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289화 (289/1,567)

289화. 끝은 또 다른 시작이지. (4)

종리곡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비무대를 노려보았다. 제자들이 쓰러진 종서한을 안아 들고 나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나직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체면을 생각하면 절대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종리곡은 도저히 들끓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망신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쥔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관중들의 환호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정말 치명적인 일이었다.

마지막 종화지회에서 종남이 화산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꽤 유명하다. 화산의 약진이 아니라 종남의 망신이 즐거운 이들이 넘쳐나니까.

그래도 그땐 그나마 몇몇의 유지만이 목격했다. 직접 눈으로 본 이가 많지 않으니 실감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비무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도 많다. 이들이 한 번씩만 입을 떼도 천하가 모두 종남의 패배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리곡을 분노케 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어떻게?'

저 검법.

방금 종서한을 패배시킨 저 검법이 너무도 익숙하다.

종남이 열과 성을 다해 만들어 낸 설화십이식과 그 모습이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어떻게 복원해 낸 거지?! 화산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텐데?'

화산의 상징과도 같은 저 검법이!

그때였다.

"……이십사수매화검법."

법정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단상 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미타불. 화산 장문인. 화산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되찾은 것이외까?"

"그렇습니다."

"오……."

법정이 답지 않게 눈을 크게 뜨고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화산이 화산 검법의 정화를 잃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는데, 이리 복원에 성공했다니. 실로 축하할 일입니다."

"별말씀을요. 운 좋게 선조께서 남긴 비급을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과연. 화산의 약진이 불가해하다 여겼거늘. 그런 비사가 있었구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되찾았다면 천하의 누가 화산을 무시할 수 있겠소이까."

법정의 말에 현종이 고소를 머금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저 말은 사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화산이 약진을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이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회수한 일은 그런 화산의 약진에 방점을 찍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까지 저들에게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겠지.

"그저 선조들의 검을 되찾았단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종이 고개를 슬쩍 돌려 비무대를 바라본다. 시선이 이동하는 와중에 종리곡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그 검법으로 말미암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종리곡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이십사수매화검법.

화산의 상징이자 종남이 수백 년 동안 화산의 아래라는 끔찍한 평가를 받게 만든 검법.

설상가상, 화산이 그 검을 되찾았다고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검에 종남의 설화십이식이 꺾이고 말았다.

'설화십이식은 이십사수매화검법에서 더 나아간 검이다. 제대로만 익혀 낸다면 절대 이십사수매화검법에 패배하지 않는다. 절대로!'

하지만 지금 드러난 결과는 그 반대다.

종서한의 설화십이식에 대한 이해도가 백천의 이십사수매화검법에 대한 이해도에 뒤질 리가 없다.

그런데도 종서한은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종리곡은 진금룡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된다.'

종서한은 질 수 있다.

하지만 진금룡이 패하는 건 그 상징성이 다르다. 그가 패하는 순간, 종남은 당대의 후기지수들이 화산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한다.

그 치욕만은 감내할 수 없다.

게다가…….

백천이 전부가 아니잖은가?

종리곡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화산신룡.'

그리고 저 백천에 비견된다는 화산의 다른 이들까지 모두.

종리곡의 가슴속에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지금 그는 화산이 종남을 추월하는 순간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 * *

봉기가 날카롭게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촤아아악!

봉기가 공기를 가름과 동시에 조걸의 볼도 갈라졌다. 볼에서 화끈함이 느껴졌지만, 조걸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 빠르고 강하게!'

본선은 본선인지 상대의 타구봉은 날카롭다. 예선에서 겪었던 이들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강함이다.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날카로운 걸로 따지면 윤종 사형의 검이 훨씬 더 날카롭고, 섬세한 걸로 따지면 감히 유 사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체적인 수준은 백천이 훨씬 높았고, 그 기세로 따지면?

'청명의 발끝에도 못 미쳐.'

새삼 조걸은 자신이 어떤 이들과 대련을 해 왔었는지 이해했다.

홀로 수련을 했다면 결코 이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대련하고 함께 노력하는 사형제들이 있고, 아득한 곳에서도 멀리 손을 뻗어 끌고 가 주는 이가 있기에 지금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가슴은 차갑게. 머리는 더욱 차갑게!

"타앗!"

그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려 냈다.

조걸의 매화였다.

청명의 그것과는 다르고, 백천의 그것과도 다른.

화산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피어나는 매화. 그 한 송이 한 송이가 다 다를진대, 매화검법이라 해서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담지 못하고 그저 형만을 찾는 매화는 죽은 매화다. 수도 없이 들어 뼈와 심장에 박아 넣은 말이다!

그의 매화가 해를 꿰뚫을 듯 날아드는 봉을 재빨리 감싼다.

카카카캉!

검기로 이루어진 매화와 타구봉이 충돌하는 순간 쇠가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이윽고 날아들던 봉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조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번쩍!

구름처럼 피어난 매화 꽃잎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추듯 검기가 번쩍인다(梅花照光).

"어억!"

가슴으로 파고든 번쩍이는 검기에 개방의 거지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만!"

커다란 목소리가 터질 듯 들여온다.

"이 승부는 화산 조걸의 승리요!"

조걸이 검을 회수해 납검(納劍)하고는 가만히 포권 했다.

"잘 배웠습니다."

그리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돌아서서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쯤 되니 이제는 관중들도 더 이상 마음 놓고 환호하지 못했다.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이, 이러다가 정말 화산이 우승하는 거 아냐?"

"설마?"

"아니. 그리 말할 일이 아니라니까? 지금 남은 이라고 해 봐야 백여 명이 아닌가? 오늘이 지나면 예순네 명만 남게 되네. 지금도 화산의 제자가 가장 많이 남았는데, 저리 이겨 나가면 어찌 될 것 같은가?"

"……그러고 보니."

"화산이 우승을 한다면 더없이 큰 이변이 벌어지겠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야."

중인들이 입을 다물고 화산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우승을 한다고?'

화산이?

농담처럼 하던 말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농담이 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화산이 이 천하비무대회에서 우승한다면 그건 근 백 년 내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될 게 분명했다.

'이거 큰일 아닌가?'

화산은 몇십 년 전에 구파일방에서 쫓겨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비무대회에 나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쟁쟁한 후기지수들을 모조리 꺾고 우승을 한다?

그리된다면 당시 구파일방에서 화산을 쫓아내기로 했던 이들의 눈이 잘못되었다는 게 증명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파일방의 입장에서는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는 것이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는 증명되지 않았나? 화산이 지금 떨어진다고 해서 화산이 구파에 들 자격이 있다는 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그래 봐야 후기지수들인데."

"윗대는 뭐 천년만년 산다던가? 후기지수들이 저리 강한데, 훗날에는 화산이 천하제일문이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는가?"

"……없지."

"그럼 구파일방은 천하제일문을 구파일방에서 쫓아낸 머저리들이 되는 걸세. 내 말이 틀렸는가?"

"……."

누구도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함부로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불경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혹여 자신들이 뱉은 말이 구파일방의 귀에 들어갈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말로는 못 할지언정 속으로는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이 완전 망신을 당하는구만.'

'표정 한번 볼만하겠군.'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비무대회는 명문이라 불리는 이들이 모여 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는 것을.

대내적으로는 명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는 명문들의 힘을 과시한다. 그러면서 천하를 이끌어 가는 명문들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임에 분명했다.

한데 여기에 화산이 끼어들며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이대로 화산이 우승을 한다면?

'명문이라는 놈들이 차려 놓은 진수성찬을 화산이 꿀꺽하고 내빼는 꼴이 되겠군.'

중인들의 눈이 기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

평생은 물론 역사를 통틀어도 다시는 못 볼 광경일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이 관중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판이 아주 잘 깔리고 있는데?'

그가 굳이 비무대회에 한 명이라도 더 참가시키겠다고 금첩 내놓으라 발악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청명의 우승?

물론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리 잘 깔린 판에서 '화산에서 천하제일후기지수가 났다'는 결과만 받아 돌아가면 섭섭하지 않겠는가?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는 청명의 강함이 아닌 화산의 강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매화검문 화산이 오랜 절치부심 끝에 마침내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인상을 확연히 심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청명이 시선을 슬쩍 올렸다.

'저 구파 놈들에게 엿을 제대로 먹일 수 있을 테니까.'

아마 이제는 더 이상 편히 비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진 너무 화기애애했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줄 테니 기다리라고.

"청명 도장! 여기 배당금을……."

"아, 맞다!"

청명이 싱글벙글 웃으며 좌판으로 달려갔다. 품에서 새 자루를 꺼내어 판돈을 쓸어 담았다.

"묵직하니 좋고!"

그는 희희낙락하며 자루를 챙기고 다시 전표 뭉치를 움켜잡았다.

"다음 시합은 종남의 진금룡과 청성의……."

"진금룡에 만 냥!"

"다음 시합은 남궁의 남궁도위와……."

"남궁도위에 만 냥!"

"화산의 윤종과……."

"화산 윤종에 오만 냥!"

"유이설에 오만 냥!"

..

"혜연에 십만 냥!"

"백공에 삼만 냥!"

촤르르르르르르륵!

청명의 뒤로 꽉 찬 자루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이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걸 다 맞혔어?'

'도신인가?'

'이쯤 되면 조작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몇몇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승부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곳에 모인 이들도 전 재산을 걸고 승부를 예측하라고 하면 대충 팔 할의 확률은 자신할 수 있다.

문제는 남은 이 할이다.

팔 할을 맞힐 수 있다는 말인즉슨, 이 할은 틀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싸우기도 전에 승부의 결과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비무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 이 할의 확률 때문에 돈을 잃는 이들이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저 청명이라는 자는 벌써 몇십 판의 승부를 모조리 맞추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쌓인 돈 자루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슬쩍슬쩍 쌓인 재물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으히히힛!"

'저, 저!'

'도사라는 놈이!'

'아오, 얄미워!'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남의 수중에 쌓인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 도박꾼들의 눈이 점점 험악해졌다.

"다음은 화산의 당소소와 종남의……."

위립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독이 오른 도박꾼들이 외쳤다.

"당소소에 사백 냥!"

"나는 당소소에 천 냥!"

"당소소에 이천 냥!"

"헉? 이천 냥이나?"

"모르는 소리 말게! 지금까지 화산이 모조리 이겼단 말일세! 게다가 저 도장도 화산 사람 아닌가? 지금까지 저 사람은 화산의 제자들이 나올 때마다 모두 그쪽에 걸었네! 배당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이겨야지!"

역배당을 노리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다들 당소소 쪽에 오늘 가진 돈 모두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큰돈을 먹느니 청명을 따라 걸어서 착실하게 돈을 따겠다는 심산이었다.

순식간에 당소소 쪽 좌판에 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흐으으음."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제 보는 눈들이 조금 생기신 모양이네요."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판이 좀 쏠린 것 같은데."

청명은 등 뒤에 있는 자루에서 주섬주섬 전표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턱!

그가 던진 전표는 무더기로 쌓여 있는 판돈의 반대쪽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종남의 이송백에게 십오만 냥."

"……."

도박꾼들이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요?"

"……."

네가 거기 걸면 안 되지!

이 망할 말코 놈아!

중인들의 눈에 부연 습기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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