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나는 여전히 너의 벽이다. (1)
종남의 진영을 향해 돌아오는 이송백에게 진금룡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고작 그 정도로 의기양양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사형."
"여기에 있는 이들이라면 저 아이 정도는 누구나 이길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진금룡이 차갑기 짝이 없는 눈으로 이송백을 노려보았다.
'마음에 안 들어.'
종남의 어른들이 열과 성을 다해 만들어 낸 검을 버리고 과거의 유물에 집착하는 것도, 아무리 말을 해도 딱히 귀담아듣지 않는 듯한 저 태도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청명이 그에게 있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쓰러뜨리고 싶은 증오스러운 적이라면, 이송백은 지독하게 안 맞는 이였다.
상극.
그 말이 가장 어울린다.
"네 검의 길을 관철하는 것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들어가라."
"예."
자신에게 꽂히는 사형제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이송백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겹군.'
사실 이송백은 둔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길을 관철할 의지는 있지만, 다른 이들을 설득할 능력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이 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종남의 검을 이루는 길은 너무도 길고 오랜 고행을 수반해야 하는 가시밭길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화산의 진영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습니까, 청명 도장.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요?'
누구도 해 주지 않는 대답.
그 대답을 저 청명에게 듣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당소소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못난 제자가 종남에 져 버렸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백천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저 씩씩한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이럴 때는 사숙으로서 힘이 될 수 있는 말을…….
"소소야. 잘……."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가더니 당소소의 어깨를 팡팡 두드린다.
"잘했어! 잘했어!"
"사형?"
"살다 보면 이길 때도 있는 거고, 질 때도 있는 거지! 그거 한 번 졌다고 벌을 받아야 하면 세상에 멀쩡한 놈은 하나도 안 남아. 어깨 펴!"
답지 않게 좋은 말을 해 주는 청명을 보며 당소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새끼가 이럴 리가 없는데?
당장 백상이 패했을 때도 혀로 난도질을 해 사람의 넋을 빼 버린 사람이 청명 아니던가.
"저, 정말 괜찮습니까?"
"흐으음."
청명이 당소소를 빤히 보다가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당소소."
"예! 사형!"
청명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당소소가 허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검에는 최선을 다했나?"
"……."
잠시 고민하던 당소소가 두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예!"
"그래. 그럼 그걸로 됐어. 다음에는 이겨라."
"……예."
당소소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드시!"
청명이 씨익 웃는다.
'덤으로 주워 왔다고 생각했는데.'
검수로써의 당소소는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청명의 생각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었다. 절로 칭찬이 나올 만큼 말이다.
'다른 이들도 자극을 받는 것 같고.'
당소소가 보여 준 검이 생각 이상이었는지 화산의 제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막내에게 따라잡힐 수는 없다는 거겠지.
문파에는 엉덩이를 찔러 주는 이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당소소가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화산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간 당소소가 유이설을 보고 살짝 주춤했다.
"사고. 저……."
"물."
유이설이 옆에 놓아 뒀던 물병을 당소소에게 내밀었다.
잠깐 주저하다 받아 들며, 당소소는 살짝 떨리는 눈으로 유이설을 보았다. 유이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말했다.
"잘했어."
"정말요?"
"다만 손목."
"……."
"검을 쓸 때와 암기를 던질 때와는 손목의 쓰임새가 달라. 그 부분을 더 고민하면 더 날카로워져."
"명심하겠습니다! 사고!"
"그래. 앉아."
"네!"
표정이 밝아진 당소소가 유이설의 옆에 앉아 활기차게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천이 청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명아."
"왜?"
"방금 그…… 이송백이 보여 주던 검 말이다."
"응."
"내 생각인데 그거……."
청명이 피식 웃는다.
"우리 동룡이 많이 컸네. 그것도 알아보고."
"하지 말라고."
"흐지믈……. 아, 또 뭔 검을 뽑고 그래."
청명이 발을 쭉 뻗어서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백천의 검을 꾹 눌렀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사숙 생각이 맞아."
"역시나."
백천이 심각한 눈으로 이송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검과 완전히 상극이다.'
화산의 검은 말하자면 공격의 검.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고, 천하에서 가장 현란하게 상대를 거듭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 내는 검이다.
도가의 검치고는 지나치게 요사스럽고 살기가 짙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게 바로 매화검법 아니던가?
반면 이송백이 보여 준 천하삼십육검은 완벽한 방어의 검.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 내고 또 막아 내고, 완벽한 방어를 통해 승리를 노리는 검이다.
당소소와 이송백의 충돌을 보니 그 사실이 확연하게 다가왔다.
"화산과 종남이 수백 년 동안 으르렁거린 게 단순히 옆에 붙어 있어서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
"맞아?"
"……넘어가자."
청명이
'뭐 이런 덜떨어진 놈이 다 있지?'
라는 눈길을 보내자 백천이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어, 좀 민망하네 이거.
다행히 윤종이 그런 백천을 대신해 말을 받아 주었다.
"무학이 상극이기 때문이라는 거냐?"
"거리가 가깝고 같은 구파일방이라 매번 충돌해야 하는데 무리가 완전히 반대인 격이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지. 내가 저놈을 이겨야 내가 옳다가 증명되는 격인데."
"아……."
구파일방 중에서도 나름 관계가 애매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화산과 종남처럼 대놓고 으르렁대는 곳은 거의 없다. 그 기이한 관계가 무리(武理)의 해석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윤종이었다.
"그런데 저 검은 이송백만 쓰던데? 다른 종남의 제자들은……. 그래, 매화검법 비슷한 걸 쓰던데?"
"새로운 검이지."
청명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종남을 몰락시킬."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저 검이 더 강해 보이는데."
"겉뿐이야."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문파의 무학이라는 건 더 강하고 약하고가 전부가 아냐. 모든 무학은 그 문파가 추구하는 하나의 도(道), 혹은 선(善)을 따르기 마련이지. 문파의 근본을 잃고 강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그 강함마저 내어 놓아야 하는 법이지."
"……그럼 종남이 무너진다는 거냐? 예전 우리처럼."
"화산은 잃은 거야."
하지만 종남은 스스로 버린 것이다.
그 차이는 생각 이상으로 클 게 분명했다.
청명이 슬쩍 이송백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모르지. 당장의 몰락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새 씨앗이 얼마나 잘 자라느냐에 따라서 언젠가는 지금 이상의 거목이 자라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흥한 것은 언젠가는 쇠하기 마련이고, 쇠한 것은 언젠가는 다시 흥하기 마련이지. 그렇게 흘러가는 게 세상이다."
그런 그를 백천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니까 너 꼭 도사 같다."
"그러게요."
"안 어울리네."
"……이것들이."
버럭 하려던 청명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가서 딴 돈이나 챙겨 올게."
"아! 그 전에."
조걸이 살짝 손을 들더니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이송백인가 하는 놈이 얼마나 잘해 주느냐에 따라서 종남이 어떻게 될지 정해진다는 거냐?"
"아마 그럴 거야."
"……그럼 망했네."
"패망이네. 답이 없어."
"애도."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대진표 안 봤냐?"
"뭘?"
조걸이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네가 오늘 이기면 다음 상대가 쟤야."
"……."
"사숙이 진금룡, 네가 이송백."
"진짜?"
"안타깝게도?"
어…….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
허허허허.
* * *
"모두 잘해 주었다."
현종이 더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오늘 패한 이들은 아쉽겠지만 실망하지 말거라. 길고 긴 너희의 삶에서 이 비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짤그랑. 짤그랑.
"낄낄낄낄낄."
"으헤헤헤헤헤헤!"
"……패배에 가슴이 아프겠지만, 그 상처는 너희를 더욱 단련시킬 것이다."
짤그랑. 짤그랑.
"흐흐흐흐흐."
"꺄르륵! 꺄륵!"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본분을 다하…… 다하여……."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여기 자루 하나 더!"
"자루 하나 더!"
"화, 화산의 제자임을 잊지 말고……."
짤그랑. 짤그랑.
"에라이! 이 썩을 놈들아!"
현종이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청명을 향해 냅다 던졌다.
그러자 청명의 옆에 있던 현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어 날아드는 부채를 휙 잡았다. 그러더니 옆에 턱 하고 내려놓는다.
"왜 또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장문인?"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현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놈의 돈 좀 다른 데 가서 세면 안 되느냐!"
"저희가 먼저 자리를 잡았는데 장문인이 오신 것 아닙니까? 장문인, 최근에 권위주의적으로 변하셨습니다."
현종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권위주의?
옆에서 청명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거기에 올챙이를 발로 차는 개구리가 되셨죠. 돈을 세는데 방해를 하다니! 예전 같으면……!"
"……."
현종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자 백천이 가만히 다가와 현종의 양 어깨를 잡고 가볍게 주물렀다.
"그러지 마십시오, 장문인. 저희는 다 이해합니다."
"……."
하지만 현종이 그러거나 말거나 현영과 청명, 그리고 위립산은 말 그대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자루마다 가득가득 들어찬 금자와 은자, 그리고 전표를 분류하고 세는 손길이 쾌속하기 짝이 없다.
"으헤헤헤헤헷! 이게 다 얼마야?"
"장로님, 수수료로 번 돈이 장난이 아닙니다!"
"백상아! 가서 자루 하나 더 가져오거라! 하하하핫! 돈을 보관하는 게 문제구나, 문제야!"
"그건 제 자루예요! 건드리지 마세요!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거 깐깐하기는!"
그 혼란의 장을 보던 현종이 한 손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숫제 도박판에서 큰돈을 번 흑도 놈들이 정산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만면에 비열한(?) 웃음을 띠고 돈을 세는 세 사람을 보고 있으니 여기가 화산의 처소인지 청명파의 처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저놈은 또 왜 저기 껴 있어.'
현영의 옆에서 열심히 돈을 나르는 백상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나다 못해 입으로 불도 뿜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끄으으응. 이 좋은 날에……."
오늘 화산은 더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몇몇 패한 제자가 생겼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육십사강에 열명의 제자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천하의 명문들이 모두 참가한 비무대회에서 살아남은 예순네 명중 화산의 제자가 열 명이나 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더구나 오늘 비무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선보인 매화검법은 관중들과 타 문파에게 확연한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했다.
경사에 경사가 겹쳐 겹경사가 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래. 저것도 경사지. 그래."
돈을 번 것도 경사지. 돈을 번 것도.
저리 떼돈을 벌어 왔는데 지켜보는 사람이 속 터지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이 망할 것들아!
현종이 깊이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여하튼 오늘은 푹 쉬고 내일도 최선을 다하거라."
"예, 장문인!"
"에잉!"
현종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몸을 획 돌렸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한 대화가 들려왔다.
"왜 저러신대요?"
"쯧쯧쯧. 너는 아직도 장문인의 깊은 뜻을 모르느냐?"
"네?"
현영이 살짝 청명을 나무라는 소리에 현종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장로라고 저놈이…….
"돈을 그리 벌었는데 장문인 용돈도 안 챙겨 드리니 속이 상하신 것 아니더냐! 그 정도는 미리 짐작해서 적당히 찔러 드려야지."
"아! 그러네. 제가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어서 드리거라. 쯧쯧."
현종이 눈을 까뒤집었다.
'저…… 저런 걸 장로라고 내가……. 내가!'
그때 청명이 쪼르르 달려와 현종의 품 안에 금자를 슬쩍 찔러 넣었다.
"애들 모르게 쓰십시오. 장문인."
"……."
"헤헤. 부족하시면 또 말씀하시고요."
"청명아."
"예?"
"……고맙다."
"헤헤. 별말씀을요. 헤헤헤."
속이 뒤집어지는 건 뒤집어지는 거고, 오는 금자를 밀어 내지는 않는 현종이었다.
아니, 뭐 이 정도는 받아도 되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