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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98화 (298/1,567)

298화. 네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3)

비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며 이송백이 낮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계단이다.

하지만 이 계단 위에 청명이 기다리고 있다면, 더 이상 별거 아닌 계단일 수 없다.

'계단은 합리적이지.'

오르면 위로 갈 수 있다. 조금의 힘겨움을 소모하는 대신 확실한 상승을 바랄 수 있다.

하지만 그 명확하기 짝이 없는 계단과는 달리, 무학은 노력에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지급해 주지 않는다.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고 해도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은 더욱 흐려지기만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어쩌면 이송백은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있으니까.

그가 가고 있는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확인해 줄 상대가.

저벅. 저벅. 저벅.

굳건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비무대에 선 이송백은 건너편에 선 사내를 응시했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긴장감 없는 얼굴.

길게 자라난 머리를 질끈 묶어 올렸지만, 그마저도 잔뜩 헝클어져 얼굴에 흘러내렸다. 거기에 표정은 정말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봐도 고수로는 보이지 않는 풍모.

하지만 이송백은 알고 있다.

눈앞에 서 있는 이자가, 진금룡이나 백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자임을 말이다.

"다시 뵙소, 화산신룡."

"……그냥 청명이라고 불러."

"그럼 그러겠소이다. 청명 도장."

이송백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참 이상한 사람이지.'

청명을 처음 봤을 때, 그에게는 명성이랄 게 존재하지 않았다. 화산은 무관심 속에 망해 가는 문파였고, 청명은 그 다 무너진 문파의 막내 제자였을 뿐이다.

그때와 지금은 천지가 개벽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달라졌다.

지금의 청명은 천하에 폭풍을 몰고 온 화산파 후기지수 중 최고수이고, 나아가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웃어?"

"아, 아니오."

이송백이 황급히 자신의 입가를 주물렀다.

"청명 도장이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서."

청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왜 웃기지?"

"그건 나도 모르겠소. 여하튼 재미있구려."

"……뭐, 맘대로 생각해."

청명 역시 피식 웃어 버렸다.

'달라지지 않는 게 당연하지, 이것들아.'

청명이 정말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쯤 어깨가 화산만큼 승천해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산전수전은 물론 수중전과 공중전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겪은 애늙은이다.

그런 인간이 후기지수로 인정 좀 받는다고 내내 어깨에 힘이 들어갈 리가 있겠는가? 되레 자괴감이 들 지경인데.

슬쩍 고개를 든 청명이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이송백의 표정이 나름 담담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 종남 망한 것 같던데?"

"……."

"그것도 폭삭?"

"……."

대뜸 날아드는 깐죽거림에 이송백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저 입은 정말이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상처를 후벼 파다 못해 벌려서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에이. 희망 없는 것 같던데? 거기서 희망 찾을 수 있으면 거지 굴 안에서도 황금이 나는 거지. 하긴, 그래. 혹시 알아? 거지 굴도 잘 파 보면 금맥이 나올지?"

어찌 저리도 훌륭히 빈정댄단 말인가.

이송백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말을 말아야지.'

이 사람과는 말을 섞으면 안 된다. 예전에도 교훈을 얻었었던 것 같은데, 왜 또 휘말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때 화산으로 옮겨 와 볼 생각 있어?"

"예?"

이송백이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치켜떴다. 솔깃해서가 아니라 너무 놀라서 나온 반응이었다.

"저는 종남의 제자입니다."

"알아."

청명이 귀를 후비적대더니 입으로 훅 불었다.

"그런데 그게 뭐? 거 종남에서 배운 구정물 싹 정리하고 화산의 청정수로 다시 채우는 데 일 년이면 돼. 음……. 아니다. 너는 반년이면 되겠다."

"……."

"망한 문파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잘나가는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아?"

이송백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불과 삼 년 전이었다면, 저 말을 종남이 청명에게 했을 수도 있다. 그때 종남에서 청명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청명이 이송백에게 하고 있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자면 그 제안이 조금 기쁘기는 한데."

"……한데?"

"거절하겠습니다."

"호오?"

그 단호한 대답에 청명이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저는 종남의 제자기 때문이죠."

"……."

이송백이 천천히 검을 뽑는다.

"당신이 몰락한 화산을 버리지 않았듯이, 저도 제 사문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 타서 재만 남았는데도?"

"그럼……."

그의 담담한 대답이 이어졌다.

"제가 다시 불씨가 되어 불을 일으키면 되겠죠."

이송백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건 강함과 약함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길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는 검수만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다.

청명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호오."

청명이 가면 갈수록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 맨 검을 끌렀다.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검집째 들어 올렸다.

"그럼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청명이 검을 겨누자 이송백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검을 뽑지 않으실 겁니까?"

"필요하면 뽑을 거야."

이송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실하게 청명과 자신의 실력 차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검을 뽑으라 요구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

'흔들리지 말자.'

그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다.

이송백이 살짝 심호흡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 모든 것을 여기다 쏟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두 눈에 의지를 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아! 오십시……."

"뭐래?"

"응?"

그 순간 청명이 이송백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이송백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

순간적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철푸덕.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굳은 이송백이 앞으로 쓰러졌다.

"어디 허세를 부려."

그런 그의 앞에, 청명이 씨익 웃으며 쪼그려 앉았다.

비무대 아래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백천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죽었네."

"죽었겠지?"

"에이. 저 정도면 죽어야지."

그 옆에서 비무를 지켜보던 화산 제자들이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저 새끼 종남의 씨앗이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았어요?"

"씨앗을 한데 모아서 불 질러 버릴 셈인가 본데?"

"아주 청명이답네요. 희망을 만들어 주고는 희망째 목을 잘라 버릴 모양이네. 역시나 사람이면 못 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댄다니까. 대단해. 아주 존경하게 돼."

하지만 비무대 아래에서 무슨 감상이 오고 가건 청명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청명은 앞으로 엎어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송백의 어깨를 검집으로 콕콕 찔렀다.

"죽었어?"

"……."

"안 죽은 것 같은데?"

"……."

"에이. 일어나야지. 이 정도로 쓰러지면 안 되지. 종남 되살린다면서? 한 방에 뻗는 놈이 무슨 종남을 살려. 빨리 일어나 봐."

"……."

백천을 비롯한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다시 빙그레 웃었다.

"아수라가 따로 없군. 쓰러진 상대를 굳이 일으켜 세워 다시 패겠다는 거네."

"훌륭해, 훌륭해. 저 정도면 지옥에 떨어져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염왕이 형님으로 모시겠군."

"사숙,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숙이 다음 비무에서 저 꼴이 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자기 전에 형님이 계신 방향으로 두 번 절하고 잔다."

"그건 죽은 사람한테 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

조걸이 입을 떡 벌렸다.

아, 확실히 이 인간도 정상은 아니야.

잠시간 상황을 살펴보던 심판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승부는 화산 청명의 승……."

"자, 잠시만!"

"음?"

청명이 외침에 잠깐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러자 쓰러진 이송백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 으으……."

이송백이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겨우겨우 일어선 그는 잠깐 휘청이더니 다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계속……."

심판을 보던 이가 다가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는가?"

"저, 저는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제가 멍청하게 방심……해서 그렇습니다."

"……과한 기습이었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제가 방심하여……."

이송백이 계속 부인하니 심판도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하게나."

"예!"

심판이 훌쩍 뒤로 물러나자 이송백이 청명을 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서. 저는 괜찮으니 계속……."

주르륵.

이송백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피가 얼굴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다 죽을 것 같은데?"

"괘, 괜찮습니다! 자, 잠시만."

옷을 찢어 머리를 칭칭 감싼 그는 완전히 지혈을 마치고서야 어색한 얼굴로 청명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피 묻은 얼굴을 닦아 내니 나름 몰골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뭔가 애처롭게만 보였다.

관객들도 그런 이송백에게 몰입이 되었는지 하나둘 응원의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힘내라, 이송백!"

"저 마귀 놈을 쓰러뜨려!"

"비겁하게 기습이라니!"

"양심도 없느냐! 양심도!"

그 말을 들은 청명이 귀를 후볐다.

"뭐래."

비무대에서 한눈판 놈이 잘못이지.

여기가 비무대니까 대가리만 깨졌지. 전장이었으면 목이 잘려도 할 말 없는 일이다.

관중들과 달리 이송백은 그 사실을 잘 아는 듯 무척이나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염치없는 일인 걸 알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흐음."

청명이 살짝 볼을 긁었다.

"넌 이미 죽었어."

"……역시나."

이송백이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뭐…… 한 번 죽어도 기회는 있더라."

"……예?"

"아, 뭐. 네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고."

청명이 피식 웃고는 다시 검을 들어 이송백을 겨누었다.

"다시 해보지."

"감사합니다!"

이송백은 이번엔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의지견정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며 검을 들었다.

'나는 한 번 죽었다.'

그의 검은 방어의 검.

그런데 상대의 일격을 막지 못했다.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실수다.

상대가 청명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실수라는 변명은 소용없다.

어쨌든 지금 그의 상대는 청명이니까.

'그러니 무서울 게 없다.'

긴장되었던 육체가 느슨하게 풀려 간다. 피를 흘린 게 오히려 조금 도움이 되는 느낌이다.

터질 것처럼 복잡했던 머릿속이 간명하게 변해 간다.

이송백의 세상이 좀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비무대 위에 선 자신과 청명을 제외한 다른 것들이 흐릿하게 사라져 갔다.

"호오?"

그 가공할 집중력을 본 청명이 입꼬리를 쭉 말아 올렸다.

역시나.

볼 때마다 흥미가 가는 놈이다.

그럼 어디 진짜 확인해 볼까?

네가 과연 이 길을 걸을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청명이 가만히 상단세를 취했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검을 가만히 앞으로 내미는 자세.

모든 검수에게 있어 기본이 되는 자세이자, 화산의 근본. 육합검의 기수식이 되는 자세다.

"네가 완벽을 추구하시겠다?"

"……어렵다는 건 알지만, 그렇소."

"어렵다고?"

청명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래?"

그 순간이었다.

청명이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검을 내려쳤다.

그리고 이송백은 보았다.

그저 한 발을 다가섰을 뿐인데, 청명이 훌쩍 거리를 단번에 좁혀 내는 것을 말이다.

'이게 무슨……?'

이윽고 청명의 검이 이송백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비무대 위에 쌓여 있던 먼지들이 사방으로 밀려 났다. 기파는 이내 충격파가 되어 관중들을 휩쓸었다.

이송백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이게 뭔…….'

단순한 내려치기.

그저 단순한 내려치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이송백의 손은 금방이라도 꺾여 버릴 것처럼 뒤틀렸고, 다리와 허리는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맞닿은 검 사이로 보이는 청명의 눈이 한없이 차게 빛났다.

"철저하게 느껴 보는 게 좋아. 네가 가려는 길이 어떤 것인지."

서늘한 목소리와 압도적인 위압감.

이송백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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