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5)
"뭐?"
현영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을 찾아와서, 지금 뭐라고?"
백상은 황당해하는 현영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재경각에 들고 싶습니다."
"……굳이 이 상황에?"
"물론 이 말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시기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더없이 원하는 일이니,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허허."
현영이 황당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쁜 일은 아닌데.'
이제는 백자 배에서도 재경각에 들 이를 찾을 시기였다.
지금이야 백자 배고 청자 배고 모두가 수련에 전념하는 시기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화산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흘러들어오는 돈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기존 재경각의 인력만으로는 화산의 재무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참이다.
그런데 선뜻 이리 나서 주는 이가 있으니 기꺼워할 일이 아닌가?
"한데 왜 갑자기 재경각에 들겠다는 거냐?"
"고민을 해 봤습니다만……."
"그래."
"저는 무공으로는 다른 사제들을 못 이깁니다."
"네가 벌써 그런 생각을 할 나이는 아니다."
현영의 말에 백상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장로님! 저는 저를 잘 압니다. 지금이야 비등해도 언젠가는 저놈들이 저를 앞설 것입니다."
현영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무공으로 길이 보이지 않으니 재경각에라도 들겠다는 것이더냐? 그게 편해 보여서?"
"아닙니다!"
"응?"
너무도 단호한 백상의 목소리에 현영은 살짝 당황했다. 조금 노기가 일 뻔했던 마음이 조금 더 들어 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장로님! 저는 저놈들의 사형이고, 사숙입니다. 제가 무학적인 재능이 떨어진다 해도 저놈들에게 밀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오?"
이것 봐라?
현영이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 본 결과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화산의 진짜 권력은 바로 재경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
백상의 두 눈에선 숫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화산이 다시 옛 기세를 찾아 가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무학? 예, 그렇겠죠. 인재? 뭐,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산에 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옳지! 옳지! 네가 뭘 아는구나!"
"돈! 돈을 지배하면 권력을 지배한다! 저는 발바닥에 땀나도록 구르는 놈이 되기보다는 손가락이 닳도록 돈을 세는 놈이 되고자 합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장로님! 아니, 재경각주님!"
현영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속물적이고 간악한 것이, 재경각에 딱 어울리는 인재가 아닌가?
'사실 찍어 놓기는 조걸이 놈을 찍어 두긴 했었는데.'
그놈이 상인 집안 출신이라 재경각에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어느새 청명에게 물들어서 머리보다 몸뚱이를 먼저 쓰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야 훌륭한 재경각주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백상의 말을 들어 보니 이놈이야말로 후대의 재경각주를 역임할 인재임에 틀림없었다.
"기특하구나. 그래, 그 생각을 너 혼자 했더냐?"
"……아니, 그런 건 아니옵고……."
"그럼?"
백상이 머리를 살짝 긁었다.
"간밤에 청명이와 이야기하다가 떠올렸습니다."
"그래? 청명이와 이야기를 했어?"
현영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역시 청명이구나.'
알아서 이런 인재를 재경각으로 보내 주다니. 분명 청명이 이놈의 재능을 알아보고 슬슬 재경각 쪽으로 떠민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루아침에 이리 마음을 정하고 그를 찾아오겠는가?
"네 마음이 진정 확고하더냐?"
"그렇습니다, 장로님!"
현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장문인께 말씀드려 너를 재경각 소속으로 받아들이겠다. 다만 재경각 소속이 된다면 지금과 같이 수련에 전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양립하겠습니다."
"양립?"
"예!"
백상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재경각에 소속된다 하여 무인의 본분을 잊을 생각은 없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최대한 무인으로서의 저와 재경각원으로서의 저를 양립시켜 볼 생각입니다."
"흐음."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쉽지 않겠지만, 의지가 있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네 수련을 위해서 내가 너의 사정을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명심하거라."
"물론입니다."
"그래, 알겠다."
현영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람도 들어오고, 돈도 들어오고. 재경각은 그가 재경각주로 취임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그가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돈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럼 옆으로 좀 비켜 앉거라."
"예?"
"본래는 네게 보여 줄 만한 광경은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너도 재경각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야겠지."
백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재경각의 일을 보여 주시려 하는구나.'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눈에 확실하게 새겨야 한다.
그가 옆으로 물러나 앉자 현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게."
끼이이익.
그러자 곧장 문이 열리더니 화영문주 위립산이 들어섰다.
"장로님께서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현영은 그를 보며 더없이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어서 오거라."
"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위립산이 부담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저 환대가 무척 기껍고 좋았으나, 하루하루 현영을 겪어 갈수록 뭔가 미묘한 느낌이 자꾸 든다.
"어인 일로 찾으셨는지요?"
위립산의 물음에 현영이 웃었다.
"이보게, 화영문주."
"예, 장로님."
"자네는 화산 속가의 문주로서 이곳에 왔네. 그렇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만?"
"속가는 화산의 소속인가, 아닌가?"
위립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고민했다.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하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진 탓이다.
"다, 당연히 화영문은 화산의 소속이……."
"크흐흐흐흠!"
"……라고 생각하지만, 속가와 본산은 엄격히 분리되어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속가가 아니라 지부라 불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자네가 뭘 좀 아는구먼."
가까스로 현영이 원하는 대답을 해 낸 위립산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다.
"그런데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요?"
"이보게, 화영문주."
현영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운을 떼었다. 일견 더없이 인자해 보이지만 그 웃음에 가려진 두 눈이 무척 빛나고 있었다.
"자네 돈 한번 벌어 볼 생각 없는가?"
"……예?"
현영이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살짝 흔든다.
"돈."
"……."
화영문주 위립산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 * *
본선이 열리는 날은 금방 찾아왔다.
이틀간의 고요함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해가 뜨기 무섭게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부터 본선이구나!"
"지금까지야 그냥 여흥 아닌가! 이제부터 진짜 천하비무대회가 열리는 게지!"
"그렇지! 그렇지! 예선만 보고 돌아간 이들이 비무대회를 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게 진짜 비무대회지!"
사람들의 얼굴은 벌써부터 흥분으로 가득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진정한 천하비무대회는 오늘부터 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천하의 명문들이 쟁쟁한 후기지수들을 내보냈다고는 하나, 모두를 모아 놓으면 그 수가 천을 넘어간다.
그중 천하에 이름을 날릴 고수가 몇이나 되겠는가?
기껏해야 일 할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부터 열리는 본선은 그 거르고 걸러진 일 할이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승부의 장인 것이다.
이곳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날리는 이들이 훗날의 천하를 이끌어 갈 동량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닌가?
때문에 소림에 모여든 군중의 수는 예선 때를 훌쩍 넘어섰다.
"엄청 많네."
"그러게."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뭐야? 뭘 파는 것 같은데?"
"사람이 이리 많으니 먹을 것도 좀 팔고 그래야겠지. 청명아, 저기 당과 판다."
"어디? 어디?"
청명이 고개를 획획 돌렸다.
사람들이 모인 뒤쪽으로 음식을 파는 이들과 간단한 물건을 파는 행상들이 모여 난전이 열려 있었다.
"저긴 뭐지?"
"응? 사람이 유독 많이 몰린 것 같은데?"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현종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많이도 왔구나."
"난전을 보고 있으니 배가 고픈 것 같습니다. 장문인, 뭐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아니다. 나야 곧 단상으로 가 봐야 하니 뭘 먹을 시간이 없겠구나."
빙그레 웃으며 난전을 바라보던 그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긴 딱히 뭘 파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찌하여 사람이 저토록 많이 몰려 있느냐?"
현종의 말에 현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커다란 좌판을 바라보았다.
"홍과 청……. 배율? 으음……. 아마도 내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기? 도박 말이더냐?"
"그래 보이지 않으십니까?"
현종이 입을 쩌억 벌렸다.
"도, 도박이라고?"
소림에서?
이 신성한 소림에서 내기 도박을 한다고?
"허허허허. 소림에서 저걸 허락했단 말이더냐? 아니, 설사 소림이 허락을 했다고는 해도 저런 일을 벌일 담량이 있는 이가 있다니. 과연 오래 살고 볼 일이로다."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고는 우리 애들만 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설마 우리 말고도……. 어……?"
현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좌판의 뒤쪽에서 커다란 판때기를 들고 사람을 끌어모으는 상인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생긴 게 꼭 화영문주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꼭 닮지 않았……."
닮았다.
너무 닮아서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어……?
"……화, 화영문주?"
멍하게 벌어진 현종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니, 위립산이 왜 저기에……."
그 순간이었다.
위립산이 손에 든 부채를 쫘악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리더니 크게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자아! 시작 전에 거셔야 합니다! 시작 전에! 비무가 시작되면 더 이상 걸 수 없습니다! 돈을 거신 분은 옆에서 표를 받아 가십시오! 인장이 찍히지 않은 표는 환전이 되지 않으니 절대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표? 인장? 환전?
"거, 걸어?"
현종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저게 뭘 하는 것이더냐?"
"……도박판을 여는 거겠죠."
"그럼 저 좌판 주인이 화영문주 위립산이란 말이더냐?"
"……."
"아, 아니, 저 미친놈이?"
신성한 소림에서 도박판을 벌인 놈이 화산 놈이라고?
현종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고개를 획획 돌려 가며 급하게 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 이놈 어디 있느냐?"
화영문주?
아니다!
그가 아는 위립산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홀로 벌일 만한 위인이 못 된다.
보나마나 저 짓을 시킨 이가 따로 있을 것이다!
"청명! 청명이 이놈 어디에 있느냐!"
"네?"
사형제들에게 파묻혀 있던 청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현종이 그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네 이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네? 뭘요?"
"저거! 저 도박판을 열라 한 게 네 녀석이 아니더냐?"
"도박판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청명이 위립산이 있는 쪽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와. 화영문주 저 양반, 보통이 아니네. 왜 내가 저 생각을 못 했지?"
"……네가 아니라고?"
"네. 저 아닌데요?"
정말 영문을 몰라 하는 청명을 보며 현종은 큰 혼란에 빠졌다.
청명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구…….
"크흐흠!"
그때 등 뒤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현종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영.
그의 사랑스러운 사제이자 화산의 재경각주인 현영이 기름이 좔좔 흐르다 못해 윤기가 도는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현종이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냐?"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이냐?"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현영이 어깨를 으쓱한다.
"저 일은 화영문주 위립산이 개인적으로 한 일일 뿐입니다. 제가 아무리 화산의 장로라고는 하나, 속가의 일에 일일이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도, 도박판을 벌인다고? 소림에서?"
그러자 현영이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현종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고 슬쩍 끌어당겼다.
"반 떼 주기로 했습니다."
"……."
"중놈들이 생각보다 돈을 밝힙디다. 저기 난전을 연 사람들도 다들 번 돈의 절반을 떼 주기로 하고 자리를 받은 겁니다. 거기에 도박하지 말란 소리는 없더군요. 제가 미리 알아보았지요. 후후후후."
"……."
"후후후.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문인. 떼돈! 떼돈을 벌 수 있……."
"야! 이! 미친놈아!"
한참 부들거리던 현종이 현영의 엉덩이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그리고 핏대가 선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청명이 놈한테 사고 치지 말라고 했더니, 문파의 장로라는 놈이 되레 사고를 치고 있어?! 이게 한 문파의 장로라는 놈이 할 짓이냐!"
"쉿!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날아갔던 현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재빨리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음산한 얼굴로 속삭였다.
"화영문이 한 일입니다, 화영문이. 화산은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현종은 혈압이 오르다 못해 거의 넘어갈 기세로 뒷목을 잡았다.
이 망할 놈의 문파!
이제는 하다못해 장로 놈까지 미친 짓을 하는구나!
"야, 야 이놈아. 체면도 모르느냐!"
"화산에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언제 우리가 체면 차려서 득 본 적이 있습니까? 돈이 남는 겁니다, 돈이!"
"끄, 끄으윽……."
"그리고!"
현영이 씨익 웃더니 청명을 끌어당겨 그의 머리를 짚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화산의 체면은 이놈이 살려 줄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냐, 청명아?"
"네. 그런데 저도 돈 걸어도 돼요?"
"그럼, 그럼. 네가 이기는 데 걸겠지?"
"당연하죠."
"그래! 어디 돈 한번 크게 벌어 보자꾸나. 하하하하핫!"
"히히히히힛!"
비슷한 모양새로 웃어젖히는 두 사람을 보며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장문인 자리를 때려치우든 해야지. 이 답도 없는 문파 같으니!'
화산의 살림은 나날이 나아지는데, 가면 갈수록 삶이 힘들어지는 현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