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네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2)
"사수우우우우우우욱!"
"사형! 으하하하하하하! 사형! 사혀어어엉!"
화산의 제자들이 비무대를 내려오는 백천을 덮쳐들었다.
"이겼습니다! 이겼다고요!"
"미친! 진금룡을 이겼어!"
가장 먼저 달려온 백상이 백천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려 댔다
"사형……. 사형! 흐윽……."
백상은 도무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안다.
백천이 진금룡을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스스로를 몰아붙여 왔는지. 이곳에서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백상이었다.
그렇기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울지 마라."
"사형……."
백천이 싱긋 웃었다.
"기분 좋게 이기고 돌아왔는데 왜 우느냐. 축하를 해 줘야지."
"예. 정말…… 정말 축하드립니다, 사형."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상의 뒷머리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고맙다."
손목이 욱신거린다.
긴장이 풀렸는지 잊고 있던 고통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천은 미소 지었다.
'이제 고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영원히 까마득할 것 같던 벽을 마침내 넘어섰다.
백천에게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치료해야 해요."
"그래."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백천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단 것을.
백천이 진금룡을 이겼다.
이건 단순히 두 사람의 승부에 결판이 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청명이 아닌 화산이 마침내 저 종남을 완전하게 뛰어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사형."
"아니다."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다. 너희 덕분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이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
"웃어?"
……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화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돌아갔다.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건 왜 또 열받았냐?'
'이겼잖아. 이겼으면 됐지.'
'불똥 튄다. 물러나! 물러나!'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백천을 바라보았다.
"웃어?"
"……."
"그냥 잘만 싸웠으면 별 피해도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한테 손모가지까지 잘려 놓고는 웃음이 나와? 어?"
백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래도 이정도면 별 피해 없이……."
"피해가 없어어어어? 아이고, 세상에! 손모가지가 덜렁거리는데 피해가 없다네? 피해 좀 있었으면 모가지가 덜렁거렸겠다?"
"……."
백천이 눈빛으로 간절히 도움을 청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사형제들은 모두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이 망할 놈들.'
뭐?
사형제간의 의리?
따뜻한, 뭐?
개뿔이!
조금 전까지 그를 둘러싸고 환호하며 눈물 짓던 사형제들이 다들 못 볼 거라도 본 양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그만큼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을 했는데, 말을 하면 뭐 하나! 내가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지! 소는 듣기라도 하지, 듣기라도!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이런 것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
다친 손보다 귀가 더 욱신거리는 기분이다.
뭐?
잔소리가 길을 이끌어 줘?
백천은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과거의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그가 진심으로 고심하던 때였다.
청명이 잔소리를 멈추고 백천을 빤히 보았다.
"뭐……."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뗐다.
"그래도 나름 잘했어."
"……응?"
"어찌됐건 결과가 중요한 거지. 저 종남파의 칼 귀신을 꺾었으면 잘한 거야."
"……너 뭐 잘못 먹었냐?"
"난 돈 챙기러 간다."
청명이 손을 내젓고는 휘적휘적 걸어 도박판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백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놈이 웬일로…….'
평소였다면 한번 시동을 건 이상 정말 귀에서 피가 나도록 사람을 몰아붙였을 텐데. 여기서 끝낸다고?
"사숙!"
"사형!"
다시 쏟아지는 사형제들의 환호를 받으며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멀어지는 청명의 등에 꽂혀 있었다.
- 잘했어.
망할 놈.
삼 년 만에 드디어 칭찬을 해 주네.
* * *
싸늘하다.
환호가 쏟아지는 아래와는 다르게 장문인들이 모여 있는 단상 위는 쥐 죽은 듯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비무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화산의 백천이 종남의 진금룡을 이겼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장문인들이 입을 닫아 버린 이유는 단순히 그 승패 때문이 아니었다.
'저 검은.'
허도진인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들이 화산의 매화검법을 본 게 이게 처음은 아니다. 이미 과거의 무학을 되찾은 화산파에 축하의 말도 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학을 되찾는다와 무학의 본의를 되찾는다는 분명 다른 말이었다. 지금 백천은 화산이 그저 과거 무학의 껍데기만을 되찾은 게 아니라 그 본의를 되찾았음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천하를 호령했던 화산의 매화검법이 돌아왔다는 뜻이겠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무학을 되찾았다 해서 바로 그 본의를 깨닫고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스승의 존재란 왜 필요한가?
명문을 대표하는 무학이란 당연히 복잡하고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니 천하에 손꼽히는 기재라고 한들 그 무학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그러면 누군가 매화검법을 전수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벌써 수십 년도 전에 실전된 무학을 무슨 수로, 누가 전수한단 말인가?
허도진인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하군.'
무학을 되찾은 것이 확실하다면, 이제 천하의 누구도 화산파를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천하의 세력도 자체가 다시 쓰일지도 모른다.'
크나큰 위기감이 밀려왔다.
이제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던 도가제일검문을 향한 경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허도진인은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장문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그뿐만은 아닌지, 대부분의 장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백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저긴 거의 혼이 빠져 버렸군.'
종남의 장문인 종리곡은 경악한 나머지 아예 입을 못 다물고 있었다.
하기야.
종남의 후기지수 중 최고수로, 훗날 종남 장문인의 자리가 확실시 되던 진금룡이다. 그런 그가 화산신룡도 아닌 화정검에게 패했으니 그 충격과 여파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특히나 화산과 종남은 그 거리의 가까움과 문파간의 관계로 인해 하나가 살면 하나가 죽어야 하는 관계다.
수많은 이들과 명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화산의 제자에게 참패한 것은 종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것이다.
그러니 저리 넋이 나갈 수밖에.
반면 화산 장문 현종은 감격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허도진인이 슬쩍 헛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차라리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거나, 주변에 으스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미워할 수 있을 텐데. 저리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니 악심을 품기도 껄끄러워진다.
'화산. 화산이라……. 대체 어디까지 갈 것이더냐.'
* * *
"예?"
윤종과 조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추, 출전이 안 된다고요?"
윤종이 당황하여 소리치자 현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맥이 완전히 상한 것은 아니지만, 무리를 하면 평생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다음 비무는 포기해야겠구나."
"아니, 그게 뭔……."
조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허, 소리를 내었다.
이제야 진금룡에게 이겼다. 드디어 벽을 깨고 실력이 활짝 피어났는데 대회를 기권해야 하다니.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다."
"그, 그럼 왜……?"
뭐라도 해 달라는 듯 간절하게 묻는 조걸에게 현상은 단호히 잘라내듯 말했다.
"하지만 그 방법 중 후유증이 남지 않는 방법은 없다. 이 대회가 뭐라고 그런 무리를 해야 한단 말이더냐?"
잠깐 뭔가 말하려던 조걸이 입을 닫았다.
현상의 말이 맞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사숙……."
조걸은 걱정 어린 눈으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백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기권하겠습니다."
"사, 사숙!"
조걸과 윤종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백천은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아쉬울 것도 없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내젓고 물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야……."
사질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백천이 그 대답을 대신 해 주었다.
"나는 이곳에 우승하러 온 게 아니다. 화산의 검을 세상에 선보이고 우리가 결코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러 온 것이지. 그러니…… 내 역할은 이걸로 됐다."
"사숙……."
"그 뒷일은 너희가 해 주면 된다."
정말 미련이 없다는 듯 맑게 웃는 백천을 보며, 두 사람은 결국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백천이 예전보다 조금 커 보인다.
"물론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좋은 성적을 노려 봤겠지만, 이리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무리예요."
"응?"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유이설이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매?"
"어차피 부상 안 당했어도 사숙은 여기까지."
생각지 못했던 말에 백천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내 실력이 아직 미진하다는 건가?"
유이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응?"
"다음 비무에서 이기는 사람이 사숙의 다음 상대."
"……."
"그리고."
유이설이 슬쩍 뒤쪽을 가리켰다.
"저게 다음 비무 나갈 사람."
"……."
그녀가 가리킨 건, 좌판 위의 돈을 쓸어담고 있는 청명이었다.
"저거?"
"네. 저거."
"……."
빤히 그를 바라보던 백천이 유이설을 보며 세상 다시없을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미련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러네요."
"어차피 의미 없었네."
아니. 비무대 위에서 '저것'과 마주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탈락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 호오오오? 감히 날 상대하겠다고 칼을 뽑으셨겠다?
자연히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백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깔끔한 게 낫죠."
그때였다.
"뭔 이야기를 그렇게 해?"
"히익!"
윤종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어?'
돈 자루를 든 청명이 서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저기 좌판에서 돈을 담고 있었는데!
"아, 아니. 그냥 다음 비무 너라고."
"아, 그래?"
청명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더니 돈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거 잘 지켜."
"……그래."
"그러니까 내 상대가……."
"이송백이다."
"흐음."
청명은 뭔가 걸린다는 듯 턱을 긁었다.
"종남은 전에 충분히 패 준 것 같은데, 희한하게 자꾸 얽히네. 하기야 이게 화산과 종남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살살 해 주려고?"
"내 사전에 살살은 없다!"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살살 처맞고 싶으면 비무를 나오면 안 되지! 내 앞에서 칼 든 새끼는 일단 뒈지는 거야! 남녀노소 가릴 게 없어!"
불타오르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고맙다, 진금룡.'
저 '남녀노소'에 자신이 포함될 뻔했다는 걸 깨달은 백천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종남의 진영을 아련하게 보았다.
"……사형."
실려 나온 진금룡을 보는 종남 제자들의 얼굴이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진금룡이 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금룡이.
종남이 느끼는 진금룡의 패배는 화산이 느끼는 백천의 승리와는 비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도 진금룡이 종남 후기지수 중 최고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종남의 이대제자 중에서 그는 말 그대로 군계일학과 같은 사람이었다. 경쟁심마저 앗아 갈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종남을 평정해 버렸던 이가 바로 진금룡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그가 청명도 아니라 백천에게 패해 버렸으니, 그 충격이란 슬픔과 분노마저 휘발시켜 버릴 정도였다.
이곳에 모인 종남 제자들 모두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분위기를 느끼며 이송백은 눈을 감아 버렸다.
'끝났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진금룡의 패배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설화십이식이 꺾인 이상, 종남의 제자들은 더 이상 화산을 상대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과거 화산의 제자들이 종남에게 느꼈던 절망감을, 이젠 종남이 화산을 상대로 그대로 느껴야 한다. 아니, 그 이상의 절망감일 것이고,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럼.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이송백은 고개를 들어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터덜터덜 비무대로 오르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복잡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이송백이 입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등 뒤로 힘없는 종남 제자들의 눈빛이 꽂힌다.
"차라리……."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뒷말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낫다는 말을 하려 했겠지.
이해한다. 진금룡이 백천에게 졌는데 이송백이 청명에게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모두의 앞에서 종남이 연패하는 모습을 보여 돌이킬 수 없어질 바에야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낫다는 뜻일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분명히.
하나.
이송백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어쩌면 멍청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걷지 않는 자는 나아갈 수 없겠지.'
그의 걸음이 올곧게 청명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