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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94화 (294/1,567)

294화.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4)

진초백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긴장하기는 했겠으나, 그만큼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비무를 지켜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한 아들은 종남의 기대주로서 화산에 입문한 동생을 무너뜨리려 하고, 한 아들은 화산의 동량으로서 종남의 기둥인 형을 쓰러뜨리려 한다.

진초백은 그 광경을 그저 쓰라리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쾅!

서로 검을 맞댄 두 사람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도로 튕겨 나왔다.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노려보는 형제를 보며 진초백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직 본 실력이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 둘의 실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언제 저 아이가 제 형과 비등해졌다는 말인가?'

백천이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이번 대회에서 보여 준 활약이 있는데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하나, 아무리 백천이 강해졌다 한들 제 형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대가 안 되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린 시절부터 백천은 단 한 번도 진금룡을 당해 내지 못했다. 나이를 감안한다 해도 그 나이대의 진금룡이 보였던 재능의 절반도 보여 주지 못했다.

한데.

'화산에서 무엇을 겪고 무엇을 얻었단 말이더냐?'

지금 그의 눈앞에서 백천은 진금룡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은 채, 검을 펼쳐 내고 있다.

너무도 화려하고 눈부시게.

진초백이 다시 한번 세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 실수다.'

재능이라는 것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어떤 재능은 시작부터 눈부시게 빛나지만, 어떤 재능은 긴 겨울을 버티고 피어나는 꽃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개화하기 마련이다.

그 재능을 미리 알아보고 키워 내야 하는 게 부모고 스승이다.

'나는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었구나.'

분명 미치지 못한다 생각했다.

제 형의 반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기대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상처를 주었다.

하나.

그의 시선이 비무대를 넘어 백천을 응원하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화산은 저 아이를 키워 내었구나.'

그가 하지 못한 것을 저들은 해냈다.

화산에는 백천이 필요하다 부끄럼 없이 말하던 현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라면 그리 말할 수 있었겠는가?'

진초백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는 지금 종남의 장로로서 이곳에 와 있다. 자신의 본분을 생각 한다면 당연히 백천이 아닌 진금룡을 응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종남의 장로가 아닌 백천의 아비로서의 그는 어쩔 수 없이 괄목상대한 아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보여 보거라.'

네가 무엇을 얻었는지.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사형. 사숙이 이기겠죠?"

"……."

조걸의 물음에, 윤종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백천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사숙은 우리와는 달라.'

청명이 등장하기 전까지 백천은 화산의 누구보다 뛰어난 이였다.

부드러움과 여유, 그리고 실력까지.

화산의 제자라면 그를 동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같은 백자 배조차도 그와 경쟁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압도적인 이가 백천이었다.

그런 재능에 노력하는 끈기까지 갖췄다. 종남과 진금룡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폐관을 자처하고,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이가 바로 백천이다.

그러니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

'상대는 그 진금룡이다.'

청명에게 패하며 빛이 바래긴 했지만, 백 년 내 종남 최고의 인재로 불리던 이다. 그가 장문인이 된다면, 이제껏 없었던 종남의 전성기가 열릴 것이라는 평이 너무도 당연시되던 인재다.

물론 청명이 온 이후로 화산은 더없이 강해졌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그 격차를 뛰어넘었는가?'

그걸 백천이 증명해야 한다. 다름 아닌 저 진금룡을 상대로.

"사형……."

"믿어라."

윤종이 비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사형을 믿어라.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수련을 믿어라. 우리는 충분히 강해졌다."

"하지만……."

조걸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닫았다.

'진금룡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니잖습니까?'

진짜 천재를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백천보다는 진금룡이다.

'그런 진금룡이 과거의 자신과 완전히 달라 보일 만큼 수련을 해 온 거란 말입니다.'

저 진금룡의 기세를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몰아붙여 왔는지 말이다.

그런데 정말 백천이 진금룡을 이길 수 있을까? 그 멀었던 격차를 좁힐 수 있었을까?

"사형이 이겨."

뒤에서 끼어드는 목소리에 조걸이 고개를 획 돌렸다.

유이설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을 만큼 열심히 했으니까."

태연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소매 아래로 드러난 유이설의 주먹은 꽉 움켜쥐어져 있다. 그녀도 그만큼 긴장한 것이다.

조걸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이기십시오.

반드시!

두 자루의 검이 서로를 겨누고 날아든다.

챙!

짧고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검이 떨어졌다가 다시 맞붙는다.

백천은 자신의 검을 통해 전해져 오는 힘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내력이!'

내력만큼은 이미 진금룡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종남의 적자로서 사문의 모든 지원을 받은 이라고는 하나, 혼원단과 자소단을 복용한 자신보다 내력이 강할 수는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진금룡의 내력은 결코 백천에 못지않았다.

새삼 종남이 진금룡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쾅!

밀어 넣은 내력이 충돌을 일으켰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작은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큭!"

휩쓸려 뒤로 물러난 백천은 되레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진금룡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진금룡의 검이 빛살처럼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백천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맞받았다.

콰앙!

거대한 바위가 머리 위로 떨어진 듯한 충격이 백천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진금룡의 발이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쿵!

백천의 몸이 비무대 밖으로 떠밀릴 듯 밀려났다. 무릎을 굽혀 가까스로 자세를 잡은 백천이 진금룡을 노려보았다.

진금룡은 오만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언제나 그랬지.'

수도 없이 덤볐다.

그리고 수도 없이 싸웠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백천과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진금룡.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에는 표정으로나마 걱정을 보이던 진금룡이 이제는 싸늘한 눈으로 응시한다는 정도였다.

"확실히…… 너는 화산이 어울리는 모양이군."

"……무슨 소리냐?"

진금룡이 백천을 보며 무감정하게 말했다.

"예전이었다면 벌써 쓰러져 있겠지. 분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이야."

"……."

"격차가 좁혀졌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아무리 격차를 좁힌다고 한들, 추월하지 못하는 이상 결과는 언제나 같다."

-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그 말이겠지.

백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볍게 검을 떨친 뒤 입을 열었다.

"벽이라."

그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모르는군. 벽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라는 걸."

"뭐?"

"말했잖아."

백천이 나직하게 일갈한다.

"네가 나의 벽이 되려 하는 이상, 너는 결국 나에게 추월당할 수밖에 없어. 벽은 그저 머물러 있을 뿐이고 나는 전진하니까."

그는 검을 들어 진금룡을 똑바로 겨눴다.

"아무리 높은 벽이라고 해도 오르고 오르다 보면 결국에는 그 끝을 드러내는 법이지. 질리도록 배웠거든, 어떤 망할 놈에게."

그러니.

"오늘 내가 너를 무너뜨린다."

"잘도 지껄이는군."

진금룡이 싸늘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과거의 그였다면 지금 백천의 발언을 그저 웃어 넘겼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백천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적당한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진금룡은 슬쩍 시선을 내려 검을 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이 미묘하게 미끌미끌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긴장하고 있다는 거로군. 이 내가…….'

저 백천을 상대로.

진금룡은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억지를 부리지도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인정한다.

백천이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강해졌고, 그들의 차이는 현격하게 좁혀졌다는 것을.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지켜 낸다.

"설사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진금룡의 차가운 시선이 백천에게로 향했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지만, 그 표정 아래에는 단단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그게 오늘은 아니겠지. 지금의 너는 나를 넘을 수 없다."

이내 살기가 넘실거린다.

"그리고 평생 그럴 날은 오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주지!"

진금룡이 문답무용으로 백천을 향해 달려든다.

파아아앙!

그의 검이 공기를 찢으며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날아들던 검이 순식간에 십여 개의 검영(劍影)을 만들어 내며 분열한다.

검에 어린 기세가 영혼마저 찢어 버릴 듯 거세다.

하지만 백천은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진금룡의 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하지 마라!'

아무리 빠르다 해도,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보다 더한 검은 질릴 정도로 겪어 보았다. 그러니 겁먹을 이유가 없다.

'보인다.'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인다. 움켜잡은 매화검이 진금룡의 검을 정확하게 쳐 낸다.

카카카캉!

검기를 한껏 머금은 검들이 충돌하며 고막을 찌르는 소음을 자아냈다. 진금룡의 검을 튕겨 낸 백천이 검을 더 꽉 틀어쥐었다.

'나는 지금 진금룡의 검을 보고 있다.'

과거에는 전혀 보이지도 않던 검이다. 어떻게 지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백천은 진금룡의 검을 분명히 보고 대항할 수 있었다.

머리끝이 쭈뼛 설 만큼의 쾌감이 온몸을 내달린다.

하지만 막아 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그는 곧장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진금룡의 목 어귀를 찔러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똑똑히 보았다.

비무대에 올라온 이후 처음으로 진금룡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는 것을 말이다.

카앙!

쇄도하던 백천의 검이 맥없이 도로 튕겨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다.

'통한다!'

나의 검이!

내가 이룬 경지가!

저 진금룡에게 확실히 닿고 있다.

'나는 성장했다.'

뻔한 소리일지 모른다.

과거와 비할 바 없이 강해졌다. 그리고 명문의 제자들을 연파해 냈다.

그 누구도 백천의 성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사제들 앞에서는 당당한 척했지만, 그간 백천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초초함에 내도록 시달려 왔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그는 이제야 그 불안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진금룡을 넘지 않는 이상 그는 진정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진금룡은 백천에게 있어 여전히 거대한 벽이니까.

'뛰어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단순한 호승심? 그게 아니면 질투? 시기?

천만에!

검수로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 그는 뛰어넘어야 한다. 진금룡을, 종남을, 그리고 과거를!

"타아아앗!"

백천은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진금룡을 향해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보여 주마.'

이 백천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긴 겨울과도 같은 시간을 지나며 참고 또 참은 끝에 무엇을 피워 냈는지!

백천의 검이 강하게 진금룡을 후려친다. 강격으로 상대를 밀어 낸 백천의 검 끝이 부드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검 끝에서 붉은 매화가 망울진다.

피어난다.

그의 매화가.

한 송이, 한 송이 소담스레 피어나던 매화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하나.

바로 그 순간.

"너무 기분 내지 마라."

싸늘한 일갈과 함께 진금룡의 몸이 엿가락처럼 쭈욱 늘어난다 싶더니 순식간에 백천과의 거리를 좁혀 내었다.

그러더니 가공할 속도의 쾌검으로 매화를 만들던 백천의 검을 후려쳐 버린다.

카아아앙!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백천의 검이 뒤로 밀려 나간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으로 피어나던 매화가 환상처럼 모두 사라져 버렸다.

"멍청한 놈."

싸늘한 냉소와 함께 진금룡의 검이 검기를 뿜었다. 흡사 그의 눈빛만큼 차디찬 푸른빛 검기가 백천의 손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걱!

듣기만 해도 섬뜩한 소음과 함께, 시뻘건 선혈이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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