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1)
"서른둘……."
법정이 묘한 얼굴로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무척 다른 결과가 나와 버렸군."
그 말에 곁에 있던 소림의 장로 법계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무당이 크게 힘을 쓰지 못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무당의 무학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무학. 아직 어린 후기지수들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한계가 있겠지요."
"으음."
무당과 소림이 가진 무학의 공통된 특징은, 익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 위력이 배가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아직 수련 기간이 길지 않은 이립 이하의 나이에서는 타 문파에 비해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남궁과 팽가 역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당금 강호를 이끌어 나갈 문파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이들 아닙니까?"
"그렇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당금의 정파를 이끌어 가는 두 축이다.
하나, 같은 이름으로 엮인다고 해서 그 안에 속해 있는 이들의 세가 다 비슷한 것은 아니다.
구파는 소림과 무당을 중심으로 종남과 개방이 그 뒤를 따르는 형세에 가깝고, 오대세가는 남궁세가와 팽가를 중심으로 당가가 그 뒤를 받치는 형세다.
처음 이 대회를 시작할 때부터 이들이 선전할 것은 이미 예상을 했다.
문제는…….
"종남이 무너지면서 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렸습니다. 삼십이강에 남은 구파일방의 제자가 열을 겨우 넘습니다."
"음."
법정이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보통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천하의 명문으로 엮어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리 가깝지 않다.
피로 이어지는 가문과 뜻으로 이어지는 문파는 그 개념부터가 다르다. 결국 크고 작은 부분에서 일일이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림에서 주최한 비무대회에서 구파일방이 오대세가에 비해서 약세를 보인다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구파와 오대세가의 제자들이 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구파도 오대세가도 아닌 이들이 넷이나……."
말을 하던 법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남은 이들 중 구파일방도 아니고 오대세가도 아닌 곳은 단 하나밖에 없다.
"화산의 활약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삼십이강에 남은 화산의 제자는 모두 넷이다.
넷이라고 하면 작은 숫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삼십이강에 네 명의 제자를 남긴 문파는 화산이 유일했다. 천하의 소림조차도 겨우 셋을 남겼을 뿐이다.
"그들에게 원래 배정된 배첩이 무엇이었더냐?"
"은첩이었습니다. 하나 항의를 받은 혜방이 임의로 그들에게 금첩을 내어 주었다고 합니다."
법정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혜방이 아니었으면 큰 망신을 당할 뻔했구나."
만약 화산이 은첩을 든 채 소림으로 와 이런 성적을 냈다면, 천하동도들은 화산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한 소림을 두고 손가락질했을 게 분명하다.
화산보다 못한 주제에 자신들은 백금첩을 가지고 화산에 은첩을 주었다는 비웃음이 쏟아졌겠지.
그 망신을 피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 법정이었다.
"다행스럽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억울하지요.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화산이 이토록 활약할 것이라 생각한 이가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구나."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특히나 그 청명이라는 아이는 보면 볼수록 놀랍더구나. 어쩌면 혜연이가 고전할 수도 있겠어."
"그 정도입니까? 물론 대단하기는 했지만, 제 눈에는 혜연에게 견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네가 본 것이 다가 아니다."
법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본 것조차 다가 아닐지 모르지.'
재미있는 일이다.
그의 반도 살지 않은 아이를 보면서 그 깊이를 모두 들여다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혜연이 너무 맑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냇물이라면, 그 청명이라는 아이는 너무도 깊어서 감히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는 못과 같았다.
"하늘은 때로 가없이 냉정하지만, 그 냉정함의 끝에는 필시 온기를 내려주시기 마련이지. 그 아이가 화산에 나타난 것이 하늘의 뜻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정이 살짝 도호를 외웠다.
- 의기를 믿고, 협의를 실천하고 자신을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분이 이곳에 있습니까?
문득 머리속을 스쳐 가는 종남 장문인의 목소리에, 법정의 몸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모를 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이 강호일진대.
외면하고자 했다. 돌아보지 않고자 했다.
그러나 화산은 끝끝내 자신의 힘으로 돌아와 그들의 앞에 다시 섰다. 진정으로 의기를 쫓는 이들은 고난을 겪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듯 말이다.
때문에 법정은 화산의 제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바늘에 찔리는 듯 껄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아미타불."
낮은 불호로 잡념을 날려 버린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대회도 이제는 끝이 보이는구나.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아 가는 화합의 장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더 잘 알게 되기는 했을 겁니다. 특히나 화산은 이제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 문파가 될 겁니다."
"흐음."
"특히나 그 청명이라는 아이이가 결승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구파일방의 명예는 바닥을 치겠지요. 물론 그 와중에 오대세가들도 얼굴을 붉혀야겠지만."
"그렇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법계가 슬쩍 법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희도 과거의 결정을 되돌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법정이 다시 불호를 외웠다.
법계가 말하는 과거의 결정이란 화산을 구파일방에서 쫓아낸 일을 뜻함이다.
"하나, 후기지수들만의 비무로 그만한 일을 정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그래. 네 말이 무슨 의미인 줄은 안다. 결국은 그리될 일이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일 테지."
"그렇습니다, 방장."
화산의 구파일방 복귀.
이건 작게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강호의 세력판도를 온통 뒤흔들어 버리는 커다란 사건이 될지 모른다.
"그게 순리라면 그리 가야겠지."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쨋든 지금은 조금 더 지켜보자꾸나. 비무대회가 끝나고 논의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예, 방장."
"아미타불."
법정이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법계는 잠깐 망설이다 자리를 비우는 대신 슬며시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은 부럽습니다."
"음?"
"아마 지금 화산은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을 느끼고 있겠지요. 그리 생각하니 좀 배가 아프기도 하고."
그 솔직한 말에 법정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노력의 보답을 받는 게지. 그저 축하하자꾸나."
"예, 방장."
***
"그러니……."
현종의 입에서 살짝 막힌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삼십이강에 네 명의 제자를 올린 쾌거를 선조들도……."
"으르르……."
"다들 기뻐하실……."
"으르르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망연한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거의 초상집에 온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문제의 원흉이 있는 곳으로.
구성에서 백천 무리에게 사지를 붙들린 청명이 성난 사냥개처럼 으르렁대고 있다.
'저건 또 왜 저러고 있나.'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날 좋은 말을 해봐야 제자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숱한 격려의 말에도 화산의 제자들은 마치 성난 부모가 뒤에서 기다리는 학동들 같은 표정으로 영혼 빠진 눈빛을 보일 뿐이다.
"어……. 흐흠."
현종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나는 일단 장로들과 몇 가지 좀 논의하고 돌아올 테니 너희는 쉬도……."
"자, 장문인!"
"장문인 어디 가십니까! 저희도 데리고 가십시오!"
"저희만 놓고 가지 마십시오! 장문인!"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제자들에게서 돌연 절박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현종은 슬쩍 고개를 들리며 제자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물론 지금 이 아이들을 지켜 주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결국 저 화산광견 놈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차라리 후다닥 처리를 해 버리는 게 더 옳은 길일지도 모른다.
"그, 그럼 나는 이만."
현종이 종종걸음으로 이 층으로 향하자 화산의 제자들이 절규를 토해 냈따.
"장문이이이이인!"
"장문인 어디 가십니까! 현상 장로님! 운검 사숙조오오오!"
"저희만 두고 가지 마십시오! 저희도 데리고……! 제발!"
하지만 현종은 그들의 절규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
남겨진 화산의 제자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이제 악귀를 마주할 시간이었다.
"……쾌거?"
세상에 존재하는 심통과 삐딱함을 모조리 쑤셔 넣은 듯한 목소리가 마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쾌거어어어어?"
청명이 몸을 뒤틀었다. 그의 양팔을 붙들고 있던 유이설과 윤종이 어번에는 순순히 놓아주었다.
"금이야 옥이야, 불면 뒈질세라 가르쳐 놨더니 싸그리 다 떨어졌잖아. 그런데 쾌거어어어어?"
그의 눈이 까뒤집히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백천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좀 해 주십쇼, 사형!'
'저거 보십쇼, 저거! 눈 돌아가잖습니까!'
그 간절한 시선을 받은 백천이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청명아. 물론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제일 많이 남았지 않느냐. 이건 축하할……."
"사숙."
"응?"
"누가 들으면 사숙은 올라간 줄 알겠다?"
"……."
"거 은근슬쩍 여기 있지 말고 저기 탈락자들 모여 있는 곳으로 가. 같은 공기 마시면 패배 옮으니까."
"……."
백천이 힘없이 터덜터덜 탈락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더니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사형?"
"……뭐?"
"……아닙니다."
그의 처연한 눈을 본 이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삼켰다.
'가엽게도.'
'저 새끼 인생에는 왜 예외라는 게 없냐.'
하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청명은 까뒤집은 눈을 풀지 않았다.
"이것들이 다 빠져 가지고, 구파일방에 져? 내가 승질이 뻗쳐서 살 수가 없어! 승질이 뻗쳐서! 질 데가 없어서 저 구파 새끼들한테 진단 말이야? 손모가지를 다 분질러 버릴라! 전부 딱 갖다 대!"
"저기!"
그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나는 오대세가에 져서 탈락했는데?"
"앉아. 뒈지기 싫으면."
"네."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런데…… 우리도 나름 잘한 것 같은데."
"잘하긴 뭘 잘해!"
"그래도 종남놈들은 짐 싸서 갔는데 우린 이 정도면……."
"크으으. 그건 그렇지."
영영 흉살악귀같이 일그러져 있을 것 같던 청명의 표정이 순식간에 눈 녹듯 풀렸다.
"그 새끼들 봇짐 들고 내려가는 것 봤어? 크으! 그건 정말 평생 못 잊을 광경이었지!"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
"뒤도 안 돌아보더만!"
"그렇지, 그렇지! 못 돌아본 거지!"
사형제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라도 기분을 풀어 놔야 한 대라도 덜 맞는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살피던 백천도 슬쩍 맞장구를 쳤다.
"완정 초상집이던데?"
"그렇지. 사숙 손모가지도 초상날 뻔했지."
"……."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가만히 있을 걸.
괜히 꺼져 가던 불똥만 다시 튀었다.
"쪽팔리게 대사형이 되어 가지고 서른두 명 안에도 못 들어? 심지어 남들은 다 멀쩡한데 혼자 손모가지 반 날려 먹고? 내가 승질이 뻗쳐서, 내가! 아오!"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백천에게 달려들려 하자 윤종과 조걸이 다급하게 그의 사지를 잡고 늘어졌다.
"청명아, 참아라! 사숙이다! 사숙!"
"부상자잖아! 낫고 나서 패!"
순식간에 영혼까지 털린 백천이 희게 질린 얼굴로 휘청이자 그 옆에 있던 백상이 어깨를 붙들어 주며 빙긋 웃었다.
"사형, 제가 그 기분 이해합니다."
"……이해하지 마, 이 새끼야."
백천은 그저 혼자 울고 싶었다.
청명은 으르렁대며 화산의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이렇게는 안 돼!'
사실 백천 일행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자들은 청명과 함께 수련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심지어 가진 바 재능도 그리 높지 않다. 그런 이들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리라.
그 예로 타 문파에서는 화산의 선전을 도무지 이해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 탈락한 제자들도 이대로만 성장해 간다면 지금 패배한 이들을 발가락으로 후려 깔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청명은 절대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진짜 승질이 뻗쳐서.'
이 결과를 보 면 선계에 있는 사형제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 낄낄낄낄. 너도 가르치는 재능은 없는 모양이구나.
"아아아아아아악! 내가 저 영감탱이를 그냥!"
잠깐 잠잠해지는 듯하다 도로 눈을 까뒤집는 청명을 윤종이 황급히 부여잡았다. 유이설과 조걸도 그를 제압하는 데 죽을힘을 다했다.
"제발 곱게 미치자, 청명아!"
"정신 좀 차려라. 정신 좀!"
청명이 이를 악물고는 자신을 제압한 셋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서른두 명 안에 든 넷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이제 화산에 패배는 없다!"
"……."
"여기 네 명 다 사강에 못 들면 전부 화산까지 기어서 가는 거야! 알았어? 특히 구파한테 지는 사람은 내가 화산까지 굴려서 갈 거니까 어디 한번 져 봐! 어디 한번!"
발악하기 시작한 청명을 보던 백천이 옆에 쪼그리고 앉은 백상에게 슬쩍 물었다.
"쟤 다음 상대가 누구냐?"
"……남궁세가의 남궁도위입니다."
"……뒈졌네."
"그렇겠죠?"
백천은 눈을 감고 진심으로 남궁도위의 명복을 빌었다.
물론 겸사겸사 자신의 명복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