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2)
"패배는 있을 수 없다."
종리곡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어린다.
종남의 제자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에게 우승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하지 못해도 그저 아쉬운 정도일 뿐이다. 하나, 화산에 패배한다는 것은 다르다."
화산과 패배라는 말이 나오자 구석에 있던 종서한이 움찔하고 고개를 숙였다.
종리곡이 그런 종서한에게 매몰찬 눈길을 보냈다.
"다른 문파에 패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화산에는 더 이상 패해서는 안 된다. 중인들은 오로지 결과만을 보고 말을 부풀리는 족속들이다. 우리가 또 화산에 패한다면 한동안 종남은 화산에 미치지 못하는 문파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너희는 그 굴욕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진금룡이 차가운 얼굴로 대답하자 종리곡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금룡."
"예, 장문인."
"특히 너는 패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종리곡의 시선이 진금룡과 뒤쪽에 좌정하고 있는 진초백을 훑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낭패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종남의 명예를 수복하겠습니다."
"좋다."
종리곡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이송백. 너도 마찬가지다."
"예, 장문인."
"네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맥없이 지는 일은 없도록 하거라."
기대가 다르다.
상대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송백은 알고 있었다.
그가 익히는 것이 과거 종남의 무학이기에 딱히 제지하지 않을 뿐, 그에게 기대를 하는 이는 더 이상 종남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이한 이단아.
그게 최대한 좋은 말로 평가한 이송백의 처지였다.
"종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그는 그저 담담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종리곡은 더 이상 이송백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명예를 드높이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상이 주어질 것이고, 명예를 더럽히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벌이 주어질 것이다. 너희 스스로 종남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종리곡은 차가운 눈으로 모두를 훑어본 뒤 휙하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남은 종남의 제자들이 다들 억누르고 있던 한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가장 뒤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송백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삭막하다.
너무도 차갑다.
과거의 종남은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종화지회의 참담한 패배 이후 종남은 마치 다른 문파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이송백."
저를 부르는 소리에 이송백이 고개를 들었다.
"사마 장로님."
과거 종화지회에서 종남을 이끌었던 사마승이 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참담한 패배 이후 사마승은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듯 초췌한 몰골로 변했다.
얼굴은 마음을 담는다고 하던가?
과거의 사마승은 엄격하고 차가운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을 품는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서는 그저 신경질적인 괴팍함만이 느껴졌다.
"따라 나오너라."
"……예."
이송백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사마승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소림의 전각을 벗어나 한참 숲으로 들어간 사마승은 주변에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야 이송백을 돌아보았다.
"네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
"예. 화산신룡입니다."
"내 앞에서 그 저주스런 별호를 입에 담지 마라."
"……예."
사마승의 얼굴에 독기가 어렸다.
화산신룡이라는 별호는 청명이 종화지회에서 종남의 이대제자들을 연파하며 얻은 별호다.
다시 말해, 그 별호에 종남의 굴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래. 그 청명 놈이 네 상대다. 너는 그놈을 이길 자신이 있느냐?"
이송백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청명을 이긴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런 물렁한 대답은 필요 없다. 대답해 보거라. 청명을 이길 자신이 있느냐?"
이송백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없습니다."
"그렇겠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는 듯 사마승은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 종남에서는 그놈을 막을 이가 없다."
"……."
"너는 물론이고, 진금룡도 그놈을 당해 내지 못한다. 알고 있겠지?"
"……예."
이송백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종남은 반드시 그놈을 이겨야 한다. 아니, 이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반드시 죽여야 한다."
"자, 장로님."
"우선 들어라!"
"……예."
사마승의 눈에 한기가 넘실거렸다.
"화산과 종남은, 하나가 흥하면 하나가 쇠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화산이 맹위를 떨칠 때 종남은 쇠락했고, 종남이 전성기를 달릴 때 화산은 멸문 직전까지 갔었지. 알고 있느냐?"
"……그게 어찌 꼭……."
"현실을 부정할 것 없다. 사실을 사실이라 인정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사마승이 이를 갈아붙이며 말했다.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종남은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그 망할 종화지회 이후 종남은 활력을 잃었고, 빛을 잃었다. 반면 화산은 완전히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황에서 부활하는 중이지. 이게 현실이다."
이송백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왜 사마승이 이리 따로 불러내어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사마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송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종남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종남을 위해 네 목숨을 내어 놓으라면 내어 놓겠느냐?"
이송백이 가만히 사마승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입니다."
"네 명예를 내어 놓으라면?"
"그리할 것입니다."
"그럼 너는 종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느냐? 설사 남은 세월은 그저 치욕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사마승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종남의 제자라면 그래야지."
사마승이 품 안에 손을 찔러넣더니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었다.
"받거라."
이송백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사마승이 내민 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긴말할 것 없다. 일단은 받아 넣어라."
이송백이 살짝 머뭇대다가 결국 그 작은 병을 받아 들었다. 사마승이 퀭한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내일 비무에 나서기 전에 검에 그걸 바르거라."
"……장로님?"
"묻지 마라."
사마승이 단호하게 말한다. 눈이 괴이한 광채로 번들거리는 듯했다.
"비밀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너조차 그게 뭔지 알 필요가 없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해야 한다."
"장로님, 이건……."
"내 말하지 않았느냐. 네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이송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물론 그는 종남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가 아닌가?
"장로님. 화산신룡에게 독 같은 건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무에서 독을 사용한다는 건 종남의 명예를……."
"독이 아니다."
"……예?"
사마승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내가 그리 허술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놈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물건이다. 너는 그저 네 몸에 묻지 않도록 검에 그 액을 바르고 그놈의 몸뚱어리에 생채기 하나만 내 주면 된다."
이송백이 굳은 얼굴로 사마승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건가?'
이건 타락이다.
어찌 협과 의를 표방하던 종남에서 이런 치졸한 수가 나온다는 말인가?
"장로님, 저는……."
"이송백."
사마승이 싸늘하게 그의 말을 자르며 일갈했다.
"사문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더냐?"
"……."
"너는 어차피 진금룡이 될 수 없다. 사문의 기대를 받는 이도 아니고, 되레 예전보다 퇴보하고 있지. 네가 진정 사문의 은혜를 갚겠다면 스스로를 두엄 더미에 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음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설마 너를 기르고 가르친 사문을 배반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이송백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시키는 대로 하거라. 그럼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
단호한 사마승의 말에 이송백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그게 해결일 리가 있습니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눈에 익숙한 이의 얼굴이 보였다.
"지, 진금룡."
"사형?"
진금룡은 숫제 철갑이라도 덧쓴 듯 차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송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놓아라."
"사형?"
"내 말을 듣지 않을 셈이냐?"
이송백이 말없이 손에 들린 병을 그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받자마자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퍼석!
병이 그대로 깨지며 안에 든 액이 바닥에 흩어졌다.
"뭐, 뭐 하는 짓이더냐!"
사마승이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진금룡은 그저 싸늘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장문인께서 최근 사마 장로님을 멀리한다 싶더니. 과연 이제는 노망이라도 나신 모양이군요.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이런 수작질을 벌이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종남은 기둥뿌리조차 남지 않게 됩니다."
"들킬 리가 없다고 하지 않느냐?"
"장로님."
진금룡이 사마승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문파의 녹을 먹은 이는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왜 모르느냐?! 이대로라면……."
"그럼 가서 그 검으로 청명과 동귀어진이라도 하십시오."
"……뭐, 뭐라?"
진금룡의 눈에 경멸이 어렸다.
"해야 한다면 본인이 직접 하십시오. 장로님께서 칼에 독을 바르고 청명을 습격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잔뜩 굳어진 얼굴로, 그는 씹어뱉듯 힘주어 말했다.
"제 사제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
사마승의 눈이 노기로 넘실거렸다. 그러나 진금룡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눈앞의 장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결국 사마승이 이를 갈며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금룡이 중얼거렸다.
"멍청한……."
이윽고 그의 시선이 이송백에게로 향했다.
"사형……."
"장로님을 비난할 생각은 하지 마라."
"……."
"사람의 여유는 곳간에서 나오는 법이고, 무인의 여유는 무학에서 나오는 법이다. 평생 믿어 왔던 문파가 흔들리는데 제정신을 유지할 이가 얼마나 있겠느냐?"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걸로 됐다."
진금룡이 몸을 획 돌려 걸어간다. 이송백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사, 사형."
"……."
진금룡이 걸음을 멈추었다.
"절 도와주신……."
"착각하지 마라."
그가 획 돌아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는 종남이 저따위 치졸한 수를 쓰는 걸 용납할 수 없을 뿐이다. 청명은 내 손으로 꺾는다. 네 도움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예."
"그리고."
진금룡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송백."
"예, 사형."
"나는 네놈이 싫다."
"……."
"하나, 네가 싫다 해도 너는 나의 사제고 나는 너의 대사형이다. 사제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나의 당연한 의무다. 좋고 싫음을 떠나 네가 위기에 처한다면 나는 응당 너를 보호할 것이다. 그게 종남의 장문인이 될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니까."
"사형."
슬쩍 이송백과 시선을 마주한 진금룡이 나지막하게 단언했다.
"청명은 너로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알고 있습니다."
"부딪쳐서 깨져라. 네 복수는 내가 해 줄 테니까."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멀어져 가는 대사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송백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사실 종화지회 이후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진금룡일 것이다.
청명에 대한 그의 집착은 지켜보는 이들마저 섬뜩하게 했다.
이제는 종남 내에서도 그를 경원시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다만.
'그럼에도 사형은 사형이시군요.'
이송백이 눈을 감았다.
'내가 되돌릴 수 있을까?'
이 변해 가는 문파를 과거처럼 돌려놓을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 해답은 아마 내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