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5)
"사숙!"
"사, 사형!"
"빌어먹을!"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무대 위에 선혈이 잔뜩 흩뿌려져 있다.
조걸과 윤종, 심지어 유이설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부릅떴다.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청명뿐이었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흥분했군.'
검법이란 올바른 쓰임새가 있는 법이다.
더 강한 초식만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다면 비무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
얼마나 완벽한 시점에 얼마나 적절한 초식을 사용하는가가 실력의 척도다.
지금 백천은 거기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매화검법은 더없이 화려한 검.
하지만 그 매화를 피워 내기 위해서는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시시각각 날아드는 쾌검을 상대로 화려한 변화를 시도하다가는 검을 채 떨치기도 전에 목이 달아나는 법이다.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청명이 살짝 이를 갈았다.
백천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검에 대한 이론은 수도 없이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기재라고 할 수 있는 백천이 그걸 알아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나 흥분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알던 것도 잊게 만들고, 평소와는 다른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상대가 진금룡이 아니었다면, 진금룡이 아닌 비슷한 실력을 가진 명문의 제자였다면, 백천은 결코 저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진금룡이기에 백천을 흥분시키고 평상심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저 멍청이가."
청명의 턱에 힘이 콱 들어갔다. 가라앉은 시선은 여전히 비무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조걸이 습관적으로 청명의 이름을 불렀다.
"처, 청명아!"
"호들갑 떨지 마!"
하지만 청명은 나직하게 일갈했다.
"사숙이 평소에 워낙 멍청하고, 자존심만 세서 헛짓거리를 해 대고, 쓸데없이 사고를 치거나 재수 없이 굴기는 하지만!"
"……차라리 욕을 해라, 인마."
"그래도 검수라면 저 정도 상처쯤은 감수할 수 있어야지."
그의 시선은 평소와 달리 싸늘하고 무거웠다.
"검을 들 수 있으면 진 게 아니야. 그건 저 멍청이도 알겠지."
그 말에 조걸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손목을 움켜잡은 백천이 눈에 들어왔다.
'사숙.'
조걸은 피가 바짝 마르는 심정으로 백천을 지켜보았다.
욱신.
손목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진다.
백천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상처를 꾹 누르며 지혈했다.
'방심했나?'
아니, 방심이 아니다.
이건 방심이라기보다는 오만. 그래, 오만했다.
'상대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내 노림수가 모두 통하지 않기에 강자다. 그런 이를 상대할 때는 검을 움직일 때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그만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취해 고민을 잊었다. 이 손목의 상처는 그 오만의 대가다.
백천이 지혈하던 손을 떼자 거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그 상처를 보며 진금룡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화산의 꽃은 아름답더군."
무덤덤한 목소리.
백천에게 부상을 입힌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는 듯 진금룡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하지만 꽃이 피기 전에 가지를 잘려 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지.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백천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금룡의 말이 너무도 뼈아프게 그를 찔러 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진금룡은 싸늘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건방지다고."
"……."
"청명과 어울리더니 네가 그쯤 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호가호위(狐假虎威)는 이럴 때 쓰는 말이지. 화산신룡의 비호가 없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지."
말이 심장을 찌르고 들어온다.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저 말 때문인지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든다.
백천은 검을 잡은 손에 살짝살짝 힘을 주어 보았다.
'움직인다.'
끔찍할 정도의 통증 속에서도, 다행히 손은 움직였다. 근맥은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라면 검을 펼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아직 할 수 있어.'
그의 눈에 다시 투지가 어리는 걸 본 진금룡이 눈을 가늘게 뜬다.
"더 할 셈인가?"
"……물론이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모르나?"
"그럴지도 모르지."
백천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하지만 뭐가 꼴사나운 것인지는 알아. 여기서 물러나면 나는 그냥 멍청한 쓰레기밖에 안 돼."
"……쓰레기라."
진금룡은 희게 웃었다.
"나름 주제 파악은 되는 모양이군. 다행이다. 나는 네가 주제를 잊은 줄 알았거든."
그의 싸늘한 냉소가 백천의 귀를 파고든다.
"그럼 덤벼 봐라. 쓰레기."
백천은 이를 악물고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아직 할 수 있다.'
진 게 아니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적어도 최선을 다해 봐야 진다 해도 패배를 인정할 수 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진다면 그는 평생 진금룡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욱신! 욱신!
검을 부러질 듯 부여잡자 손목에서 지옥 같은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까? 눈이 흐려지는 느낌이다. 또렷하던 세상이 점차 흐려진다.
'집중해!'
집중해야 한다. 상처의 통증을 잊을 만큼.
하지만…….
정말 이길 수 있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그는 진금룡을 압도하지 못했다. 아니, 냉정하게 보자면 밀렸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손목에 부상을 입고서 저 진금룡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빌어먹을.'
갑자기 진금룡의 모습이 더없이 커 보였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는 진금룡의 모습이 과거의 그것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저런 얼굴이었지.'
-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해.
그리고 항상 그 말을 들어 왔었지.
매번.
도전할 때마다 항상 결과는 같았다. 언제나 이길 것이라 믿고 달려들었지만, 항상 똑같이 패배했다.
그럼 이번에도?
'또 지는 건가…….'
잘난 듯이 떠들어 댔지만, 승산이 희박해졌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다. 승부란 단순히 의욕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진금룡을 상대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 대체 어떻…….
"야아아아아아아아! 이 병신아아아아아아아아!"
백천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어……."
그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더니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어디 대가리를 숙이고 있어! 확 마 대가리를 깨 버릴라!"
"……."
"그러고도 네가 화산의 대제자냐!"
그러고도 모자란 듯, 청명은 숫제 입에 게거품을 물고 비무대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윤종과 조걸이 지체 없이 달려들어 그의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말 안 듣는 힘 센 짐승을 누르듯, 윤종은 사색이 된 얼굴로 뒤쪽의 다른 제자들에게 외쳤다.
"덮쳐! 빨리!"
화산의 제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청명에게로 달려들었다.
"말려! 말려!"
"청명아! 보는 눈이 많다! 저 사람 네 사숙이야!"
"입을 막아! 일단 입을!"
일제히 우르르 달려들어 청명을 덮쳐누른다. 거의 작은 산처럼 청명 위로 타고 올랐지만, 청명은 그 아래 깔려서도 여전히 눈을 까뒤집으며 소리쳤다.
"어디 꼴사납게 기죽은 얼굴을 하고 있어! 대가리가 깨져도 모가지는 뻣뻣해야지! 그게 화산이다! 이 빌어먹을 사숙 놈아!"
관중들은 모두 황당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비무대 위에 선 진금룡조차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직 하나.
백천만이 청명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사질 놈 같으니."
이내 그의 허리가 쭉 펴졌다.
청명의 말이 옳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진정 진금룡을 벽으로 느낀다면 그 앞에 절망해서는 안 된다.
"뭘 배웠어!"
"……."
"잊지 마! 네가 뭘 배웠는지!"
백천의 얼굴에 평정심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뭘 배웠냐고?'
그는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야 이기는 법이지."
부우우욱!
옷을 찢어 낸 백천이 상처 난 쪽 손을 검 손잡이에 동여매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손을 묶은 그는 검을 들어 진금룡을 똑바로 겨눴다.
얼굴에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청명이 눈을 빛냈다.
"으라차아아!"
"악!"
"우와아앗!"
그를 덮쳐누르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몸을 벌떡 일으킨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사숙은 조금 재수가 없는 쪽이 좋아."
쫄아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그러자 다시 다가온 조걸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연다.
"청명아, 사숙이……."
"걱정할 것 없어."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사숙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니까."
목소리에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가라앉는다.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멍청했네.'
흥분한 것?
물론 그것도 실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실수는 그가 화산의 가르침을 잊었다는 것.
- 냉정? 피가 튀고 살이 갈리는 전장에서 무슨 수로 냉정을 유지해? 그건 그냥 뭣도 모르는 놈들의 헛소리일 뿐이야. 사람은 누구나 흥분한다. 중요한 건 그 흥분 속에서도 자신의 검을 잃지 않는 거야.
웃기는 일이지.
수련을 하는 내내 귀에 못이 박이도록 잔소리를 들었다. 때로는 쫓아다니며 잔소리하는 청명의 입에 검집을 처박아 버리고 싶을 만큼.
그런데 그 끔찍했던 잔소리들이 지금 그에게 길을 열어 주고 있다.
'기억해라.'
화산의 가르침을.
저 빌어먹을 놈의 잔소리를.
- 누가 검을 손으로 쓰냐, 누가! 발모가지가 바닥에 붙어 있지 않은 놈이 검을 쓸 수 있어?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칼춤이라도 추게? 다리가 버텨 주지 않는 검은 칼부림일 뿐이야! 모든 검은 발에서 시작한다! 뿌리 없는 매화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그래.'
시작은 발. 그리고 하체.
모든 검은 하체에서 시작한다. 그 기본적인 것조차 잊고 있었다.
- 화려함을 쫓지 마! 내가 펼치는 검의 화려함에 내가 홀려 버리면 결국 검에 휘둘리게 된다. 화산의 근본은 매화검법이 아니야! 육합검이지! 동중정(動中靜)! 화산 검의 기본은 동중정이다. 화려한 움직임 속에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매화를 피워도 광대놀음일 뿐이야!
'그래. 그것도 잊었다.'
백천이 피식 웃고 말았다.
배운 것을 모두 잊었으면서도 승리를 바랐다. 이런 멍청한 짓이 어디에 있는가?
피식피식 웃어 대는 백천을 보며 진금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우습지?"
"아……. 오해하게 한 모양이군. 걱정할 것 없어. 형을 비웃는 게 아니니까. 나를 비웃고 있었을 뿐이야."
"실성이라도 한 모양이군."
"그럴지도 모르지."
백천이 검을 한차례 크게 떨쳐 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잠시 잊었다. 내가 증명해야 할 건, 내가 형보다 강해졌다는 사실 따위가 아니라는 걸."
"……."
"내가 증명해야 하는 건 화산의 검이었지. 덤벼. 종남의 검이 화산의 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증명해 줄 테니까."
"그 상처 입은 손으로?"
"더 좋지."
백천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다.
"덕분에 좀 더 확실하게 증명될 테니까."
진금룡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실력이 따라 주지 않는 허세만큼 추한 것도 없지."
"동감해. 그러니……."
백천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허세 그만 부리고 덤벼."
동시에 진금룡의 눈에 차디찬 살기가 덧씌워졌다.
"오냐."
그의 몸이 더없이 쾌속하게 백천을 향해 돌진한다.
"어디 계속 지껄여 봐라!"
카앙!
빛살처럼 날아든 검이 백천의 목 바로 앞에서 튕겨 나갔다.
'뭐?'
진금룡은 순간적으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백천이 그의 검을 막아 냈단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다. 이전과는 달리 그의 검을 튕겨 내는 백천의 움직임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뭐냐?'
분명 뭔가 달라졌다.
진금룡이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십여 번의 참격이 백천을 향해 쏟아졌다.
웬만한 수준으로는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가공할 쾌검.
하지만 백천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든 참격을 무리 없이 받아쳤다.
검 부딪치는 소리가 빠르게 연신 울려 퍼진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더욱 차갑게.
하체는 굳건히 대지를 박차고 허리는 곧게 세워 몸을 떠받친다.
스스로의 중심을 세우지 못하는 이는 검조차 세우지 못하는 법.
'떠올려라.'
화산이 그에게 준 가르침은 그의 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좇을 수만 있다면 패배할 이유 같은 건 단 하나도 없다.
검격을 쫓아가는 와중, 그의 시선이 진금룡을 넘어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라.'
나를 동경한다고? 나를 믿는다고?
멍청한 놈들아.
나는 지금까지 패하기만 했다.
단 한 번도 진금룡을 넘지 못했고, 제대로 너희를 이끌어 본 적도 없다.
패하고 또 패했다.
그럼에도.
'뭘 그렇게 선망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느냐.'
이 멍청한 놈들아.
백천이 이를 악문다.
카아아앙!
날아드는 참격을 가공할 힘으로 밀쳐 낸 백천의 눈에 광망이 어린다.
완벽한 방어로 만들어 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검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된다.
진금룡은 자신의 목을 향해 쇄도하는 백천의 쾌검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놈이!"
"닥쳐!"
백천이 거칠게 일갈했다.
저기 나를 믿는 놈들이 있다.
지고 또 지고, 또 패배해도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거라 믿어 주는 멍청한 놈들이 있단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너한테 질 수는 없지!"
백천의 검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빛난다. 그 빛은 이윽고 진금룡의 전신으로 흩뿌려졌다.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답지 않게 목소리로 낮게 말한다.
"똑똑히 봐 둬."
"……."
"지금 개화(開花)할 테니까."
쌓고 또 쌓아 온 것.
긴긴 시간 묵묵히 참아 내고 또 참아 내던, 말라 버린 꽃이.
비로소 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