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끝은 또 다른 시작이지. (1)
본선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딱히 변한 건 없었다.
그저 분위기가 조금 더 진중해지고, 기대감이 조금 더 높아진 것 정도?
그리고, 단상 위에 마련된 장문인들의 자리.
그곳의 배치가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진 것 하나뿐이다.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와 같은 위치라니.'
현종이 슬쩍 자신의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의자가 위치한 자리를 확인했다.
단상의 가장 앞.
소위 명문이라는 이들의 뒤통수를 바라봐야 했던 두 번째 열이 아니다.
가장 앞자리. 오직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만이 앉을 수 있는 가장 앞자리에 그의 의자가 추가된 것이다.
- 자리가 딱히 중요할 건 없으나, 가장 많은 제자를 본선에 올린 문파의 장문인이 저리 뒤에 앉아 있으니 제가 조금 민망합니다.
당군악의 그 말이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내심 찔리는 면이 있었던 장문인들이 간단히 합의하여 화산의 자리를 가장 앞 열로 바꾸었다.
후기지수들의 활약만으로 평가한 것이기는 하나, 어쨌든 이 순간 화산은 구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하의 명문으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였다면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을 쏟을 만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현종은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주변의 다른 장문인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귀에 콱콱 쑤셔박혔다.
"도박이라니……."
"신성한 소림에서 도박판을 벌이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저 사람은 대체 어느 문파 사람이오?"
"듣자 하니 화영문의 문주라고 하는데."
"화영문? 들어 본 적 있는 분 계십니까?"
화영문과 도박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현종은 엉덩이에 바늘이 박힌 사람처럼 움찔움찔했다.
'환장하겠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저 좌판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단상 위로 올라와 버린 이상,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었다.
그때 무당의 장문 허도 진인이 미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화영문이라면……."
살짝 느릿한 그의 목소리가 주변의 이목을 확 잡아끌었다.
"제가 아는 곳 같습니다만?"
"……."
그를 바라보는 현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과거 화산은 화영문의 진퇴를 두고 무당과 충돌한 적이 있다.
그러니 무당 장문인인 허도는 화영문이 화산의 속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허도 진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현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종은 그 미소가 독사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아신다고요? 화영문이 어디에 있는 문파입니까?"
"어찌 저런 곳이 소림에 와 물을 흐린단 말입니까? 어서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장문인."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현영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문제 될 게 있습니까?"
"……예?"
담담하게 입을 연 당군악이 장문인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소림입니다."
"그렇지요. 소림이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 소림이 아니면 도박을 하든 말든 우리가 왜 왈가왈부하겠습니까?"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찌 처리할지는 오로지 소림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언행에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그 질책 하나하나가 소림을 탓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소림이 허가하지 않았다면 감히 누가 함부로 좌판을 열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장문인들이 일제히 소림 방장 법정을 바라보았다.
법정이 그 모인 시선들을 마주하며 웃었다.
"괜찮지 않겠습니까?"
"바, 방장."
"하나, 어디 신성한 소림에……."
장문인들의 시선에 당황이 어렸지만, 법정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저는 소림이 신성한 곳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
법정이 가볍게 합장을 했다.
"소림이라고 해 봐야 세상에 흔히 있는 절간에 불가합니다. 그저 땡중들이 조금 더 많을 뿐이지요. 그런데 뭐 그리 대단한 곳이라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즐기지 말라 하겠습니까?"
"으음."
차마 동조하지도 못하고 불편하게 헛기침하는 장문인들을 보며,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엄격해야 하는 것은 자파의 제자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 문파의 제자들을 봐 주러 오신 분들께, 저희에게 무작정 맞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오히려 저렇게라도 흥을 내 주신다면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법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칭송과 동조의 말이 쏟아졌다.
"과연 방장이십니다."
"허허, 하기야 이 자리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지요."
논리가 옳은가는 중요하지 않다.
소림의 방장이 그리 말한다면 반박할 수 없는 법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들 천하를 이끌어 나가는 문파의 장문인이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한다.
이게 소림이 역사와 함께 쌓아 온 힘이다.
평소라면 소림이라는 거대한 문파가 지닌 힘에 전율했을 현종이지만, 지금은 그저 이 일이 어찌어찌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느낌이로구나.'
겨우 회춘했더니 늘어난 수명이 하루하루 팍팍 깎여 나간다.
몰래 앓는 소리를 낸 현종이 도끼눈을 뜨고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남은 수명이 없어져도 좋으니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평판은 날려 먹은 거나 다름없으니 성적이라도 챙겨야지. 성적이라도!
이 망할 놈들아!
"장문인이 고초를 겪고 계신 것 같은데?"
"응?"
백천의 말에 청명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저 도박판 말이다. 저거……."
"아, 맞다!"
청명이 박수를 짝 쳤다.
"나도 걸어야 되는데."
"……."
청명이 품 안에 손을 넣더니 전표 뭉치를 꺼냈다.
"……뭐, 뭔 돈을 그렇게 가져왔냐?"
"돈은 어떻게든 쓸데가 있는 법이지. 거봐, 가져오니 쓸데가 생기잖아."
숫제 도박판을 휩쓸어 버릴 기세다.
히히 입을 벌려 웃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봤다.
"뭐냐, 그 눈빛은? 갑자기 재수 없게."
"사숙."
"응?"
"첫 판에 사숙한테 다 걸 거거든? 지면 뒈질 줄 알아."
"……."
"만에 하나 지는 날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돈 벌게 만들 테니까 잘해. 북해 탄광에서 곡괭이로 매화검법 펼치기 싫으면 죽어도 이기는 게 좋을 거야."
"……."
사질이 사숙에게 하기에는 너무 따뜻한 말이었다.
"청명아."
"응?"
"하나 물어도 되냐?"
"언제는 안 물었어? 마음대로 물어봐."
"너는 누가 우승할 것 같으냐?"
청명이 세상 다시 없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백천이 정색했다.
"너는 빼고."
"응?"
"너 빼고 남은 이들 중에서 우승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이가 누구냐?"
아, 날 빼고?
청명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가볍게 볼을 긁적인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는데?"
"……몰라?"
"물론 누가 제일 센지는 알지. 그런데 비무라는 건 꼭 센 쪽이 이기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백천이 막 뭔가를 더 물으려는 순간 청명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개중 가능성이 있는 놈들은 보이지. 일단 그 소림의 땡중."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혜연이라고 했던가?'
그 일격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 한 수만으로도 우승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할 듯 보였다.
비무를 지켜봤던 이라면 누구도 이 예측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청명이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아, 그리고 그 남궁세가 놈도 세던데?"
남궁도위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백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무당에도 하나 있는 것 같고, 팽가 놈 중에서도 센 놈이 있었지. 그리고 음…… 금룡이도 아직까지는 우승후보로 쳐 줘야 하지 않을까? 어지간한 놈은 걔를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
"……남궁세가와 무당, 그리고 팽가에 종남이라."
모두 남 부럽지 않게 천하를 울리는 이들이다.
"그 외에도 한 서넛 정도? 사실 그중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진 않지."
"그럼 네가 없었으면 그중 하나가 우승했을 거란 소리냐?"
"아니."
"……그럼?"
청명은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얼굴을 구겼다.
"내가 없으면 우승은 사숙이 해야지. 당연한 것 아냐?"
"……."
"왜? 자신 없어?"
잠깐 침묵하던 백천의 입가가 미묘하게 꿈틀댔다.
"자신이 없냐고?"
그 순간이었다.
"화산의 백천!"
백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청명을 돌아보았다.
"증명하고 돌아올 테니 기다려라."
"호오?"
그리고 더없이 멋들어진 자세로 비무대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검은 무복을 입은 백천이 넓은 어깨를 펴고 걷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그 근사한 모습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쟤도 참 단순하단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아, 물론 우승 후보 중 하나가 백천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확률로 따진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들고도 남는다.
하지만 우승까진 어렵다.
괴물이 하나 있으니까.
청명의 시선이 소림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혜연이라고 했었나?'
저놈은 답이 없다.
지금의 백천은 아마 저놈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승부를 논할 때의 일이고, 실력을 두고 논하자면 굳이 저울에 올려 볼 필요도 없는 수준이다.
몇 년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비교는 지금 하는 거니까.
"어, 그리고……."
청명이 볼을 긁었다.
"종남에 한 명 더 있다는 말을 안 했네."
뭐 괜찮겠지?
비무대에 오른 백천은 자신의 상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름이 종서한이었지.'
종남 이대제자 중 이인자 격인 인물이다. 예전부터 진금룡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이였다.
종서한이 백천이 보며 입꼬리를 뒤틀며 미소 지었다.
"이거, 공교롭게도 잘나신 백룡을 만나게 되었군."
"……."
"각오는 되었겠지?"
백천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종남의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진금룡이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어딜 보는 거냐?"
"……."
"헛된 명성을 얻더니 정말 자기가 잘난 줄 아는 모양이로군. 너는 감히 사형을 볼 자격도 없다. 잊지는 않았겠지? 너희 화산의 이대제자들은 단 한 번도 종남을 이긴 적 없다는 걸. 네 그 명성은 결국 저 빌어먹을 화산신룡 놈의 옆에서 주워 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랄하고 날카로운 도발이었다.
하지만 정작 백천은 더없이 태연했다.
"어. 그렇지. 인정해."
"……뭐?"
"인정한다고."
종서한이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자존심이 없단 말인가?'
어찌 이런 말을 듣고도 저리 태연할 수 있는가.
하지만 백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화산의 이대제자는 종남의 이대제자를 이긴 적이 없고, 내 명성은 분명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지."
"……."
"그런데 그게 뭐 중요한가?"
스르르릉.
백천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지금까지 이긴 적이 없다면 이제부터 이기면 될 일이고, 명성이 과하다면 그 명성이 과하지 않도록 만들면 될 일이지. 미안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너희처럼 과거에 붙들려 살지 않아."
"이놈이!"
발끈하는 종서한을 보며 백천은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다.
과거의 그는 진금룡을 이기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수련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그는 진금룡은커녕 눈앞에 있는 종서한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화산과 종남은 그만큼 격차가 컸다.
"아. 하나는 정정하지."
백천의 말에 종서한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화산은 과거에 붙들려 살지 않지만, 나는 조금 쪼잔해서 그런지 과거에 집착하는 모양이다. 예전에 너희에게 박살이 났던 기억이 아직 들러붙어 있거든."
백천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톡톡 쳐 보였다. 종서한이 매섭게 이를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라.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 주마. 이토록 많은 이들 앞에서 다시 한번 박살 나는 경험은 그리 쉽게 할 수 없을 테니 평생 머릿속에 남을 거다."
"바로 그거야."
백천이 빙긋 웃었다.
"네 말대로 종남을 이겼던 건 청명이지, 우리가 아니야.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군. 대진표를 보니 너를 이기면 다음은 진금룡이던데."
그리고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종서한을 바라본다.
"아직 화산에 들러붙어 있는 종남의 망령을 내 손으로 완전히 베어 주지. 덤벼 봐. 종남은 더 이상 화산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일 테니까."
이십사수매화검법의 기수식을 펼친 백천이 검을 들어 종서한을 겨눴다.
검은 무복과 새하얀 영웅건.
그 손에 들린,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검.
거기에 더없이 돋보이는 외모까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웅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 훌륭한 풍모에 관중들이 다들 넋을 잃고 백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 한 명.
종서한만은 그 모습을 냉정히 바라보지 못했다.
"어디 그 검이 네 주둥아리만큼 날카로운지 보자!"
"걱정할 것 없어. 충분히 날카로우니까!"
"이익!"
말로 한차례 밀려 버린 종서한이 이를 갈아붙이더니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진금룡이 칼날 같은 눈빛으로 싸늘하게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봐 두는 게 좋을 겁니다, 형님.'
종남은 청명이 아닌 백천의 손에 무너질 테니까.
그것이 한때 종남에 뜻을 두려 했었던 백천의 마지막 배려가 될 것이다.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 비무대 위를 보며, 윤종이 주먹을 꽉 쥐었다.
"청명아, 사숙이 이기시겠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청명아?"
윤종이 돌아보자 청명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옆에 조걸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돈 걸러 갔습니다."
"……."
진짜…….
문파 꼴 잘 돌아간다.
아주 바람직하네,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