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친교를 나누고 싶다 했다고."

"저희랑요? 얼마 전까지 그렇게 물어뜯으려고 들더니?"

"그……."

그때 등 뒤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새끼들은 원래 그래."

"엥?"

돌아보니 청명이 손에 월병을 든 채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원래 그렇다고?"

"어, 원래 그래."

그는 산더미 같은 선물을 보며 슬쩍 조소했다.

"친해져서 나쁠 것 없다는 계산이 선 거지."

"이렇게 빨리?"

"오히려 늦은 거야."

밑에서 올라오는 놈은 어떻게든 짓밟으려 들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결국 옆에 서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곳에 설 거라면 기왕이면 친한 것이 낫다.

그 말인즉슨, 화산이 과거의 힘을 되찾을 거라고 구파일방이 이제야 확신했단 의미다.

'느려 터진 것들이.'

아마 선물을 보낸 이들 중 종남과 해남은 빠져 있을 것이다.

종남이야 벌써 소림을 떠난 데다, 있다고 해도 죽으면 죽었지 화산에 선물을 보낼 놈들은 아니다.

그리고 해남은 만약 화산이 구파일방에 복귀하게 되면 자신들이 밀려날 확률이 높으니 선물을 보낼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구파일방은 화산이 복귀한다 해도 좋은 관계만 유지할 수 있으면 피해 볼 것이 없다. 물론 체면이 상하고 민망하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백천이 눈을 찌푸린다.

"하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노골적? 나름 자제한 거구만."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청명이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옛날에는 더했지.'

그가 매화검존으로 명성을 날리던 당시에는 화산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의 선물이 연무장에 쌓일 정도로 매일같이 들어왔다.

그때에 비한다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여하튼 구파 놈들 하는 짓은 변한 게 없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구파일방이 이런……."

"구파라고 뭐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아? 어차피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이런 선물을 보낸다고 우리가 그들을 좋게 보진 않으리란 걸 저들도 알 게 아니냐."

"안 보내면?"

"응?"

청명이 뚱하게 물었다.

"안 보내면 좋게 봐 주고?"

"……."

아니. 그건 아니겠지.

백천은 조금 납득한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청명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놈들도 이런 선물 같은 걸로 우리가 감동할 거라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보내는 것과 보내지 않는 것 중 어느 게 더 이득인지는 아는 거지."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이것들은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 영 찝찝한데."

"……나는 상관없는데."

"응?"

"괜찮겠어?"

"뭘?"

청명이 슬쩍 백천의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백천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지옥귀 같은 얼굴의 현영이 서 있었다.

"……."

"돌려보내?"

"……."

"이런 밥 버러……."

기겁을 한 백천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돌려보내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품는다.

백천이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무서웠다.'

방금 본 표정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였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왜 주는 선물을 마다해? 돌려보내면 그놈들 곳간만 도로 채워 주는 거지. 적의 곳간을 비우는 건 병법의 기본 아냐?"

백천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 그냥 네 입에서 병법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좀 이상해서."

"……."

청명이 막 발작하려는 찰나 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청명이의 말이 맞다. 어떤 의도로 보냈건, 선물은 일단 받아 두는 게 예의겠지. 나 역시 찜찜하기 짝이 없지만 선물을 돌려보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저기…… 장로님?

입이 귀에 걸리셨는데요?

정말 찜찜하십니까? 정말?

하지만 백천은 차마 그렇게 물을 수 없었다. 돈에 관련된 일을 현영에게 묻는 것은 화산에서는 금기시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구나."

"문제요?"

"흠."

현영이 턱을 매만지며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이걸 넙죽 받아 버리면 다음에 선물을 보낸 이들을 볼 때 조금 민망할 수도 있겠어."

"그렇죠."

"그러니 보답을 해야지. 우리도 적당한 선물을 보내는 게 좋겠구나."

"아……."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물을 받으면 그건 뇌물이 되어 버리지만, 서로 교환한다면 그건 정말 선물이 될 수 있다.

"좋은 방법 같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딱히 선물로 보낼 만한 물건들이 없다는 건데……."

현영이 잠깐 고민하다 백천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네가 마을에 좀 다녀와야겠구나."

"답례할 만한 물건을 사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런 건 오래 끌어 좋을 일이 아니다. 바로 답례를 보내 버리는 쪽이 낫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을 하던 백천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답례거리로 뭘 사 와야 하는 겁니까?"

"나야 모르지."

현영이 당당하게 답했다.

"나도 숭산에는 처음 오는데, 아래에 뭘 파는지 어찌 알겠느냐? 가서 적당한 것을 알아서 사 오너라."

"으으음."

"걱정할 것 없다. 조걸아."

"예! 장로님!"

"백천이를 도와주거라. 네가 그래도 상인 집안 출신이니 물건을 보는 안목은 있겠지."

"알겠습니다."

그러고도 현영은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이 많은 문파에 보낼 선물을 사 들고 오려면 두 명으로는 어려울 텐데. 그럼 또 보낼 이가 윤종……."

"엣헴."

"그리고 이설이……."

"엣헴!"

"또 백상이도 같이 가면……."

"에에에에엣헤에엠!"

"……."

현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 연신 헛기침을 하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가고 싶으냐?"

청명은 대답 없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현영을 바라보았다.

"으으으음."

현영은 고뇌하는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고생을 했으니 하루쯤 편히 놀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다음 비무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하루 정도 마을에 다녀온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정말 이 녀석을 마을에 보내도 될까?'

이건 귀여움과는 별개의 문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놈이지만, 이놈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는 건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끄으응. 절대 사고 치지 않을 자신 있겠지?"

"에이, 장로님도. 제가 언제 사고 치는 것 보셨어요?"

"……."

물론 많이 봤지.

하지만 현영은 끝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다녀 오거라."

"장로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장로님! 이건 무모합니다!"

"끔찍."

주변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현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너희를 같이 보내는 것 아니더냐. 너희는 나름 청명이에게 익숙할 테니 문제가 생긴다면 막을 수 있겠지."

"……장로님, 사람이 불에 자주 탄다고 해서 불에 익숙해지지는 않습니다. 저놈은 겪으면 겪을수록 더 뜨거운 염화지옥 같은 놈입니다."

"……."

"재고를! 다시 한번……."

턱.

필사적으로 현영을 설득하던 백천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청명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사숙. 사숙."

"……왜?"

"잘 생각해 봐. 사숙은 알 수 있잖아."

"뭘?"

청명이 아주 흐뭇하게, 환하게 웃는다.

"내가 사숙을 따라갔다가 사고 칠 확률이 높을까?"

"……그야……."

"아니면."

청명의 이 가는 소리가 으드득 울렸다.

"홀로 쓸쓸히 남겨진 내가 상처 입은 마음을 안고 주변을 헤매다가 괜한 시비가 걸려서 다른 문파 놈들 대가리를 다 깨 버릴 확률이 높을까?"

"……."

백천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눈을 희번덕대는 청명을 보던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숫제 협박이다.

"……그래. 가자. 가."

"헤헤. 그렇지?"

청명이 생글생글 해맑게 웃어젖혔다.

'언젠가는 내가 저 면상에 죽빵 한번 꽂고 만다.'

과연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소망을 되새긴 백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장로님."

"그래. 이걸 챙겨 가거라."

현영이 품 안에서 돈을 꺼내 백상에게 내밀었다.

"적당히 좋은 것으로 골라 오거라."

"예! 최상품으로 골라오겠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구나."

"예?"

현영이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청명이 백상의 손에 올려진 전낭을 냉큼 낚아챘다.

"걱정 마십시오, 장로님. 겉보기에는 비싸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딱히 비싸지 않고 그리 쓸모도 없는 물건으로 잘 골라 보겠습니다."

현영이 더없이 환하고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우리 청명이. 어찌 이리 말도 잘 알아듣누?"

백천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그냥 인성이……."

"인성 좋으신 탈락자는 조용히 하시고."

"……."

백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윤종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토닥였다.

"괜찮습니다, 사숙. 질 수도 있죠."

"기권한 놈의 위로는 받고 싶지 않다."

"……."

윤종이 서글프게 전각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썩을 문파.'

한시도 서로 물어뜯지 않는 순간이 없구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예!"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백자 배들이 슬금슬금 현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

"아니. 청명이 놈이……."

"괜찮다."

"아, 아니. 그래도……."

현영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사고를 친다고 해도 우리 코가 깨지지는 않을 테니 괜찮지 않으냐?"

"……."

"저 녀석들을 걱정할 시간 있으면, 마을에 있을 사람들을 걱정하거라."

"……."

어쩌면 도문(道門)으로서의 화산은 끝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백자 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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