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5)
유이설은 자신의 앞에 마주 선 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팽경이라 했던가?'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딱히 큰 관심이 없으니까.
무시?
그런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상대가 어떤 무학을 쓰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지, 이름 같은 게 아니다. 이름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빨라.'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하고 있지만 역시 비무대 위에서 완전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유이설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들뜬 심장을 가라앉히고 팽경의 커다란 도를 바라보았다.
무겁고 강해 보인다.
팽가의 도는 패(覇)와 쾌(快), 그리고 중(重)의 도.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면 역시나 패일 것이다. 저 무겁고 두꺼운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정면으로 맞받았다가는 순식간에 승패가 갈려 버린다.
'내 검만 봐서는 안 돼.'
검이란 어우러지는 것.
상대를 생각하지 않은 검은 춤사위에 불과하다.
그래. 그리 말했었지.
마침내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유이설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손에 검이 잡히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철이 든 이후…… 아니, 철이 들기 전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손에서 검이 떠난 날이 있었던가?
"하북팽가의 팽경이오."
"화산의 유이설이에요."
"화산의 활약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더군. 소저의 검 역시 날카롭겠지."
팽경이 빙그레 웃고는 도를 들어 유이설을 겨누었다.
"나를 넘을 수 있다면, 소저의 명성은 세상을 울리게 될 것이오. 하지만 소저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유이설이 가만히 팽경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바란 적 없어요."
"음?"
"명성 같은 거."
유이설이 천천히 검을 늘어뜨렸다.
"……괜찮을까?"
윤종이 자신도 모르게 걱정스럽게 말하고 말았다.
물론 유이설을 걱정하는 게 주제 넘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무리 견줘 봐도 유이설은 자신보다 강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유이설은 화산의 양대고수. 저 백천과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응?
청명?
쟤는 빼야지, 쟤는.
에이, 쟤는 반칙이지.
슬쩍 청명에게 시선을 준 윤종이 다시금 유이설을 바라본다.
'거의 두 배 차이가 나네.'
유이설이 딱히 작은 키는 아니건만, 건너편에 선 팽경이 워낙 거대하다. 이리 보고 있으면 어른과 아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가?"
검술의 숙련도를 논하기 전에 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유이설의 검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청명아."
"왜?"
"사고가 이기겠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왜? 지기라도 할까 봐?"
"차이가 너무 심하니까. 실수로 일격만 허용해도……."
"그럴 일은 없어."
"응?"
"저 칼귀신이 그럴 리가 없지."
청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생각이 난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청명을 찰거머리처럼 쫓아다니던 유이설의 모습이 말이다.
검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화산의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집착을 단순히 집착에서 끝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때도 그랬지.'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수련을 하러 나선 청명보다 먼저 연화봉에 오르던 이가 유이설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유이설은 단 한 번도 개인 수련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청명의 수련을 받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형제들이 기진맥진하여 곯아떨어져도 그녀만은 언제나 잠을 줄여 가며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청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무학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왜 유이설이 매화를 피워 내는 것에 그리 집착을 하는지.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사람의 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 확언할 수 있는 것.
유이설은 설사 청명이 나타나지 않고, 화산이 그대로 망해 버렸더라도 화산의 귀신으로 죽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다른 길을 택했을 수도 있다.
진금룡을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백천은 어쩌면 화산이 아닌 다른 문파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가벼운 마음으로 화산에 들었던 조걸은 가문으로 돌아갔겠지.
윤종은 화산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화산에 은혜를 갚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살던 땅을 잃고도 장문인과 함께 화산을 되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이설만은 달랐을 것이다.
전각을 잃은 화산의 제자들이 산을 내려가 뿔뿔이 흩어져도 유이설만은 화산에 남아 화산의 귀신으로 죽었겠지.
화산 어딘가에 처소를 정하고, 누구도 가라 하지 않은 길을 홀로 끝없이 걸었을 것이다.
누구도 이끌어 주지 않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외롭기 짝이 없는 길을.
"강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해야겠지."
청명이 가라앉은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수로서의 자격은 차고 넘친다. 화산의 그 누구보다도."
그 대화를 듣던 조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사고.'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걸의 눈을 파고들었다.
"후."
짧은 호흡을 연달아 내쉰다.
호흡을 완전히 자신의 지배하에 놓은 유이설은 한 올의 감정도 없는 눈으로 팽경을 바라보았다.
팽경이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지."
"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쓰러뜨리느냐. 나의 검을 완전히 펼쳐 내느냐다.
탓.
그녀는 기합도 없이 팽경에게 달려들어 검을 쭉 내질렀다.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찌르기. 하지만 빠른 속도와 완벽한 자세가 겸비된 찌르기는 하나의 절학과 다를 바가 없었다.
쇄애애액!
검이 대기를 가르며 팽경의 목을 향해 날아든다.
"흡!"
그 빠르기가 예상 이상이었는지 팽경은 살짝 당황하며 도를 끌어당겨 넓은 도면으로 자신의 목을 막았다.
스르륵.
그리고 그 순간.
쾌속하게 날아들던 유이설의 검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팽경의 도를 피해 그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간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팽경의 허벅지에서 핏물이 왈칵 뿜어져 나왔다. 팽경이 눈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시선이 금세 피로 젖어 들어가는 자신의 허벅지로 향했다. 생각보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문제는 단 일 격 만에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다.
'무슨 검이…….'
그만한 속도로 날아들던 검이 속도를 잃지 않고 방향을 전환하는 건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
'검귀(劍鬼)인가?'
유이설의 검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 왔던 화산의 검과는 다르다. 화려함 속에 무거움을 품은 화산의 검과 달리 유이설의 검은 더없이 간결하고 또한 더없이 실전적이다.
'까딱하면 당한다.'
팽경은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도를 꽉 움켜잡았다.
"그대를 얕본 것을 사과하겠……."
그 순간 유이설의 검이 다시 팽경의 얼굴을 찔러 들어온다.
"흡!"
카앙!
팽경이 숨을 훅 들이켜며 도를 들어 유이설의 검을 쳐 냈다.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저 가녀리기 짝이 없는 팔목과 저 가벼운 검으로는 그의 도를 뚫을 수 없다.
그가 쓰는 대도는 그 무게만 해도 백 근에 달한다. 웬만한 검은 맞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부러져 나간다.
"타핫!"
유이설의 검을 쳐 낸 팽경은 거리를 벌리는 그녀를 따라 도약하며 붉은 도기를 뿜어 냈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맹호출동(猛虎出洞).
전방으로 솟구치듯 달려들며 내리치는 참격(斬擊).
단순하기 짝이 없는 초식이다. 하지만 검과는 다른 도 특유의 무게감과 파괴력이 더해지면 그 단순함은 간결함으로 화(化)한다.
콰아아앙!
도가 바닥을 때린다.
단단한 청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도자기처럼 깨어지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려 댄다.
"어딜!"
팽경이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닥을 내딛고 유이설을 향해 돌진한다.
검은 날카롭고 화려하다.
하지만 도는 단순하지만 파괴적인 법.
화산의 검처럼 화려한 검을 상대할 때는 그 변화에 현혹되지 않고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팽경은 자신이 가진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물러나는 유이설과 달려드는 팽경.
아무리 유이설이 빠르다고 해도, 뒤로 물러나는 이가 앞으로 달려드는 이보다 빠를 수는 없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유이설을 사정권에 놓은 팽경은 강렬한 진각(震脚)을 디뎠다. 바닥을 산산조각 낼 듯 짓밟은 그는 그 힘을 온전히 도에 실어 유이설의 허리를 양단할 듯 휘둘렀다.
유이설은 검을 옆으로 치켜들어 검면(劍面)으로 팽경을 막기 시작했다.
"사매!"
백천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만한 힘과 내력을 담은 두터운 도를 검날도 아닌 검면으로 막는 건 너무도 무모한 짓이다.
검을 부러뜨린 팽경의 도가 유이설의 허리를 파고드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나.
그그극.
팽경의 도가 검면과 맞닿는 순간, 유이설은 검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의 도격을 흘려 내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검을 따라 허공으로 가뿐히 빙글 회전한다.
"엇?"
팽경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참격이 이리 쉽게 흘려 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유이설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회전하는 와중에도 검을 휘둘러 팽경의 가슴을 베어 낸 것.
팽경이 기겁을 하여 몸을 뒤로 빼냈지만, 이미 가슴에는 긴 자상이 그였다. 다행히 피륙의 상처에 불과했지만, 등골이 서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팽경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그걸 흘려 낸다고?'
사실 결과만 보면 대단할 것 없는 일이다. 그저 횡으로 휘둘러지는 검에 맞추어 몸을 띄워 올린 것뿐이니까.
하지만 검과 도가 맞닿는 순간,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질렀다면 저 검은 부러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도는 그녀의 허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을 것이다.
웬만큼 담대하지 않고서는 시도도 못 할 일이다. 그런데 그걸 저리 자연스럽게 해내다니.
팽경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사매가 저 정도였나."
유이설의 움직임에서 대단함을 알아본 것은 팽경뿐만이 아니었다.
백천 역시 대경실색하여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강한 줄은 알고 있었다. 가끔 대련하면서 유이설의 강함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결이 다르다.
무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 유이설에게는 백천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의 백천은 방금 유이설이 보여 준 일수를 흉내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일을 누가 감히 시도하겠는가?
그때 백천의 귀에 나직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련이란 실전에서 발휘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
"……."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사고지."
청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검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리한 칼날 같은 이성을 유지해야 돼. 별것도 아닌 일에 흥분해서 날뛰는 사숙이나 사형들과는 그 격이 다르지. 그렇기에 사고는 검수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야."
청명의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이건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비무 중에 제일 흥분해서 날뛰는 건 너 아니냐?"
"……."
청명이 슬쩍 비무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비무나 잘 봐."
"말 돌리냐?"
"……."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이설이 검을 낮게 늘어뜨린다.
'어설퍼.'
대충 해내기는 했지만, 완벽하지 않다. 완벽했다면 저 가슴에 가벼운 상흔이 아니라 깊은 자상이 새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의 검은 더더욱 완벽해질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유이설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짧게 심호흡을 끝낸 그녀는 팽경을 시야에 또렷하게 넣고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타앗.
바닥을 박찬 유이설의 몸이 유성처럼 팽경을 향해 쏘아진다.
"이……!"
팽경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그가 잠깐 낭패를 보았다고는 하나, 대비하고 있는 도수(刀首)를 상대로 검수(劍首)가 정면으로 달려드는 건 그를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감히!"
눈에 핏발이 선 팽경이 달려드는 유이설을 맞아 돌진한다.
"반으로 갈라 주마!"
그의 도가 강력하기 짝이 없는 도기를 품고 쾌속하게 유이설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앙!
유이설의 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팽경의 도를 후려쳤다.
'멍청한!'
팽경은 내력을 더욱 불어넣으며 날아드는 유이설의 검을 내리눌렀다. 정면으로 힘 싸움을 하면 유이설은 절대 그의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붉은 도기를 품은 팽경의 도와, 붉은 검기를 품은 유이설의 검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유이설의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타압!"
도를 움켜잡은 팽경의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이설의 머리를 향해 도를 힘껏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