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3)
아침 햇살이 창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새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백천은 가만히 눈을 떴다.
이불을 밀어 낸 그는 상체를 일으키고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실로 고요하고, 평화롭기 짝이 없는 아침이다.
하나 백천에겐 단순히 평화로운 아침일 수 없었다.
'오늘이로군.'
창밖을 바라보는 백천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질끈.
이마에 영웅건을 동여맨 백천이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산의 검은 무복과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무늬. 그리고 이마에 맨 새하얀 영웅건까지.
새삼 그는 자신이 화산의 제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상상해 보았다. 화산의 무복이 아닌 종남의 무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닮았군.'
자신의 모습에 진금룡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린 시절 모종의 사고로 헤어졌다고 해도 마주치는 순간 서로가 형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은 쏙 빼닮았다.
낮게 한숨을 쉰 그는 의자에 앉아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삼베에 기름을 먹여 검을 닦기 시작했다.
스으으읏.
스으으읏.
검을 닦아 낼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어쩌면 조금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을 뛰쳐나와 화산에 입문하지 않고, 종남에 남아 진초백의 가르침을 받으며 진금룡의 뒤를 좇는 삶 말이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후회하냐고?
천만에.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태어난 이래로 쭉 함께하지 않아도 가족일 수 있다.
이제 그의 가족은 진씨 일가가 아니다. 오로지 화산만이 그의 가족이다.
오늘 비무는 그 모든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마음을 날카롭게 가다듬…….
쾅!
"……."
"사숙, 일어났어?"
"……."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에게로 향하는 백천의 눈이 떨렸다.
"문은 발로 차는 게 아니라 손으로 여는 거라고 내가 몇 번을……."
"아, 뭐래. 장문인이 빨리 오래."
"……."
청명이 놈 뒤로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숙, 가시죠."
"저희는 준비 다 끝났습니다!"
백천은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아무래도 좋다.
'내 가족은 이곳에 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냐, 이놈들아. 가자!"
"오? 자신만만한데! 형을 두들겨 패는 패륜을 저지를 의욕이 충만해 보이네!"
아…….
저 새끼는 빼자.
저 새끼는.
* * *
관중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조금 조용해졌다.
그 많고 많았던 참가 인원 중 이제 남은 이는 겨우 예순하고 넷.
그동안 어느 문파가 더 활약하는가에 관심을 가지던 관중들은 이제 슬슬 누가 우승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남궁세가의 남궁도위가 가능성이 제일 높지 않겠나?"
"무슨 소리! 이번에야 말로 팽가가 남궁세가를 넘을 때일세."
"이 답답한 사람아. 오대세가는 구파일방을 못 넘는다니까 그러네. 우승은 소림의 혜연이 할 게 분명하네."
"무당을 빼놓을 수는 없지!"
천 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 개의 시선이 있기 마련이다. 같은 비무를 보았지만 제각기 서로 다른 이를 우승자로 뽑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아닐 수도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화산이 있지 않은가?"
"아, 화산! 그렇지!"
화산이라는 말이 나오자 중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이었다면 미친놈 소리와 함께 손가락질이 쏟아졌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화산신룡이라면 충분히 우승을 노려 볼 만하지!"
"화산신룡은 물론이고 화정검 백천도 만만치 않아. 지난 비무에서 그가 보여 준 검은 정말 놀라웠네. 화산의 검이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르는 소리! 예전부터 화산은 매화검문이라 불리는 곳이었네. 그들의 검은 강호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것으로 유명했지."
"그런데 왜 망했는가?"
"망하기는! 저리 강한데 뭘 망했다는 말인가?"
"구파일방에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하나는 알지."
"응?"
말을 하던 이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화산이 우승을 한다면 다시 구파일방에 드는 것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허어. 그도 그렇구먼."
사람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화산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구파일방이 바뀐다라…….'
예로부터 구파일방은 강호를 대표하는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흔치 않은 일이지만, 기세를 잃은 문파가 구파일방에서 빠지고 새로운 문파가 구파일방에 드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하나.
한번 구파일방에서 쫓겨났던 문파가 다시 그 자리를 되찾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거, 정말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중인들이 기이한 기대감을 안고 화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청명아."
"응?"
"너도 들리지?"
"뭐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 말이야."
"그게 왜?"
청명이 의아한 듯 조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걸은 주변에 장로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나지막하게 물었다.
"우리가 우승하면 정말 구파일방에 복귀할 수 있냐?"
"응?"
청명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다른 사형제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쏠렸다.
"구파일방?"
"우리가 구파일방에 들어간다고?"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구파일방이라니.'
'세상에! 언감생심 그런 걸 바라도 되는 건가?'
빚쟁이들에게 전각을 빼앗기고 화산의 현판을 내려야 할 거란 말이 나왔던 게 불과 삼 년 전이다. 그런데 고작 삼 년 만에 구파일방이라니.
호사가들의 말을 진지하게 믿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저런 이야기가 나온단 사실 자체가 달라진 화산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화산의 제자들은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마침 윤종이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 않나?"
"예?"
"구파일방에 드는 조건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무력이지. 우리는 지금 화산의 무력이 구파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있잖아."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당장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구파에 복귀하는 것도 꿈은 아닐지 몰라. 그렇게 되면 정말로 과거의 화산이 가졌던 영광을 재현하는 거지."
모두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꿈에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곱게 지켜봐 주지 않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딜 다시 들어가?"
"……응?"
"구파일바아아아아아앙?"
"……."
청명이 모로 고개를 꺾는 모습을 본 조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또?!'
'아니, 저건 갑자기 왜 저러냐?'
'누가 말실수했냐, 누가?'
사형제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는 저 미친 악귀 놈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아니, 이 양반들이 돈 없어 빌어먹더니 정말 거지 근성이 생겼나. 어딜 다시 들어가? 구파일방? 우리가 거길 왜 들어가. 사형들은 자존심도 없어?"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세상에, 얼마나 자존심이 없으면 화산이 쓸모가 없다고 걷어차 낸 놈들한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왜? 그럴 거면 종남한테도 가서 다시 잘 지내보자고 궁둥이 살랑살랑 흔들어 보시든가!"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저것들이 제발 다시 들어와 달라고 와서 무릎 꿇고 빌어도 구파에는 다시 안 들어가. 다 엿이나 까잡수라 그래!"
청명은 이제 과열되다 못해 거의 게거품을 물 기세였다.
"내가 저 구파 새끼들만 생각하면 승질이 뻗쳐서! 아주 내가 승질이 그냥! 막 그냥!"
"지, 진정해라 청명아! 내가 잘못했다!"
숫제 뒤로 넘어가기 직전인 청명을 보며 조걸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사실 이건 청명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다른 제자들이야 화산이 구파일방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에 큰 감흥이 없다. 입문할 때부터 화산은 구파일방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문파가 쇠락하여 그 자격을 잃었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화산이 쫓겨난 상황에 어떤 비사가 숨어 있는지 아는 청명은 구파 소리만 들어도 경추가 땅겨 온다.
거들먹거리는 면면들에 하나하나 매화나무를 처박아 버리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그런데 뭐?
구파일방으로 복귀를 해?
"안 해, 안 해! 거저 줘도 안 해! 구파는 얼어 죽을, 다 꺼지라 그래!"
"알았으니 진정 좀 해라!"
조걸과 윤종이 청명을 잡고 힘겹게 만류했다. 하지만 그래도 진정할 기미가 없자 결국 도움을 요청했다.
"사숙, 이 녀석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백천은 심드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왜? 틀린 말도 없구만."
"……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자존심도 없느냐? 우릴 버린 곳으로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어 들어가겠다고? 나는 반대다. 구파일방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
윤종과 조걸이 빙그레 웃었다.
아, 저 인간도 날이 갈수록 답이 없어지는구나.
하지만 백천은 싸늘한 어조로 다시 딱 잘라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사뭇 진지한 어조에, 화산의 제자들이 살짝 긴장하며 얼굴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성적을 내어 저들에게 잘 보이는 게 아니다. 화산이 구파일방에 들지 않아도 오롯이 훌륭한 문파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청명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그렇지."
그러더니 가만히 백천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알지, 사숙?"
"그래. 알고 있다."
백천의 시선이 비무대로 향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산의 검이 구파의 검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증명해야겠지."
청명이 씨익 웃었다.
"이기고 와."
"물론이지."
백천은 짧게 심호흡 한 후 비무대를 향해 걸었다.
앞에서 현상이 결연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님, 다녀오겠습니다."
"백천아."
"예."
그는 진중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네게는 큰 짐이 되는 승부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보여 주어야 한다. 다름 아닌 네가."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믿고 기다리마."
현상이 응원과 격려의 의미로 백천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마침내 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무대로 향했다.
'내가 증명해야 한다.'
백천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청명은 아니다. 청명은 화산의 검을 증명할 수 없다.
그는 천재를 넘어선 이니까.
청명은 화산이 아닌 다른 어떤 문파에 들어갔어도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저자거리 삼류 문파에 들어갔어도 그 무공을 뜯어고쳐 천하제일인을 노렸을 인재다.
그런 이에게 어떤 문파에서 성장했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백천이 증명해야 한다.
화산의 검이 결코 구파의 검이 뒤지지 않음을. 아니, 구파라는 허울이 없이도 오히려 그 허울을 뒤집어 쓴 이들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마침 비무대의 건너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오르고 있었다.
그래, 증명해 보일 것이다.
바로 저 진금룡을 상대로.
탁.
비무대에 오른 백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너무도 높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날도 이랬었지.'
그가 집을 뛰쳐나와 화산으로 향했던 날.
그날의 하늘도 이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때 그가 품었던 의지를, 그때 그가 선택한 길을 증명할 시간이다.
백천이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진금룡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과 언뜻 언뜻 드러나는 냉막한 살기는 진금룡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과거의 진금룡을 아는 이라면 안타까워할 만한 변화다.
하지만 검수로서는?
'마치 벼려진 검 같군.'
너무나도 날카롭게 벼려져, 닿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베어 버릴 듯한 검.
지금 진금룡의 인상이 딱 그러했다.
그간 얼마나 자신을 몰아붙였으면 저렇게 된 걸까?
가는 길이 다르기에 대적할 수밖에 없지만, 진금룡의 의지에는 순수한 경의를 표하는 백천이었다.
"화산의 백천이 종남의 진금룡에게 비무를 청합니다."
짧게 기수식을 취한 백천이 진중한 눈으로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금룡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건방진 놈."
스르르릉.
이윽고 그의 검이 뽑혀 나왔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은 검은 새하얗게 빛을 뿜어냈다.
"인정하지."
"……."
"너는 강해졌다. 과거의 그 어리숙하고 치기만으로 가득했던 놈이 어느새 한 사람의 검수가 되었구나."
백천의 몸이 움찔했다.
진금룡을 보는 눈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진금룡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 흔한 입에 발린 칭찬조차도 들어 본 적 없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그 진금룡이 백천을 향해 인정한단 발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진금룡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아직 멀었어."
"……."
"오늘 알게 해 주마. 네가 나아간 만큼 나는 더욱 나아간다는 것을. 그 차이는 평생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백천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
"그리고 평생 너의 벽이겠지."
백천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진금룡의 뒤틀린 조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건 무리입니다."
"……뭐라고?"
"제 벽은 따로 있거든요. 형님 정도는 비견되지도 못할, 거대하기 짝이 없는 벽이 있습니다."
"……."
"그러니 제가 알게 해 드리지요. 벽이란 결국 뛰어넘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말입니다."
"건방진 놈."
둘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을 높여 갈 뿐이었다.
세상의 소리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관중들의 웅성거림도, 쩌렁쩌렁 울리던 사형제들의 응원 소리도, 그러다 마침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그 순간.
"간다!"
"타아아아앗!"
백천과 진금룡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전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