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끝은 또 다른 시작이지. (5)
"절대 종남 놈에게만은 지지 않겠습니다!"
"……."
"걱정 마십시오, 사숙! 제가 저 얌생이 같은 놈의 대가리를 깨고 돌아오겠습니다!"
"어……. 그. 그래."
백천은 투지에 불타는 당소소를 보며 커다란 의문을 하나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종남을 싫어하는 건 화산의 제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이건 화산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화산의 입문하는 그 순간부터 종남의 제자들에게 이 년마다 한 번씩 두들겨 맞는 게 관례처럼 되어 버렸으니 악감정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소소야. 너는 아직 화산에 입문한 지 한 해도 되지 않았잖으냐?'
네가 왜 종남에 악감정이 있느냐?
화산화(化)가 너무 과도하게 빠른 것 아니니?
백천이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아직 당가에서 보았던 그녀의 한 떨기 꽃 같던 모습을 기억하는 그에게는 비무대로 달려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면 볼수록 새로웠다.
"잘하겠지……?"
백천이 유이설을 돌아보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의 검. 소소는 아직 체화하지 못했어요."
"그렇긴 하지만."
"이기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의지."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험이겠지.'
화산이 당소소에게, 나아가 청자 배들에게 바라는 것은 승리하여 화산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화산의 중심이 될 그들이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 더 높은 곳까지 향할 동력을 얻는 것이다.
'바란 것에 비하면 몇 배는 잘해 주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윤종과 조걸을 제외한 청자 배는 다른 백자 배들에 비해 아직 손색이 있었다.
응?
청명?
그 새낀 빼야지.
백천이 살짝 걱정 어린 눈으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종남!"
"……."
이송백은 적의 어린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당소소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초면에 저런 도끼눈이라니.
"……종남의 이송백입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화산의 당소소예요!"
당찬 자기소개였다. 이송백이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내게는 눈이 있으나 내 검에는 눈이 없으니 부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뭐래. 대가리나 조심하시지?"
"……."
아.
확실히 화산 사람이구나.
당소소의 등 뒤로 청명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송백이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허리를 바짝 세웠다.
당소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종남 놈에게는 절대 안 진다.'
이상하게 종남의 하얀색 무복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당가에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화산에 입문하고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보면 둘 사이에 흐르는 수맥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여하튼!
챙!
당소소의 매화검이 뽑혀 나왔다.
아직 그녀는 화산 검술을 완숙하게 익히지 못했다. 육 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무학의 수준은 높였으나, 십여 년 동안 검을 익혀 온 사형제들을 따라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해서 물러남이 당연하다는 건 아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스스로의 길을 관철하는 것.
그게 당소소가 생각하는 화산의 가르침이었고, 그녀의 의지였다.
차가운 눈으로 이송백을 응시하던 당소소가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간다!"
단단한 청석을 박차며 날아드는 그녀의 모습은 숫제 비호와도 같았다.
쇄애애액!
가녀린 팔에서 나왔다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패도적인 일격!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학이지, 내력이 아니다.
당가주의 딸로서, 내력만큼은 그 어떤 명문의 수제자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꾸준히 단련해 왔다.
거기에 자소단까지 더해졌으니 그녀의 내력은 사실 화산에서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내력을 온전히 실은 검이 이송백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이송백이 가볍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콰아아아앙!
당소소의 검이 그가 사라진 비무대의 바닥을 후려치며 거대한 폭음을 만들어 내었다.
"……."
깊게 패여 버린 비무대 바닥을 본 이송백의 눈이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위력에 당황한 것이다.
"피해?"
"……그걸 맞으라는 말이오?"
이송백이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화산의 문하들은 독특한 면이 있다.
'과거의 나라면 저 모습을 좋지 않게 봤겠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겉으로 예를 논하고 체면을 차리면서 속이 부실한 것보다는, 겉으로 어떤 모습을 취하든 내실을 기하는 쪽이 진정한 무인의 자세라는 것을 말이다.
이송백이 슬쩍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있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잘 봐 주시오. 청명도장.'
나의 지난 이 년이 틀렸는지, 아닌지.
내가 당신이 말하던 그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왔는지!
이것은 비무다. 하지만 단순한 비무가 아니기도 했다.
이송백에게 있어 이 자리는 청명에게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후우."
이송백이 검을 들어 중앙을 겨누었다.
중단세.
모든 검의 기본이 되는 자세.
그의 호흡이 낮아졌다. 주변 공기가 무겁게 또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낮게. 또 낮게.'
간결한 검과 안정된 무게 중심은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만든다.
모두가 알면서도 쉬이 지키지 못하는 것.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정석'이라 부른다.
카앙!
이송백의 검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드는 당소소의 검을 느릿하게 받아 냈다.
결코 강하지 않게. 하지만 약하지도 않게.
중도를 지키는 검.
검을 부딪친 당소소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게 없는 검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특별한 기교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검은 지금까지 그녀가 봐 왔던 검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당소소가 바닥을 박차고 이송백과의 거리를 벌린다.
그의 진중한 눈이 그런 그녀를 쫓았다.
"……저놈."
백천의 입가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송백이라고 했었나?'
분명 화종지회에서 봤을 때는 그리 특별한 게 없던 이다. 아니, 사실 지금도 겉모습에서는 딱히 특별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금룡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남의 제자들처럼 패기로 똘똘 뭉친 것도 아니다.
겉으로만 보자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검수일 뿐이었다.
한데 다르다.
"뭐가 다른 거지?"
"기본."
백천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청명이 봇짐에서 육포를 빼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본이야."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야. 그저 기본이지."
청명이 미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검법이 뭐라고 생각해?"
"……검을 쓰는 방법이지."
"그래. 검을 쓰는 법.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을 쓰는 방법. 그런데 그 초식이라는 건 결국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청명이 손가락을 폈다.
"찌른다. 휘두른다. 막는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결국 모든 초식이라는 건 이 세 가지의 조합일 뿐이야. 검이란 애초에 그런 거지. 복잡할 게 없거든."
백천이 미간을 좁혔다.
"너무 단순화시킨 것 아냐?"
"그 단순한 것들이 모여서 복잡해지는 거야. 다시 말하면……."
청명이 살짝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찌르고, 베고, 막는 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면 검 역시 완벽해지는 거지."
"그런데 그건……."
"그래.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완벽이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니까. 완벽한 검에 집착하는 건 광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청명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천하의 소림도. 저 콧대 높은 무당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을 하려 한 검문이 하나 있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은 서른여섯 개의 방위로 이루어진다. 그 서른여섯 개의 방향으로 완벽하게 검을 찌르고, 휘두르고, 막아 낼 수 있다면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천하무적의 검수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광인이."
"삼십육방……."
"그래. 그게."
청명이 이송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직하게 말했다.
"종남의 천하삼십육검이다."
가라앉는다.
마음은 조금도 들뜨지 않았다.
손끝으로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감각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송백은 지금 자신이 근 몇 달 중 가장 완벽하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중도.'
과하지 않고 모자라지 않도록 선을 지킨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다.
종남의 검은 그 중도를 지키는 검.
강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빠르지 않다.
하지만 종남의 검은 그 어느 검보다 완벽하다.
'진즉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리 헛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다. 그가 걸어갈 길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화려함과 강함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가 지켜 나가야 할 것은 중도. 그리고 종남의 혼이다.
당소소가 살짝 굳은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지, 저 사람?'
백천, 그리고 심지어 청명에게서도 보지 못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물론 청명이야 무게감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지만, 저 검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백천의 검 이상이라는 사실이 당소소를 당황하게 했다.
'뭐 해, 당소소!'
당소소가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곳에 선 이유는?
당소소가 검을 들어 이송백을 겨눈다.
말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나의 매화를 그려 낸다.'
상대가 누구든 나의 매화를 완벽하게 그려 낸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두 검수가 냉정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그 팽팽한 긴장감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관중들은 저마다 숨을 죽이고 둘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먼저 다시 움직인 것은 당소소였다.
"타아앗!"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이송백을 향해 쾌속하게 달려든다.
파아아앙!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이송백에게로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피어나라!'
그녀가 피워 내야 하는 매화는 화산의 다른 문도들이 피워 내는 것과 그 결을 달리한다.
화산의 매화가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의 꽃이라면 그녀의 매화는 말 그대로 화우(花雨).
화산의 제자이지만 당가의 여식.
당가에서 꽃피우지 못한 그녀의 재능이 화산의 검이 되어 온 세상에 꽃의 비를 내린다(萬天花雨).
매화분분(梅花紛紛).
화산의 검이지만 화산의 검과는 다른 당소소만의 매화가 돌풍을 맞아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 이송백의 전신을 뒤덮어 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이송백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아름답군.'
더없이 아름답지만 한없이 날카로운 검.
모두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처럼 느껴진다.
하나 이송백은 서두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아앙!
다리는 굳건하게 바닥을 딛고, 어깨는 부드럽게 풀려 완벽하게 힘을 전달한다. 팔꿈치는 채찍처럼 날렵하게 검을 휘두르고, 손목은 유연하게 충격을 흡수한다.
휘두른다. 찌른다. 그리고 막아 낸다.
화산의 매화가 온 세상을 뒤덮는다 하더라도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저 삼십육방(三十六方).
그 삼십육방으로 완벽히 검을 떨쳐 낼 수 있다면, 온 산에 가득한 매화의 비도 나의 몸을 범접할지 못할지니.
종남의 검은 정석의 검. 그리고 활검의 기본은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있는 것. 세상에서 그 기본에 가장 충실한 검이 바로 종남의 천하삼십육검이다.
꿈결처럼 쏟아지던 매화가 이송백을 뒤덮은 검의 벽 앞에서 그 힘을 잃어 간다. 그렇게 흩날리다 마침내 이송백의 검벽(劍壁)에 부딪혀 추락한다.
"이!"
당소소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그녀는 다시 검을 전개하려 했다.
하나 그 순간.
파아아아앙!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벽을 깨며 돌진한 이송백의 검이 당소소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아……."
스슷.
이송백의 검이 정확하게 그녀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당소소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졌어요."
"좋은 승부였소."
이송백이 검을 회수하고는 정중하게 포권 했다.
"더없이 날카롭고 예리한 검이었소. 그 깊이가 조금만 더 깊었다면 패배한 쪽은 내가 됐을 거요."
"……승자의 여유는 인정하겠지만, 너무 잘난 척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다음에 이기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물론 기대하겠소."
사심 없이 웃는 이송백의 얼굴을 보며 당소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멀었어.'
검수와 검수로 싸워 패배했으니 후회는 없다. 이 패배는 당소소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너무 의기양양한 나머지 방심했다간 큰 코 다칠걸요. 사형들은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알고 있소."
이송백이 살짝 뜸을 들이고는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본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누구보다."
선망과 투지가 뒤섞인 그의 눈빛이 닿은 곳은 청명이었다.
"나의 목표이기도 하니까."
이송백의 눈엔 더없이 진중한 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을 받은 청명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지."
바로 저곳에서.
잿더미 속에서 종남의 새로운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