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4)
"나 같은 이라면 어떤 면을 말하는 거냐? 성격?"
"재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주 비슷해."
"이 새……."
청명이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성격은 소심한 편이고, 검에 재능이 없었지."
"……."
"무파란 그런 곳이잖아. 다들 힘자랑하기 바쁜 놈들이 모인 곳이지. 그러다 보니 성격 활발한 사형에게 많이 치이기도 했어. 괴롭힘까지는 아니더라도."
"무파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 사형이란 놈이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이 새끼……."
"응?"
"……아니야."
뭔가 청명이 부들거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백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하튼."
청명은 다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재능이 떨어진다는 건 그런 거지. 같은 시간을 노력해도 남들은 앞서가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그놈도 그런 걸 느꼈던 모양이야."
백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게 딱 그런 것이었다.
박탈감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못내 아쉽고 못내 허무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고, 남들은 몸으로 체화하는 걸 오로지 머리로 이해해야 했어. 보통 사람이었으면 몇 번이고 포기했겠지. 그래서 그놈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노력했다 이거냐? 죽을 만큼 노력해서 극복했다?"
"아니."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버텼을 뿐이야."
"……."
"백 일. 천 일. 만 일. 그 수많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며 그저 묵묵히 버텨 냈지.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어. 그때 그는 그 문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으니까."
백상이 눈을 찌푸렸다.
"강하지 않은데도?"
"왜 강해야 하지?"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물론 사숙보고 강해지는 걸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강함이 그 사람의 쓸모를 증명하는 건 아니야. 현영 장로님은 화산에 필요 없는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래, 그렇잖아. 그런데 사숙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백상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청명이 미묘한 눈빛을 지었다.
"듣기 좋은 말을 해 줄까? 사람의 재능은 다 다르니까, 사숙도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 재능이 넘쳐 보이는 다른 이들을 추월할지도 몰라. 사숙은 대기만성이거든."
"정말?"
"아니."
"이 새끼가?"
백상이 부들거리기 시작했지만, 청명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면서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말했잖아. 듣기 좋은 말이라고. 이건 사실일지도 모르고,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중요해?"
"……."
"강호의 모든 사람은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어 하지. 그럼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한 이들의 삶은 가치가 없는 건가?"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청명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그의 사제, 청진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사형. 저는 사형처럼 강해질 수 없습니다. 사형뿐 아니라 다른 사형제들이 비해서도 저는 약합니다. 하지만 제가 강하지 않다 해서 화산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저는 누구보다 화산에 필요한 사람이 될 겁니다.
- 뭐라고? 약해 빠진 놈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 이 개새…….
아, 잘못 회상했다.
청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실제로 청진은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그는 화산의 무학에 파고들어 화산 무학의 이해도에 있어서는 청명을 뛰어넘는 경지에 올랐으니까.
물론 그 이해를 몸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화산의 역사를 통틀어도 청진 이상의 무각주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청명이 과거로 돌아가 화산의 사형제들 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청진을 선택할 것이다.
어?
장문사형?
어…….
그, 어……. 그…….
에이. 그 양반 별로 쓸데는 없…….
- 야, 이……!
아, 나오지 마시라고!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십만대산에서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기 전, 청진은 전투에서 실종되었고 다시는 화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청진이 살아 있었다면 화산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겠지.
"사람의 목표라는 건 살아가며 변하기 마련이야."
"……."
"사숙의 목표는 뭔데? 천하제일인이 되는거야? 아니면 화산제일인이 되는 거야?"
청명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듯, 백상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청명아."
"응."
"그건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으냐? 너는 지금 네 목표를 완전하게 이뤄 가고 있으니까. 실패해 본 적 없는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냐, 사숙."
"……응?"
"나는……."
청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단 한 번도 목표를 이룬 적이 없어."
가만히 달을 바라보던 청명이 눈을 감았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십만대산에서 천마의 목을 치고, 사형제들과 함께 화산으로 돌아오는 꿈을.
때로는 장문사형에게 까불다가 얻어맞기도 하고. 때로는 사제 놈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 반항하는 걸 쥐어 패기도 하고.
그러다가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웃고.
떠들고.
그렇게. 그렇게 말이다.
그저 그것 하나면 됐다.
그저 그것 하나면.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화산으로 돌아가 도가 뭔지도 모르는 말코로 살다 죽는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사형제들과 함께.
그가 그 지옥 같았던 전쟁에 몸을 던진 것은 오로지 그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이뤄지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이뤄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숨만 붙어 있는 망령일 뿐이다.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응?"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그렇다고 손 뻗고 다 포기하고 드러누워 버릴까?"
백상이 입을 다물었다.
이건 청명이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알 수 있었다.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
무너진 것이 있으면 다시 쌓는다.
실패한 것이 있다면 다시 도전한다.
그래도 이룰 수 없어 가슴을 찔러 오는 것은 그저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게 삶이니까.
청명이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백상은 그 분위기에 눌려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왜 무겁지?'
청명의 삶 어디에도 무게감이 느껴질 만한 부분은 없다. 하지만 지금 백상은 이상한 아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이 사질의 말 몇 마디로 풀릴 게 아니라는 건 백상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만.
'이상하게 속이 조금 편해지는군.'
조금 전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청명아."
"응?"
백상이 물끄러미 청명을 바라보다 말했다.
"하나만 묻자."
"뭘?"
"나는 네가 만들려고 하는 화산에 필요한 사람이냐?"
청명이 눈을 끔뻑이며 백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뭐, 그렇게까지?"
"……이 새끼가?"
아니, 이놈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 속을 뒤집어야 하나?
그냥 그렇다고 해 주면 될 것을!
"사숙."
"응?"
"필요해서 같이하는 건 가족도 아니고 동문도 아니고 뭣도 아냐."
"……."
"사숙이 아무짝에 쓸모없어도 상관없어. 사숙이 화산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는 한, 사숙은 영원히 내 사숙이야."
"……."
"그럼 된 거 아냐?"
백상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필요하다는 말을 원했다.
하지만…… 그 얄팍한 대답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잠깐의 위안일 뿐이겠지.
"그래. 그거면 됐다."
백상이 술을 들이켠다.
속이 쓰리다.
하지만 속이 편하다.
그 상반되는 이상한 감정 속에서 백상은 슬쩍 청명을 향해 곁눈질했다.
'이상한 놈.'
어떨 때는 천하에 다시없을 망나니 같은데, 또 어떨 때는 저렇게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한 깊이를 보여 줄 때가 있다.
종잡을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다.
그래서 백상은 청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과 너무 다른 이를 좋아할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 눈앞에 있는 청명은 그리 싫지 않다.
"청명아."
"응?"
"화산은 강해질까?"
"물론이지."
"그럼 네가 만든 화산에 내 자리가 있을까?"
"또또 멍청한 소리 한다."
청명이 피식 웃고 말했다.
"화산을 강하게 만드는 건 사숙이야. 그 자리를 사숙이 만들어야지."
"……그렇구나."
나의 자리라.
백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청명이 백상을 흘끗 보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어느새 얼굴에 단호함이 엿보인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망설임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청명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한 병 더?"
"아니다."
백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는 몰라도 나는 독주를 두 병이나 먹고 안 들킬 자신이 없다. 슬슬 해가 뜰 텐데 그만 들어가 봐야지."
"아쉬운데."
"같이 가자는 소리 아니야. 마저 마시고 들키기 전에 들어와라."
"안 이르려고?"
"내가 그렇게 의리가 없지는 않아, 인마."
백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터덜터덜 소림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청명이 봇짐에서 새 술병을 꺼내 마개를 따는 순간이었다.
"청명아."
"응?"
멀찍이 걸어간 백상이 이쪽을 돌아보고 있다.
"고맙다."
"……."
"망할 사질 놈아."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몸을 획 돌려 경공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청명은 하늘을 보고 벌렁 드러누웠다.
"……아이고. 장문사형."
할 일이 너무 많네요.
"옛날에 사형은 이걸 어떻게 다 하고 살았습니까?"
- 너만 없었어도 힘들 것 없었다, 이놈아!
"거 말을 해도."
안 그래도 조금 후회하고 있다고요. 말 좀 더 잘 들어 줄 것을.
청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좋았잖아요."
즐거웠잖아요.
그때는 말이죠.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지금의 화산은 더없이 그를 뿌듯하게 만든다.
더없이 사람 좋은 장문인. 그리고 항상 제자들을 위하는 장로들.
엄격하지만 마음 좋은 운자 배와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백자 배와 청자 배들.
좋다.
그는 지금의 화산을 너무도 아끼고 있다.
다만…….
"사형. 나는요."
한 번씩 너무 그리워요.
그때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가.
"약하다 놀리지 마세요. 나이 먹고 주책이라며 구박하지도 마시고요. 그래도 사형은 사제들이랑 같이 있잖아요."
거기에.
나도 있었어야 했는데.
"알아요. 장문사형. 내가 해야죠. 내가 다시 화산을 일으켜야죠. 그래야 사형이, 사제들이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런 건 항상 내 몫이잖아요. 사형이, 사제들이 못 하는 걸 대신 하는 것. 그게 내 몫이니까."
청명이 손을 뻗어 술병을 잡았다.
"그런데 한 번씩은 그냥……."
술을 한 모금 머금고 눈을 감았다. 입 안에 독한 주향이 퍼져 나갔다.
"그냥 어리광을 피우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해 좀 해줘요. 나는 뭐 사람 아닌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그의 앞에서 끝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문사형.
그 장문사형을 말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던 청진.
구석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청공.
그리고…….
도사답지 않게 떠들어 대는 사제들의 모습이.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여도 취기는 오르지 않고 그리움만 짙어진다.
달마저 그 모습을 감추고 멀리 해가 떠오를 때까지, 청명은 그곳에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