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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04화 (304/1,567)

304화.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4)

넝마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남궁도위를 보며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하여튼 요즘 애새끼들은."

마!

예전에는 칼질 좀 하려면 칼에 사람만 한 돌덩어리 매달고 천 번씩 휘두르고 인마! 어?

몸뚱이를 절벽에서 굴려도 '어허 시원하다' 소리 나올 정도로 단련하고 나서야 간신히 검법 한 쪼가리 받고 그랬는데!

다리도 빈약해 빠진 놈이, 뭐?

제왕검혀어어엉?

제왕검혀어어어어어엉?

"마, 대가리를 확 그냥."

아, 이미 깼나?

"에잉."

청명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몸을 획 돌렸다.

이래서 천재니 어쩌니 하는 것들은 마음에 안 든다. 다음 단계로 빠르게 나아가는 쾌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속도감에 취해 발밑을 보지 못하기 부지기수니까.

이송백 같은 놈이 꾸물꾸물 기어서 기어코 자신을 추월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사실 알려 주려면 알려 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내가 왜?'

남궁세가에 관심도 전혀 없는데 굳이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화산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바빠 뒈지겠는데 남궁세가 따위 알 게 뭔가!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 비무대를 내려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크으으으!"

"캬아아아아!"

"크으으!"

자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사형제들을 보며 청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새삼스럽다니! 남궁도위잖아, 남궁도위!"

조걸이 감탄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가의 단악검 남궁도위면 이번 대회 최고의 우승 후보로 꼽히던 자 아니냐. 그런 놈을 저리 개 패듯이 패 버리다니."

"한 번씩 나는 이놈이 정말 나랑 같은 밥 먹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니까."

평소보다 더 격한 반응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렇게……."

"아니.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

"진짜 대단했다, 청명아!"

청명의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이기 시작했다.

"아니. 뭐, 고작 애 하나 팬 걸로 뭐……."

"그 애가 남궁도위면 그냥 애가 아니잖아?"

"크으으으. 진짜 속이 다 시원하다. 청명아 정말 수고했다!"

"……헤헤헤."

청명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진짜로 별거 아닌데 자꾸 이렇게 띄워 주니 은근히 기분이, 뭐랄까…….

"저거 좋아 죽는다, 저거."

"동룡이는 조용히 해."

"……."

백천이 조용해졌다. 어깨를 으쓱한 청명은 자리에 앉더니 옆에 놓인 자루에서 자연스레 육포를 꺼냈다.

"조걸 사형. 돈 받아 놨지?"

"아, 그래! 청명아! 대박이다! 엄청나게 벌었어! 이번에는 상대가 남궁도위라서 그런지 반대편에 거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쯧쯧쯧. 이래서 사람은 도박을 하면 패가망신을 하는 거지."

어디 남궁 따위에 돈을 걸어! 어어딜!

그럼 망해야지!

청명이 낄낄거리며 차지게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은 슬쩍 비무대 위의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비무대에 쓰러져 있는 그의 주변으로 주변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충격이 크겠지.'

솔직히 동정한다.

단악검 남궁도위.

그 명성이 높았던 만큼 자신에 대한 확신도 컸겠지.

검수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슴에 굳건히 새겼다면 패배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저건 그냥 패배라기에는 너무도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긴, 그건 청명을 만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일이긴 하다.

백천은 슬쩍 시선을 내려 육포를 찰떡처럼 씹어 먹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

옆자리를 바라보는 허도진인의 얼굴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망둥이처럼 눈이 툭 튀어나온 남궁황이 입을 쩌억 벌린 채 비무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어……. 저……. 어?"

보다못한 허도진인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소림이 은인자중하던 동안 구파일방을 대표하는 문파는 무당이었다. 그리고 오대세가 쪽은 남궁세가가 대표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무당의 장문인인 허도진인은 남궁황을 볼 일이 꽤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리 숱하게 만나는 동안 허도진인은 단 한 번도 남궁황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천하에 자랑거리였던 자신의 아들이 동네 흑도방파 건달패에게 끌려간 점소이처럼 신명나게 얻어맞았는데 저런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허도진인은 비무대에서 내려가는 청명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폭주하는 마차 같군.'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을 보았다면 허도진인 역시 지금 환호하는 관중들처럼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 시원한 활약의 희생자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점이겠지.

"……대체 어찌 저럴 수가 있습니까."

"허어……."

장문인들의 입에서 경악과 감탄이 연신 새어 나왔다.

허도진인은 알고 있다.

이 단상 위에서는 청명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자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음을 말이다.

화산신룡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순간 그를 품은 화산이라는 문파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렇기에 애써 외면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저 괴물 같은 놈을 무시할 수 없는 순간이 와 버렸다.

"……저건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청성 장문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 장문인이 그토록 절망했던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누군가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대로 경쟁해야 하는 문파에서 저런 괴물이 나와 버린다면 침착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겠지.

그래. 괴물.

저건 숫제 괴물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모두가 알아 버린 모양이로군.'

관중들 역시 크게 동요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남궁도위가 저렇게 진다고?"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럼 대체 저 화산신룡은 얼마나 강한 거야?"

남궁이라는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다.

오대세가의 수장이자 강호를 대표하는 명문가가 바로 남궁세가다. 그들은 대대로 천하를 호령하는 검수를 배출해 냈고, 시대마다 반드시 천하제일검을 논하는 고수를 보유해 왔다.

그리고 천하의 모든 이가 다음 대를 이을 남궁의 검으로 남궁도위를 뽑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남궁도위는, 다음 대 천하제일검 후보 중 하나라는 의미다.

그런 남궁도위가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박살이 났다는 건 뜻하는 바가 너무도 크다.

허도진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한쪽을 바라본다.

미소.

현종의 옆에 앉아 있는 당군악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허도진인은 순간 그 미소의 의미를 생각하다 뱃속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때, 당군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별말씀을요."

"새삼 궁금합니다. 대체 어떻게 저런 괴물을 키워 내신 겁니까?"

당군악의 말에 장문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종에게로 쏠렸다.

허도진인은 능숙하게 화제를 이끌어 가는 당군악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리 모두의 앞에서 말을 걸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현종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종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겠습니까."

차분하고 담담해 보이는 모양이, 대회가 시작될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범의 새끼는 날 때부터 범인 법이지요. 개가 키운다고 해서 범이 개가 되지는 않습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장문인. 화산신룡 하나라면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산은 지금 다른 문파들을 압도하는 활약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들을 당군악이 하나하나 강제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하하하. 화산 때문에 당가도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실력에도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화산에 비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당군악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만히 장문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불편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살짝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데 능숙하기 짝이 없는 장문인들이 저렇게까지 티를 낸다는 건, 속으로 몇 배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당군악은 고소를 머금었다.

'화산신룡이 우연히 사천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들과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산과 동맹을 맺은 건 당군악이 가주가 된 이후로 내린 결정들 중 최고의 한 수였다.

'그리고 그 대가를 이리 빨리 받게 될 줄이야.'

적어도 오 년에서 십 년은 더 걸려야 화산을 지원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하여튼 저 화산신룡은 어떤 일에서건 그의 상식 안에서 놀아 주는 법이 없다.

"여하튼……."

당군악이 조금 더 화산을 띄워 주려는 찰나였다.

"화산신룡은 확실히 대단합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허도진인이 선수를 쳤다.

당군악이 살짝 미간을 좁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허도진인이 말을 이었다.

"단순히 강한 수준이 아닙니다. 검에 대한 저 아이의 이해는 불가해합니다. 어찌 이립도 되지 않은 이가 저리 능숙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는 연신 고개까지 끄덕이며 칭찬을 퍼부었다.

그러더니 슬쩍 현종을 보며 말했다.

"다만……."

지금부터 나오는 말이 진짜 하고픈 말이라는 것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저만한 재능을 가졌는데……. 문파에서 이끌어 주고 밀어줄 수 있다면 정말 고금을 논할 검수가 될 수 있을 텐데요."

허도진인은 짐짓 안타까운 듯 낮게 한숨까지 쉬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범이 날개까지 달 수 있었을 텐데."

교묘한 화법이었다.

청명을 띄워 주는 듯하면서 화산을 깎아내린다.

더 교묘한 것은, 여기에서 현종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면 당군악이 기껏 조성해 놓은 분위기가 모두 깨져 버린다는 점이다.

하나 허도진인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현종은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물론, 천하를 통틀어도 참고 버티는 것 하나는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

특히나 그는 무시받는 것에 있어서는 만성이 생긴 사람이다.

"저도 그 점이 무척 아쉽습니다."

"흐음?"

담담한 현종의 목소리에 허도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현종은 평화롭게 빙그레 미소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육포를 씹어 먹고 있는 청명과 그의 주변에 옹기종기 몰려 있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화산이 해 줄 수 없는 것을 녀석의 사형제들이 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봄날 햇볕 같은 온기가 어려 있었다.

"화산에는 청명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아이들은 충분히 청명이의 곁을 지켜 줄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이끌어 줄 이가 없다고 해도 함께 나아갈 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겠습니까?"

그 인자한 미소에 마음이 불편해진 허도진인이 헛기침했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저 아이들은 강합니다."

현종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그리고 이제 저 아이들이 그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왁자지껄 떠들썩한 화산파의 소굴(?)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화산의 유이설이오!"

뒤쪽에서 검을 매만지고 있던 유이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소소가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고!"

"음."

하지만 유이설은 별다른 대답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손질하던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사형."

"그래."

백천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지 말고 실력만 발휘해라."

"네."

그녀가 비무대로 향하자 당소소가 우렁차게 외쳤다.

"사고, 반드시 이기……."

하지만 뭔가를 깨달은 듯 중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걸음을 멈춘 유이설은 그런 당소소를 재촉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내 당소소가 빙그레 웃었다.

"사고."

살짝 장난기 어린 표정이지만 더없는 진심이 실려 있었다.

"후회 없이 싸우고 돌아오세요."

반드시 이기라는 말은 그저 부담이 될 뿐이다.

유이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당소소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보고 있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이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고 있던 조걸이 슬쩍 청명에게 물었다.

"아무 말 안 해?"

"뭘?"

"지면 가만히 안 둔다거나……."

육포를 씹던 청명이 인상을 콱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건 사형들 같은 모지리들한테나 할 말이고."

"……."

"사고한테는 그런 거 필요 없어."

청명의 시선이 비무대에 오르는 유이설에게로 향했다.

"여기에서 매화검수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사람은 오직 사고뿐이니까."

"……."

"잘 봐 둬."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기에 화산의 혼이 있다."

바로 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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