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네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1)
“무학이란 이상하지.”
청명이 홀린 듯 비무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루하루 죽어라 쌓는다고 해서 반드시 강해지진 않는다. 그렇기에 수련은 고통스럽지. 오를 수 없는 벽을 계속 타는 것과 같으니까.”
“……청명아.”
“하지만 그걸 참아 내고 또 참아 내면 반드시 때가 온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 깨지는 순간이. 그 순간을 보지 못한다면 필 수 없다. 그리고 터지지 못한 봉오리는 영원히 꽃이 되지 못하는 법이지. 피어날 때에만 마침내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개화.
생명의 잉태다.
청명은 알고 있다.
백천이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지 말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어쨌든 청명은 백천의 사질이다. 그 사질에게 얻어맞고 욕을 퍼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건 생각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백천은 그 모든 시간을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버텨 냈다.
화산 최고의 기재로 불리던 이가 자존심을 모두 내던지고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 바닥을 구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청명은 그런 백천의 의지를 믿었다.
‘보여 봐라.’
화산이 어디까지 왔는지.
백 년을 넘어 다시 이어진 화산의 의지가 어떤 꽃을 피워 내는지.
청명의 시선이 백천의 모든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쫓았다.
이상하지.
마음이 가라앉는다.
몸은 더없이 쾌속하게 움직이고 있고, 전신에 열기가 가득한데도 마음은 낮게, 또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동중정.’
수도 없이 들었다.
그리고 수도 없이 새겼다.
그럼에도 미처 다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이상하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통증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검이 움직이고 있다.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
쇄애애액!
진금룡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이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라락.
머리카락 끝이 잘려 나가며 바람에 흩날린다. 하지만 백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검을 두 눈에 분명히 담았다.
알 수 있다.
그와 진금룡 사이의 거리.
저 검의 끝에 담겨 있는 검기의 간격.
진금룡의 내력이 회수되는 순간의 틈과, 그가 노리고 있는 것까지.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백천의 인식하에 있었다.
- 나를 아는 게 전부가 아니야.
‘맞는 말이야.’
- 검이란 결국 겨루는 것.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적 따위는 필요 없어. 하지만 역사상 누구도 산속에 처박혀 검만 휘두르다 자신을 완성한 적은 없어.
‘그것도 맞는 말이지.’
- 몸은 검에 집중하지만, 시선은 상대를 바라본다. 검이란 나와 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저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춤에 지나지 않아. 진정으로 검을 이해하고 싶다면 적을 이해해라.
‘진금룡을?’
못 할 것도 없지.
보인다.
진금룡의 모든 것이.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백천은 그 어느 때보다 확연하게 진금룡을 이해하고 있었다.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토록 뛰어넘고 싶었음에도 백천은 진금룡을 알려 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를 갈고 닦기만 하면 언젠가는 뛰어넘을 것이라 막연히 믿었을 뿐이다.
우습지.
상대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상대를 뛰어넘을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해라.
받아들여라.
그 모든 것이 나의 검에 깃들 것이다.
진금룡의 어깨가 움직이는 순간, 백천은 그가 자신의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검이 채 뻗어지기도 전에 백천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어 버린 진금룡의 가슴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쿵!
강렬한 충격과 함께 진금룡의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났다. 백천은 그의 눈에 어린 당황을 놓치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 잡은 진금룡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뭐냐?”
분명 뭔가 달라졌다.
검은 배로 쾌속해졌고, 일련의 흐름에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고?’
진금룡이 이를 악물었다.
‘이럴 리가 없다.’
지금 마치 자신이 밀리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도 부상을 입은 백천에게 말이다.
“이럴 리가 없다고!”
진금룡이 광폭한 기세로 백천에게 달려든다. 그의 검 끝에서 새하얀 설화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백천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새하얀 꽃잎들을 보며 낮게 심호흡했다.
‘확실히.’
일전에 상대했던 종서한의 검과는 차원이 다른 정교함이다. 꽃잎 하나하나가 정말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 검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청명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화려함을 쫓지 마! 내가 펼치는 검의 화려함에 내가 홀려 버리면 검에 휘둘릴 뿐이야.
‘그저 화려할 뿐이야.’
정교하다.
화려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정교함도 화려함도 그저 검을 펼쳐 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검에 무엇을 담을지를 잊은 검은 그저 공허하다.
그럼.
나의 검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백천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려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검 끝에 실린 여유는 훈풍처럼 부드럽게 백천의 몸 주위를 감쌌다.
‘나의 검이 화산에서 가장 강하지 않아도 좋다.’
가장 빠르지 않아도, 가장 화려하지 않아도, 가장 웅혼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
그의 검이 쫓는 것은 화산의 혼이니까.
청명의 검이 화산을 이끈다면, 그의 검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치우치지 않은 화산의 검.
그게 백천의 검이다.
백천의 검 끝에서 한 떨기 매화가 피어오른다.
소담스레 피어난 꽃은 이윽고 불어온 훈풍에 흩날린다.
‘연화봉에 매화가 피어나니.’
화산이 붉게 물들어 가리라.
눈을 현혹시킬 만큼 화려하지도 않다. 진금룡의 그것처럼 정교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백천의 매화는 지켜보는 이들을 빨아들였다.
“저……!”
무당의 장문 허도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 저 나이의 아이가!’
그의 눈에 경악이 어린다.
“아미타불.”
법정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지 연신 불호를 외워 댔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반응을 보이는 이는 누가 뭐라 해도 종남의 장문인인 종리곡이었다.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그의 입술 역시 애처로울 만큼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설화십이식은 매화검법의 정수를 뽑아내어 새로이 발전시켜 나아간 검이다. 종남의 정수가 매화검법의 정수와 만났으니 단순한 매화검법 따위보다는 당연히 더 뛰어나야 한다.
한데, 어째서 그는 지금 백천의 매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인가?
‘이럴 수는 없어! 빌어먹을!’
피어난다.
흩날린다.
봄의 매화가.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듯 따뜻한 훈풍을 타고 매화 잎이 온 산으로 퍼져나간다.
세상을 뒤덮는 화우(花雨).
그건 한때 천하를 웅비했던 화산의 매화검법이 다시 강호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외침과도 같았다.
“아…….”
현종의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아…….”
두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보고 계십니까, 선조들이시여.’
그가 잃었던 것.
화산이 잃었던 것.
하지만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화산의 혼.
그 모든 것이 지금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문파에 가도 환영받을 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단 한 번도 몰락한 화산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이가 백천이다.
백천을 볼 때마다 현종은 더없는 고마움과 애틋함, 그리고 아릿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런 그가 지금 현종의 생에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백천아.’
일어나 외치고 싶다.
이게 화산의 검이라고.
그것이 너희들이 잊었던 검이라고!
현종이 물기 젖은 눈으로 피어나는 매화를 바라보았다.
‘검에 의지를 담는다.’
뜬구름 같은 말이다.
결국 검이란 손끝에서 움직이는 것. 그렇다면 의지는 애초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검에 의지를 담는 게 아니야.’
의지를 품어야 하는 건 내 가슴 안이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검은 자연히 내 마음을 따르는 법.
한 걸음을 내디딘다.
멀기만 했던 세상이 그에게 다가온다.
그가 펼치고자 했던 검을 넘어,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에 발을 내딛는다.
이상하지.
날카롭게 검을 펼치고 있는데 이상하게 따뜻한 느낌이 난다.
마치 그의 검이 온몸을 쓰다듬고 있는 것 같다.
‘검에 화산이 담겨 있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검을 펼치면 펼칠수록 느낄 수 있다.
앞선 이들이 이 검에 무엇을 담으려 했는지.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
검으로 이어진다.
매화검법을 만든 이의 의지가. 그리고 그 매화검법을 발전시켜 온 이들의 의지가.
그들이 후대에 전하려 했던 모든 것이 이 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어 간다는 것.
그건 앞서 걸어간 이들의 의지에 나의 의지를 더하는 것.
그래. 이게 화산의 검이다.
백천의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난다.
뿌리는 대지를 파고들고, 솟아오른 줄기는 굳건하게 의지를 세운다. 마침내 세상으로 뻗어 나간 가지는 이내 온 세상에 퍼져 간다.
개화(開花).
검이라는 가지의 끝에서 피어난 매화는 이제껏 그가 그렸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품고 진금룡을 뒤덮기 시작했다.
새하얀 진금룡의 꽃과 붉은 백천의 꽃이 서로 얽혀들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진금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백천의 매화가 부드럽게 그의 꽃들을 사방으로 밀어 내고 있었다.
결코 강하지 않게. 하지만 단호하게!
‘어떻게?’
진금룡의 뇌리에, 과거의 광경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화인처럼 박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 광경. 청명의 매화가 그의 설화를 지워 내던 바로 그때가 말이다.
‘어째서?’
도대체 왜 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수련했다.
몸이 부서져라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저 악마 같은 청명 놈을 이기기 위해서.
그런데 청명은 고사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던 백천의 검 앞에 가로막힌다고?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이냐!”
진금룡의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악!”
광기 어린 비명을 내지른 그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검을 휘둘렀다.
설화가 피어나고 또 피어났다.
차갑고 매섭기 짝이 없는 설화가 더없이 날카롭게 잎을 세운다. 마주하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버릴 듯 광포한 기세로.
그리고 태풍에 밀려들어 부서지는 포말처럼 백천의 매화를 덮쳐 간다.
하나.
아무리 파도가 몰아쳐도 바위를 밀어 낼 수는 없는 법.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백천의 매화는 진금룡의 설화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전진했다.
날카로움도 화려함도 그저 밀려날 뿐.
자신의 검이 백천의 매화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버린 진금룡은 흔들리는 눈으로 눈앞의 매화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드럽게 설화를 밀어 낸 매화가 환상처럼 솟구치더니, 이내 봄바람을 맞은 화우(花雨)가 되어 쏟아진다.
화아아아악!
훈풍에 밀려온 매화가 진금룡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흩날리고 또 흩날린다.
그리고…….
비무장을 가득 채울 듯 흩날리던 매화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사라졌다.
“…….”
사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경악한 눈으로 비무대 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비무대 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아……. 하아…….”
한 손으로 붉게 물든 손목을 움켜잡고 밭은 숨을 내뱉는 백천.
“…….”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는 진금룡.
두 사람의 말없는 대치가 한동안 이어졌다.
“너는…….”
먼저 입을 연 것은 진금룡이었다.
하지만 뭔가 말하려던 그는 다시 입을 닫더니 가만히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물었다.
“……이건 뭐였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백천의 입이 열렸다.
“이십사수매화검법.”
작지만 단호하게.
“매화만개(梅花滿開).”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끝끝내 버티고 선 백천에게, 진금룡이 희게 웃었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라.”
감탄인가?
아니면?
“엿 같은 이름이군.”
진금룡의 몸이 무너진다.
털썩.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진금룡을 내려다보며, 백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형님.’
승패를 가른 것은 그저 하나였을 뿐이다.
이어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백천은 진금룡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화산의 검은 종남의 검을 이겼다.
‘지금은…….’
그는 더없이 멋진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몸을 돌리는 그에게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스스로를 뛰어넘어 진정한 화산의 검을 펼쳐 보인 그를 축복하듯이.
“승자는 화산의 백천이오!”
우레처럼 쏟아지는 환성 속에, 백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환호하고 눈물 흘리며 그를 향해 달려오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