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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08화 (308/1,567)

308화. 군자는 괜한 수고를 하지 않는 법이다. (3)

도란 그저 추구하는 게 아니다.

매화나무가 춥고 긴 겨울을 버텨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는 것처럼, 도를 추구하는 것 역시 길고 긴 인내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윤종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인의…….

"잡생각 하지?"

"……."

윤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를 둘러싼 백자 배들이 하나같이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살벌한 눈빛.

죄를 저지른 사질에 대한 질책이 가득 담긴 눈빛이다.

그런데…….

조걸아?

백자 배들 사이에 끼어 삿대질을 해 대고 있는 조걸의 모습이 보였다. 윤종의 볼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너는 왜 거기 같이 끼어 있니?

"내가!"

중앙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백천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승질이 뻗쳐서, 내가!"

"……."

"청자 배의 대제자라는 놈이 비무에서 기권을 해? 그것도 검도 한 번 안 휘둘러 보고?"

"아니……."

윤종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백자 배들은 그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으르렁댔다.

"저게, 저게 빠져 가지고."

"요즘 칼질 좀 늘었다고 건방져졌다 싶었어."

"화산의 제자라는 놈이 항복을 해? 항복을? 확 마 대가리를 깨 버릴라."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흡사 사방에서 승냥이 때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광경 같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닌가.

"아니……."

"아니고 자시고!"

"어디서 입을 떼, 어디서!"

"마! 왜 항복했냐고! 대답 안 해?"

"그 주둥아리 좀 열지? 엉?"

"……."

저기.

화내시는 건 좋은데 이렇게 단체로 패실 거면 의견합일이라도 좀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을 열어야 합니까, 닫아야 합니까…….

그리고 조걸이 너는 왜 은근히 같이 껴서 반말 찍찍 하지?

이 새끼가……?

그때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저리 많이 지켜보는데 화산의 제자가 항복이라니. 세상 사람들이 화산을 뭐라 생각하겠느냐!"

"사형제끼린데……."

"그러니 더 문제지! 사형이라는 놈이 사제한테 항복을 하는 게 말이나 되느냐! 이러니 화산의 기강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아니더냐! 적어도 칼이라도 휘둘러 보고! 꿈틀이라도 하고 져야지!"

결국 참다못한 윤종이 세상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것도 사람을 봐 가며 하는 거 아닙니까?"

"뭐?"

백자 배들이 눈을 부라렸지만 윤종은 당당했다.

"사숙들 말이 다 맞습니다! 사형이 되어서 그리 항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형으로서 위엄은 못 보이더라도 의지는 보여 줘야죠!"

"오?"

백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왜 그랬느냐?"

"그런데 저 새끼가 어디 사형이라고 봐줄 놈입니까? 남녀노소 지위고하 막론하고 공평하게 대가리부터 깨부수는 놈인데! 저 새끼는 화산에 들 게 아니라 관리가 되었어야 할 놈입니다! 부자고 거지고 권력자고 할 것 없이 공평하게 후려칠 놈 아닙니까!"

"……."

"그런 놈이 사형이라고 봐주겠습니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적당히 맞상대하고 끝날 놈이어야 머리라도 들이밀어 보죠. 머리 들이밀면 좋다고 깰 놈인데 저도 일단은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윤종이 당당하게 어깨를 쫙 폈다.

"이 중에서 청명이랑 붙으면 항복 안 하고 대가리 깨질 때까지 싸우겠다고 하시는 분만 제게 돌을 던지십시오!"

"……."

백자 배들이 미묘한 얼굴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구박을 하고 싶기는 한데, 사실 저 청명이랑 제대로 붙어 보라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윤종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논리일 것…….

어? 조걸아?

너 왜 돌을 줍니?

그때 잠자코 듣던 백천이 윤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맞다."

"사형!"

"너무 무르신 것 아닙니까?"

"조용."

백자 배 사이에서 불만이 튀어나오자 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의 불만을 찍어 눌렀다.

"윤종아."

"예, 사숙."

"나는 네 말을 십분 이해한다."

"사숙!"

윤종이 감격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역시 백천은 이 상식이 붕괴되어 버린 화산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

"그런데 말이다."

"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선택이 좀 실수처럼 느껴지는 게……."

"……."

"우리가 이해한다고 해서 저놈이 이해할까?"

"네?"

"저놈."

백천이 한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윤종은, 끝내 보고야 말았다.

도박판에서 돈을 챙겨 든 청명이 입꼬리에 미묘한 미소를 내걸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말이다.

"……."

청명을 발견한 백자 배들이 입에 거품을 문 커다란 개를 본 듯 슬금슬금 멀어졌다.

윤종의 얼굴이 움찔움찔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 모여서 뭐 해?"

"아니. 뭐……."

청명은 무릎을 꿇고 있는 윤종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형."

"……으응?"

"참 합리적이야, 그렇지?"

"……응?"

윤종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합리적. 그래, 합리적인 거 좋지. 이기지도 못할 상대랑 괜히 드잡이해서 땀 흘리고 피 볼 필요는 없는 거지. 차라리 빠르게 항복해서 체력이라도 보존하는 게 이득 아냐, 그렇지?"

윤종이 슬쩍 청명을 흘끔거렸다.

생글생글 웃고 있으니 표정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저리 웃고 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게 참 기이한 일이지만, 여하튼!

슬쩍슬쩍 청명의 눈치를 보던 윤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렇지?"

"그럼."

"……비꼬는 거 아니지?"

"에이. 사형도 내가 사람 비꼬는 거 봤어?"

"……어?"

그건 못 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 새끼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데 느긋하게 비꼴 만큼 성격이 좋지 못하다. 일단 달려들어서 대가리를 깨겠지.

"그,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윤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숙들이 비난하건 말건 일단 이놈만 어떻게 넘길 수 있으면…….

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듯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말이야."

"……으응?"

그 순간 청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왜 칼 들었어?"

"응?"

"에라!"

청명이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쭉 뻗어 윤종을 뻥 걷어찼다.

"켁!"

윤종이 데굴데굴 굴러 바닥에 철푸덕 엎어지자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합리적이신 분이 왜 칼 들고 설치시나! 칼 들 일이 생기면 관아에 가지, 관아에!"

"……."

청명이 눈을 까뒤집는다.

"아니. 이것들이! 뭐? 합리? 이 양반들은 마교 보고도 대화로 풀자고 덤비겠네! 어디 칼 들고 도 닦는 것들이 합리를 입에 올려?"

"아, 아니……."

"으르르르르!"

순식간에 광견으로 돌변한 청명이 거품을 물며 윤종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백자 배들은 기겁하며 그를 잡아 만류했다.

"청명아, 진정해라!"

"나중에 전각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단 진정해라!"

조금 전까지 윤종을 후려 패 버릴 듯하던 백자 배들이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청명을 말린다.

"합리? 합리이이이이? 그렇게 합리적이어서 산골짜기에 처박혀서 우화등선 하겠다고 칼질하냐? 어? 합리 찾는 양반이 도문에는 왜 와 있어? 이 절간에서 고기 찾을 인간 같으니!"

"……절간에서 고기 찾은 건 너잖아?"

"뭐?"

"아, 아니."

윤종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억울한 시선은 청명의 손에 들린 육포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거라도 없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내가 속이 터져서!"

"승질이 뻗쳐서!"

"창피해."

청명, 백천, 유이설로 이어지는 삼 연타를 얻어맞은 윤종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항복할 때도 있는 거지. 이 후퇴를 모르는 양반들 같으니라고.

"졸장부……."

"……넌 진짜 죽일 수도 있다."

슬그머니 한마디 거들려던 조걸이 찔끔하여 물러섰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여기에 있었구나."

"아, 사숙조!"

"사숙!"

운검이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승부는 잘 보았다."

"관주님!"

윤종이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운검에게 달려갔다. 운검의 옆에 있으면 미친 호랑이 같은 청명도, 굶주린 승냥이 같은 사숙들도 더는 그를 구박하지 못할 것이다.

운검이 달려오는 윤종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손을 뻗어 그의 귀를 잡아챘다.

"아악! 관주님! 귀! 귀!"

"너는 이리 오거라."

"아아! 관주님, 귀! 진짜 귀! 떨어집니다! 귀!"

"시끄럽다! 내가 백매관주로서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어디 대제자라는 놈이! 잔말 말고 따라와라!"

윤종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운검을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숙께서 저런 분이셨나?"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허탈한 대답이 들려왔다.

"다 그렇게 되어 가는 거지. 다 그렇게."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 * *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상처가 욱신거린다.

하지만 이송백은 내색하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우는소리 할 때가 아니다. 종남이 입은 상처는 그가 입은 것보다 더 크니까.

슬쩍 주변을 둘러본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다.'

마치 패전하고 돌아가는 패잔병들 같은 모양새였다.

어쩌면 당연하겠지.

패배란 그 순간에는 오히려 깊이 실감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시간이 흐르고 잃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수록 패배의 상처는 더 아프게 사람을 찔러 들어온다.

종남은 이번 대회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어쩌면 다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이송백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너지는 문파.

잃어버린 혼.

그리고 절망밖에는 남지 않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송백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당신은 여기서부터 시작한 겁니까?'

아니, 몇 배는 더 절망적이었겠지. 그래도 사람이 남아 있고, 명성이 남아 있는 종남과는 달리, 화산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청명은 그 절망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불과 수 년 만에 화산을 저기까지 이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송백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청명처럼 할 수 있을 거란 헛된 꿈은 꾸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수 년 동안 해낸 일이라면, 수십 년간 노력하면 언젠가는 자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말이다.

멀고 먼 길.

너무 멀어서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길.

'그 길을 내가 걸을 수 있을까?'

"엇."

그 순간 이송백의 다리가 풀리며 그의 몸이 휘청였다.

덥석.

옆에서 걷던 사제들이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사형?"

"아직 부상이 깊으십니다."

이송백은 고개를 들어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사형이라.'

한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다. 사제들은 그동안 그와 대화하는 것 자체를 꺼려 왔으니까. 그런 이들이 이리 부축해 주고 걱정을 해 줄 줄은 몰랐다.

"괜찮다."

이송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제들이 겸연쩍은 얼굴로 손을 물렸다. 그리고 살짝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저…… 사형."

"음?"

"그…… 종남으로 돌아가면 제게도 천하삼십육검을 좀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

잠깐 머뭇거리던 사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숙들이나 사부님께는 조금 껄끄러워서……."

"……."

이송백은 슬쩍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제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 과거와 같은 경멸은 담겨 있지 않았다.

"괜찮겠느냐? 너희는 설화십이식을 익히고 있는데."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의 사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형과 그 화산신룡의 비무를 보고 나니…… 설화십이식만이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렇구나."

이송백은 고개를 돌려 그들이 떠나 온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제법 멀어진 소림.

그곳에 그가 있다.

'청명 도장.'

청명은 그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의 비무를 통해 종남의 길도 열어 준 건지도 모른다.

청명이 그걸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

이송백은 그에게 입은 은혜를 갚게 될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그곳을 응시하던 이송백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가자꾸나. 종남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다."

"예! 사형."

종남으로 향하는 이송백의 발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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