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3)
"끄르륵."
남궁도위가 경련을 일으킨다.
마음 약한 청명은 차마 그 광경을 외면하지 못하고 남궁도위의 엉덩이를 검집으로 툭툭 두드려 주었다.
물론 이 광경을 만들어 낸 게 본인이라는 사실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니다.
"괜찮니?"
청명이 혀를 찼다.
"그러게 왜 나대고 그래. 아, 물론 너는 천재지. 천재 맞지."
그런데 그게 뭐?
청명의 입술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새끼야. 내가 지금까지 본 천재를 다 모아서 줄 세우면 소림 담장을 두 바퀴 두르고도 세 놈쯤은 당과 사러 보낼 수 있다. 천재?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주둥아리를 털어, 털기를."
남궁도위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청명의 검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별것도 아닌 게 건방지게 우리 애들을 무시……. 아니, 아니지. 진금룡이랑 이송백은 우리 애들이 아니니까. 어쨌든 걔들을 무시해? 우리 동룡이가 여기저기 맞고 다니니까 만만해 보여? 너 같은 건 동룡이가 후려 까면 숨도 못 쉬어. 확 마!"
비무대 아래에서 청명의 말을 들은 백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맞고 다닌 적 없어, 이 새끼야!'
그리고 동룡이라 하지 말라고! 남들도 다 듣잖아, 이 망할 놈아!
"이야, 들으셨어요? 쟤가 사숙을 생각해 주네요."
"걸아."
"예, 사숙."
"주둥아리 닫아라. 뒈지는 수가 있다."
"……네."
백천이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근데 은근히 또 기분이 괜찮기도 하고.'
저 남궁도위가 천재라고 그리 치켜세워 주더니. 아무래도 청명의 입장에서 천재라는 건 그리 큰 칭찬이 아닌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백천을 자극하기 위한 말이었거나.
'하여튼 볼수록 알 수 없는 놈이라니까.'
이리저리 청명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바닥에서 낑낑대는 남궁도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백천이었다.
"끄으……."
남궁도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핏발이 선 눈으로 살기를 가득 담아 청명을 노려보았다.
"이…… 이…… 개 같은 놈이!"
끝내 험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맞아서 쓰러진 것은 참을 수 있다.
겨루다 보면 상대의 검을 허용하는 일이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법이고, 검수라면 응당 이를 감수해야 하니까. 설사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목이 잘린다 해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뒹굴게 만든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지 않는 이상 소문이 퍼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이건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그에게 있어 평생 잊히지 않는 치욕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노화가 치솟다 못해 머리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남궁도위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청명이 낄낄 웃어 댔다.
"화났네?"
"이……. 이 개 같은 놈!"
"낄낄낄낄."
청명은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주둥아리는 함부로 놀리는 게 아니지."
"입 닥쳐!"
"재능이고 뭐고 그건 제대로 갈고 닦았을 때 얘기지. 너는 사숙은커녕 금룡이도 못 이겨. 그런 주제에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선 뭐가 어쩌고 저째?"
청명이 검을 까딱였다.
"와 봐. 그 어깨 예쁘게 내려앉혀 줄 테니까."
"이……."
남궁도위가 핏발이 선 눈으로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청명이 검을 좌우로 크게 흔들며 그를 세웠다.
"아. 잠깐, 잠깐."
"……."
"거, 흥분 좀 가라앉히고 덤비지? 나중에 개처럼 처맞고 나서 흥분해서 졌다고 변명하지 말고."
이를 뿌드득 갈아붙인 남궁도위는 이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마에서 김이 날 만큼 화가 솟구쳤지만, 청명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다. 흥분한 채 적에게 달려드는 것은 검수에게 있어 가장 금기시되는 사항 아니던가?
"후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남궁도위가 이윽고 안정된 자세로 검을 늘어뜨렸다.
"……내게 냉정을 되찾을 시간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철저하게 무너뜨려 주마!"
그 살기 어린 위협에도 청명은 그저 피식 웃었다.
"보통은 대가리 한 번씩 깨지면 정신을 차리던데, 너는 웬만해서는 안 되겠다. 하기야…… 그러고 보니 너희 집안은 원래 그랬지."
그거…… 누구였지.
아, 그래. 검왕 남궁천명(南宮天明).
그 새끼가 딱 저런 성격이었지. 오만하기 짝이 없고, 사람을 발아래로 깔아뭉개는.
"대대로 나한테 처맞으면 좀 억울할 텐데."
"뭐?"
"아냐. 너한테 할 말은 아니다."
이젠 죽고 없을 남궁천명에게 할 말이지.
청명이 심드렁하게 손을 내젓자 남궁도위가 눈에 살기를 띠고 청명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검을 뽑아라."
"어디서 명령조야. 모가지 확 뽑아 버릴라."
청명이 검집째 검을 흔들었다.
"뽑게 해 보시든가."
남궁도위는 더 이상 청명과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저 망나니 같은 놈과 말을 섞어 본들 득 될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남궁의 검이 뭔지 똑바로 보여 주마!"
파아아앙!
남궁도위의 검이 어마어마한 검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백색으로 빛나는 검기는 순식간에 마치 검을 삼켜 버린 것처럼 불어났다.
쿵!
그는 검을 늘어뜨린 채, 앞으로 한 발 전진했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세가 청명을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저, 저건!"
단상 위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장문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제왕검형(帝王劍形)!"
"벌써 제왕검형을 익혔다는 말인가?"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검은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과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다.
하지만 남궁세가 최고의 검법을 논하면 누구나 첫손에 꼽는 검이 바로 이 제왕검형이다.
그토록 가장 강한 검이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검이 되지 못한 이유는 이것이 오로지 남궁세가의 직계에게만 전수되기 때문이다.
워낙 난해하고 막대한 내력이 필요한 검법.
철검십이식과 창궁무애검법을 대성하기 전에는 입문조차 할 수 없다는 제왕검형이 지금 남궁도위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뿜어진다.
제왕검형은 말 그대로 제왕의 검.
검이 뿜어내는 기세와 압력으로 상대를 굴종시키는 검이다. 극의(極意)에 달하면 기세만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 의형살인(意形殺人)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소문이 과언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남궁도위가 뿜어내는 기세는 과연 어마어마했다.
지켜보던 관중들이 그 기세에 눌려 분분히 뒤로 물러나고 화산의 제자들마저 기운을 끌어 올려 대항해야 할 정도다.
쿵!
남궁도위가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배로 불어난 기세가 청명의 전신을 짓눌렀다.
자신의 몸을 눌러 오는 압력에,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요즘 애새끼들은!"
그러더니 검을 움켜잡고 남궁도위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남궁도위는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다가온다고?'
이 기세를 전신으로 받아 내며 접근한다고? 그것도 저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남궁도위가 이를 악물며 한 걸음을 더 전진한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 역시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청명은 기세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그를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내가 네 할애……. 아니, 그 여하튼 네 조상 중 하나를 대신해서 가르침을 내려 줄 테니 달게 받아라."
"뭐, 뭣?"
"기본! 이 새끼야! 기본!"
청명의 검이 검집째 내리쳐졌다.
남궁도위는 비웃음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멍청한 놈이 또 같은 수를! 이번에는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궁도위의 생각과는 달리, 청명의 검은 정직하게 그저 그의 검을 내리칠 뿐이었다.
그리고 두 검이 맞부딪친 순간 일어난 일도 남궁도위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콰아아앙!
또각!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남궁도위는 자신의 검에 맞대어진 청명의 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슬쩍 돌려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덜렁.
손목이 힘을 잃고 축 처져 있었다.
'……저거 왜 저래?'
어…….
저게, 어…….
저게 저러면 안 되는데?
그거 한 번 받았다고 저게 부러지면 말이 안 되는데. 저게…….
"요즘 애새끼들은!"
쾅!
청명이 사정없이 검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겉멋만 들어서!"
쾅!
다시 한번.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쾅!
"어디 하체도 덜 만든 놈이 제왕검형질이야!"
쾅!
"끄르르륵."
남궁도위가 결국 신음을 내며 휘청였다.
부러진 손목으로는 청명의 검을 제대로 막아 낼 수 없었다. 덕분에 청명의 검이 벌써 네 번이나 그의 어깨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어깨에 힘 안 빼? 확 뽑아 줘?!"
청명이 두 눈을 부라린다.
그 순간 그들의 귀에 커다란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왔다.
"도위! 대체 뭐 하는 것이냐!"
단상위에 올라 있던 남궁황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친 것이었다.
그 고함을 들은 남궁도위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빠르게 양손으로 검을 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검기가 그의 검을 감싼다. 동시에 가공할 기세가…….
퍼억!
"……."
남궁도위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자신의 발목에 틀어박힌 청명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가 어른이 말을 하는데 칼을 휘둘러?"
저기…….
여기 비무대 위거든요?
여기서 칼을 안 휘두르면 대체 어디서…….
"요즘 것들은 아주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
청명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검을 꽉 움켜잡았다.
"어차피 네 머리로는 말해 봐야 이해 못 할 테니. 그냥 몸으로 처맞으면 된다. 그럼 이해가 가!"
아래에 있던 백천이 그 광경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 역시 과거에 분명 저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나서는?
"간다!"
청명이 남궁도위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도위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기세로 상대를 압박하지 못하는 제왕검형은 철검십이식만도 못한 반쪽짜리 검일 뿐이었다.
"하체!"
따아아악!
청명의 검이 남궁도위의 허벅지를 후려친다.
"끅!"
남궁도위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체! 하체! 하체! 하체!"
따악! 따아악! 딱! 따악!
"이 새끼야! 네 번을 치는데 한 번을 못 막아? 머리는 안휘에 두고 왔냐?"
쏟아지는 고통과 막말에 남궁도위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뭐, 뭔 속도가…….'
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대체 이걸 어떻게 막으란 말인가?
"이게 감히 물러나? 누가 보낸 준대?"
청명이 으르렁거리며 남궁도위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옆구리! 어깨! 발목! 뭐가 이렇게 많이 비어! 다시 손목!"
옆구리와 어깨에 이 검을 허용한 남궁도위가 빠르게 뒤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청명의 검은 물러나는 그의 손목을 신속 정확하게 후려쳤다.
패애앵!
남궁도위의 창궁검이 팽그르르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남궁도위의 몸이 무방비로 청명에게 노출되었다.
벌떡!
화산의 모든 제자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그들의 뇌리에 훤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백천이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대가……."
호쾌한 기합소리가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쾅! 쾅! 쾅! 쾅! 쾅!
남궁도위의 머리로 청명의 검집이 다섯 차례 거세게 쏟아졌다.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움찔움찔 경련하던 남궁도위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아, 맞다!"
쾅!
그렇게 의식을 잃어 가는 남궁도위의 머리에 또 한 번의 일격이 떨어졌다.
"이거 다섯 번 말하고 여섯 번 때리는 게 정석이거든."
'……왜?'
청명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남궁도위는 깊은 의문과 함께 의식을 놓았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남궁도위를 바라보던 청명이 혀를 쯧쯧 차더니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 어깨 내려앉혀 주기로 했는데!"
이 대가리 집착증 좀 버려야 하는데.
에이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