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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00화 (300/1,567)

300화. 네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5)

종남의 제자들이 떨리는 눈으로 비무대를 바라본다.

'저토록 강했나?'

이미 청명의 위력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진금룡조차도 그에게는 제대로 생채기 하나 내 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비무대 위에서 청명이 보여 준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또 달랐다.

차마 오를 엄두도 나지 않는, 깎아지른 절벽. 구름에 가려 그 정상이 어디인지도 확인할 수 없는, 너무도 높디높은 절벽.

그게 지금 종남의 제자들이 바라보는 청명이었다.

다만…….

"사제……."

"사, 사형."

저기에 있다.

그 엄두도 나지 않는 절벽을 오르고 또 오르고, 다시 오르려 했던 이가.

종남의 제자들은 그런 이송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토록 무시했는데.'

종서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낡아 버린 것에만 집착한다고 비웃었었다.

한때는 종남의 기재로 인정받던 이가 제 편한 것만 찾다가 바닥까지 추락해 버렸다고 혀를 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송백은 멸시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승자는 화산의 청명이오!"

마침내 선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살짝 당혹한 기색이 어린 그 목소리는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다.

종남, 화산, 심지어 관중들마저도 그저 입을 다물고 비무대의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읏차."

청명이 의식을 잃은 이송백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종남의 진영을 향해 걸어갔다.

저벅. 저벅. 저벅.

점점 다가오는 그를 보며 종남 제자들의 눈빛이 복잡하게 물들어 갔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청명이 입을 열었다.

"뭐 해?"

"……."

"안 받아?"

그제야 종남의 제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 이송백을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더 위중한 상처를 눈으로 확인한 그들이 일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제…….'

종서한은 소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평소였다면 청명에게 불같이 화를 터뜨렸을 것이다.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냐고 그를 비난하고 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종서한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이송백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사제를 안쪽으로! 서둘러!"

"예, 사형!"

사형제들이 조심스레 이송백을 안아 들고 뒤쪽으로 향했다. 종서한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청명을 바라보았다.

진금룡은 의식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장로들이 나설 상황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청명을 맞을 이는 종서한뿐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종서한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내심을 채 다 정리하지 못하여 머뭇거리는데, 청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키워라."

"……."

"그럼."

그 말이 끝이었다. 청명이 더는 할 말 없는 듯 몸을 휙 돌렸다.

종서한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그런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어째서요?"

"응?"

청명이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고개만 슬쩍 뒤로 돌려 종서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리 눈이 낮다 해도 그쪽이 사제에게 가르침을 내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어째서요?"

그의 물음에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는 잠깐 말이 없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단순한 변덕이라고 해 두지."

그리고 이내 휘적휘적 화산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실린 종남 제자들의 눈빛이 그의 등으로 꽂혔다.

증오, 분노, 적의, 그리고 동경까지.

나아가…….

'두려움인가.'

사형제들의 시선에 청명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 버린 종서한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마 저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종남은 다시는 화산을 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화산이 감내했던 그 길고 긴 겨울이 이제는 종남에 찾아올 것이다.

종서한은 망연히 뒤를 바라보았다.

사형제들과 장로들이 이송백에게 달려들어 지혈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서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송백이 아니라 그 옆쪽에 누워 있는 진금룡이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진금룡.

하지만 종서한은 진금룡의 주먹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형…….'

종서한 역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미타불. 훌륭합니다."

법정이 가만히 합장했다.

"종남의 이송백이라는 아이가 보여 준 모습이 더없이 인상적입니다."

"문파의 아이들이 저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진정한 무인의 모습인지."

허도진인이 종리곡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종남에 이토록 훌륭한 인재가 있으니, 미래가 밝다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더없이 훈훈한 분위기였다.

"미래요?"

하나, 종리곡이 입을 연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차가운 목소리.

듣기만 해도 섬뜩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패자에게 무슨 미래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장문인?"

종리곡이 얼음장 같은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여러 장문인들께서 이리 좋은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저 아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 아이가 강했다면 이 덕담의 절반도 나오지 않았겠지요."

법정이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종남 장문인께서는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기분은 이해하오나……."

"이해한다 하셨습니까?"

하지만 그의 말허리를 뚝 끊어 먹은 종리곡은 피식 웃었다.

"글쎄요. 과연 소림의 방장께서 제 기분을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닌 말로 다들 지금 내심으로는 화산 청명의 실력을 가늠하고 계시잖습니까."

"장문인. 어찌 이곳이 실력만을 겨루는 자리겠소. 의기라는 것은 단순히……."

"의기?"

종리곡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걸렸다.

"강호에 의기가 사라진 지는 이미 백 년이 지났소이다. 의기를 믿고 협의를 실천하며 자신을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분이 이곳에 있습니까?"

"……."

장문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이 가장 꺼려하던 이야기가 하필이면 종남 장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중요한 건 실력입니다. 의기 따위가 아니라. 패배한 개는 입을 다물고 꼬리를 말아 주는 게 예의겠지요."

싸늘하게 씹어뱉듯 말한 종리곡은 이윽고 고개를 획 돌려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적의를 넘어 살기까지 담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화산 장문인. 화산은 곧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군요. 이웃으로서, 수많은 역사를 함께해 온 악우(惡友)로서 화산의 약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종리곡이 모두를 힐끗 보고는 깊게 포권 했다.

"본인의 수양이 얕아 여러 장문인들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하나, 이제 비무대회에 단 하나의 제자도 남기지 못한 문파의 수장으로서 이 자리에 뻔뻔히 앉아 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비무대회가 훌륭히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가기 시작했다.

"자, 장문인!"

"저…… 저런!"

타 문파의 장문인들이 당황하여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종리곡은 단상을 내려가며 현종의 앞을 지나칠 때 싸늘한 목소리를 남겼다.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물론이외다."

"……."

무시무시한 눈으로 현종을 노려본 그는 감정 없는 얼굴로 단상을 내려갔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버려 두십시다. 저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분이 여기에 있소이까?"

허도진인의 말에 장문인들이 입을 닫았다.

하기야 그들이 저 입장이었어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모든 제자가 탈락한 상황에서 화산 제자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낸다?

그건 종남의 장문인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이내 장문인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현종에게로 향했다.

현종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끄응. 끝까지 상황을 이리 만들어 놓고 가는군.'

안 그래도 화산을 주시하고 있던 장문인들이다. 그런데 종리곡이 저리 악담을 해 대고 가 버렸으니 그를 향한 시선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크흠."

"으으음."

모두의 시선에는 미묘한 불편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현종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경계가 된다는 뜻이겠지.'

천하의 명문들도 이제는 화산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바로 저 청명이 보여 준 모습 때문에.

현종의 시야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청명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여하튼 저 알 수 없는 놈.'

평소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자리에서 이탈하고, 남은 수명이 삽시간에 줄어들게끔 심장까지 빨리 뛴다. 그만큼 사고뭉치인 놈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한 번씩 꼭 저런 모습을 보여 준다.

현종은 청명이 보여 준 도(道)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짝 눈을 감았다.

'네 뜻을 행해 보거라.'

그 길을 보좌하는 게 현종이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청명뿐 아니라 저기에 있는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걷는 길을 현종이 닦아 주고, 또 뒤에서 밀어주어야 한다.

"무량수불."

짧게 도호를 왼 현종이 더없이 따뜻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털썩 앉는 청명을 백천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명이 퉁명스레 물었다.

"왜?"

"아니, 뭐……."

백천은 잠깐 말끝을 흐리며 빤히 청명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도무지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뭐가?"

백천이 뭔가 주저하는 듯하자 조걸이 그 말을 대신 받았다.

"너 종남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어, 싫어.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종남으로 뛰어가서 전각에다 기름 붓고 불 질러 버리고 싶어. 내친김에 무림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을 모조리 찾아가서, 역사서에서 종남 이름 죄다 지우라고 칼부림이라도 하고 싶고."

"……너 진짜 사람 맞냐?"

"뭐가? 왜?"

"……아니, 아무것도."

말을 꺼낸 조걸은 당황하여 움찔했다.

"그럼 왜 저 이송백에게는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냐?"

"호오?"

청명이 피식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청명과 해 온 가락이 있어서인지 그가 이송백에게 나름의 가르침을 주었다는 사실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운남으로 다녀오는 내내 비슷하게 두들겨 맞았으니 모를 수가 없겠지.

"종남을 망하게 하려면 저 이송백이라는 놈을 가르치면 안 되는 거잖아."

"뭐…… 그것도 그렇지."

백천이 살짝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내 형을 가르쳤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이송백은……."

그러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능성이라기에는 너무도 미약하다.

하지만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다. 언젠가는 무너졌던 종남이 저 이송백 때문에 다시 재건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종남이 무너졌다고 하는 것도 웃긴 이야기지만.

"으음."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살짝 뺨을 긁적였다.

"나답지 않기는 했지."

"그래, 너답지가 않다."

"나는 네가 종남 애들 팔다리를 모조리 부러뜨려서 불구로 만들 줄 알았다."

"나는 처음에 대가리 깼을 때 죽인 줄 알았어."

"……."

청명의 눈이 떨떠름해졌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어째…… 진심 같다.

"내가 그렇게까지 한다고?"

"그 정도면 많이 착해진 거지."

"남 눈이 있으니까 그 정도만 할 거라 예상한 거지. 남 눈 없었으면 뭔 일이 벌어졌을지……. 어휴, 끔찍해."

"……."

청명은 살짝 서글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식새끼 키워 봐야 아무 소용없다더니.'

이놈들이 이럽니다, 장문사형!

- 잘 알고 있구만.

"에라! 썩을!"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다시 털썩 앉았다.

하지만 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걸이 재차 물었다.

"그래서 왜 그런 거야?"

"사형, 사숙들 대가리 깨지라고."

"농담하지 말고."

"진짜야."

"……응?"

백천이 슬쩍 청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이 얼굴은 농담인 척 진담을 할 때의 얼굴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종남은 망할 거야."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패배감이라는 건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건 냉정하기 짝이 없지. 오를 때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지만, 떨어질 때는 바닥이 없는 법이야. 종남은 처절하게 망할 거야."

"으음."

백천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저 강성한 종남이 망한다는 건 쉽게 상상이 안 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청명이 말한 대로 되어 왔다.

'우선 예전의 종남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 자신감 넘치고 여유롭던 이들이 뭔가에 쫓기는 이들처럼 조급하게 굴고 있었다. 사라진 자신감을 다시 회복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화산은 더없이 강성해지겠지. 구르는 만큼 세질 테니까. 아마 앞으로 더 어마어마하게 세지지 않을까?"

"……내가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저기도 지옥이고 여기도 지옥이라는 건가?"

어마어마하게 굴리겠단 말을 저렇게 하네……?

청명과 얽힌 이상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는 걸 실감하는 화산 제자들이었다.

잠깐 씩 웃은 청명은 이내 다시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까?"

"……응?"

"말했잖아. 강하면 쇠하고, 쇠한 것은 언젠가 다시 강해진다. 화산의 강함도 영원하지는 않아."

"우리가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가 다 죽고 나면? 그때는 누가 화산을 이끌어 가는데?"

"……."

청명이 고개를 내젓는다.

"등 뒤에 칼이 겨눠지면 노력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자신을 노리는 이 없이 내내 풍족하기만 한 이들은 나태해질 수밖에 없어. 지금의 소림을 만든 것은 어찌 보면 무당이 팔 할이지."

"으음."

백천은 청명의 말을 이해했다.

"종남이 화산의 등 뒤를 노리는 칼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거냐?"

"그래야지."

"……그러다가 화산이 종남의 손에 망하기라도 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백천의 눈이 떨렸다.

어쩔 수 없다고?

그때 청명이 답지 않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아가지 못하고 머무르다 나태해진 화산이라면 차라리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게 나아. 의식할 상대가 없는 무인은 결국은 자신만의 세상에 갇히게 되지. 종남이 완전히 폭삭 망하는 게 화산에 꼭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야."

"으음."

"그리고……."

"응?"

청명이 씨익 웃었다.

"화끈하게 망해 버리는 것 보다는 적당한 희망을 부여잡고 서서히 몰락하는 게 백배는 힘들거든."

"……."

"화산이 겪은 걸 저놈들도 똑같이 겪어봐야지! 어디 고작 이 년 고생하고 힘든 척이야, 뒈지려고! 앞으로 백 년은 더 바닥에 처굴러야지! 그때까지는 절대 못 망해! 내가 그렇게 안 해 줘!"

눈을 희번덕대며 낄낄 웃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제야 그가 아는 청명 같아서 속이 개운해진 백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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