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3)
꼴꼴꼴꼴꼴.
"카아!"
청명은 술을 입 안에 들이부으며 극락에라도 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맛이지! 이 맛이야!"
간만에 마시니 술이 입에 쫙쫙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소림도 절간이다 보니 어디서 술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술 생각이 간절했는데, 위립산이 재치 있게도 선물 삼아 술을 열 병이나 들고 온 것이다.
"크으으으. 이래서 사람을 잘 사귀고 봐야 하는 법이지."
물론 청명이 술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다 그런 법 아닌가.
언제든 구할 수 있을 때는 딱히 술을 찾지 않지만,
'여기서는 술을 드실 수 없습니다.'
따위의 소리를 들으면 간절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응?
나만 그렇다고?
에이. 설마.
청명이 히죽히죽 웃으며 육포를 찢어 입 안에 던져 넣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안주가 좀 부실하긴 하네."
한창 자랄 몸이라 잘 먹고 잘 커야 하는데, 이런 육포 쪼가리로 술을 먹어야 하다니.
하늘에 있는 사형들이 봤으면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을 텐데.
선계에 있는 사형들이 들었으면 쌍욕을 날릴 생각을 태연하게 하는 청명이었다.
"쯧. 어쩔 수 없지. 있는 대로 사는……. 어?"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술병을 들어 탈탈 턴다.
"……없어?"
고개를 돌려 한쪽 구석에 쌓인 술병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아홉. 아홉?"
그럼 이것까지 열.
술이 떨어졌다.
술병을 잡은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술이 없어?'
안 되는데?
아직 부족한데?
청명이 비어 버린 술병을 탈탈 털다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딱 한 병만 더 마시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지?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빠져나가기에는 좁은 창문이지만, 그가 저길 통과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니 슬쩍 빠져나가 마을에 다녀…….
- 절대! 이 이틀 동안에는 절대 사고를 쳐서는 안 된다! 절대!
머릿속에 울리는 현종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를 움찔하게 했다.
"끄으으응."
고뇌하던 청명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도 성질 많이 죽었네.'
예전이었다면 장문인의 당부고 나발이고, 술이 당기면 바로 튀어 나가서 주루에서 한잔했을 텐데.
아, 그래서 장문사형이 술 이야기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켰던 건가?
거, 미안하게 됐소. 장문사형.
- 야, 이 호랑말코 같은 놈! 도사라는 놈이!
어디서 산짐승이 우나? 헛소리가 들리네?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긴 한데."
이미 한번 신나게 난장이 피워 놓은 전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장문인의 말을 무시하고 하산을 하기엔 좀 껄끄럽다.
청명이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없네?"
전에는 백천 무리가 청명의 문 앞을 지켰었다.
그런데 화영문의 제자들이 오며 어수선해져서인지, 속가제자들 앞에서 청명을 감시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가 민망해서인지,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주방이랄 곳이 없고.'
있다 한들, 절간 주방인데 백날 뒤져 봐야 술이 나오겠는가?
'흐음.'
슬쩍 볼을 긁적이던 그가 돌연 눈을 빛냈다.
"아니지. 아니지. 화영문주님이 꼭 내 술만 챙겨 왔다는 보장은 없지. 장문인 드릴 술이나 장로님들 드릴 술을 따로 챙겨 왔을지도 모르지."
청명이 씨익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화영문주의 처소가 분명 저쪽…….
"응?"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전각의 복도에 나 있는 창문 밖으로 화산의 검은 무복을 입은 이가 빠르게 어딘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호오?"
청명이 눈을 빛내며 창틀을 움켜잡았다.
"쯧쯧. 내가 이래서 눈을 못 뗀다니까. 잠시만 눈을 떼면 사고를 쳐요, 사고를."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를 내뱉은 청명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뒷짐을 쥔 채, 방금 누군가 달려간 곳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검이 허공을 가른다.
흘러내린 땀방울이 얼굴을 완전히 적시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음에도 백상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손이 짓물러 피가 배어나는데도, 그의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나 때문이다.'
사문이 세상에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드높은 업적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패배하면서 화산의 이름을 천하에 떨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더욱 그를 상심케 하는 것은 지금부터 화산이 어떤 업적을 이루어 낸다 해도 그 업적에 그가 기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오로지 그 혼자만.
우득.
질끈 깨문 아랫입술이 살짝 찢어지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나는 항상.'
물론 알고 있다.
그 자신도 강해지고 있다는 걸.
과거에는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명문의 제자들을 연파하고 있다. 종남의 제자들만 보면 얼어붙었던 과거의 백상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 초조함이 사라지는 않는 것은, 빠른 속도로 그를 앞서 나가 버린 청자 배들 때문일 것이다.
윤종과 조걸.
백상은 알고 있다. 그는 이미 백자 배의 이인자도 아니다. 유이설은 이미 그가 따라잡지 못할 곳까지 가 버렸고, 청명의 수련을 받은 백자 배 중 몇몇도 이미 그를 추월했다.
심지어 윤종과 조걸을 제외한 청자 배들 중에서도 그를 앞서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
그가 아무리 강해진다고는 하나 한 문파 내에서 그를 앞서는 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어찌 강해지고 있단 사실 하나만을 붙들고 위안할 수 있겠는가?
외면하고 또 외면했던 일이 이제는 결과로까지 나와 버렸다. 더는 이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꾸우우우욱.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릿한 통증이 손을 타고 밀려들었지만 백상은 힘을 빼기는커녕 손이 부러져라 더더욱 힘을 밀어 넣었다.
'내가 약해고 우둔해서 벌어진 일이다.'
딱히 큰 꿈을 꾼 건 아니다.
청명이 등장하기 전부터 그에게는 백천이라는 결코 넘지 못할 산이 있었으니까.
그의 꿈은 그저 그런 백천을 보좌하여 화산을 더 좋은 문파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 그저 소박한…….
백상의 검이 멈췄다.
이윽고 천천히 검을 내린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커다랗게 뜬 달이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화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까?'
패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사실 이 생각을 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과거의 화산은 그와 백천이 이끌어 나가는 문파였다. 하지만 청명이 등장한 이후로 빠르게 변화하는 화산의 속도에 비한다면 그는 너무도 느린 사람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 성장의 속도를 따라가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 버리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내가 다른 이들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력도 없는 놈이 백자 배 중 둘째랍시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오히려 더 성장할 수 있는 이들의 길을 막아선 건 아닐까?
백상은 가만히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밝구나.'
해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건 다른 이의 몫이니까. 그가 원한 것은 밝은 해가 세상을 밝히고 잠시 쉬러 간 사이 어둠을 굽어보는 달 같은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달은 고사하고, 별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앞으로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읏차."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상이 획 뒤를 돌아보았다.
"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청명을 보며 백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알고 온 거냐."
"그렇게 대놓고 나가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나온 지 한참 됐는데."
"마을까지 내려갔다 온다고 시간이 좀 걸렸지."
"응?"
마을?
거긴 왜?
청명이 쥐고 있던 봇짐에서 뭔가 빼내더니 백상에게 휙 던졌다.
턱.
백상이 반사적으로 청명이 던진 것을 받아 들었다.
이내 손에 쥐여진 하얀 병을 본 백상은 눈을 부릅떴다.
"……술?"
"한잔 어때?"
씨익 웃는 청명을 보며 백상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훑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여기는 숭산이다.
천하의 무인들이 성지처럼 여기는 곳.
아무리 소림의 산문은 벗어났다고 하나, 숭산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백상의 가치관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안 마셔?"
"마, 마실 거다!"
때로는 이런 일탈이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
백상은 조심스레 호리병을 열고 풍겨 나오는 주향을 맡아 보았다.
"으."
코를 톡 쏘는 게 독주(毒酒)임에 틀림없다.
"좋은 걸로 사 올까 하다가 아무래도 오늘은 이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
쓸데없이 섬세하기는.
백상이 말없이 병을 입에 가져갔다.
꿀꺽. 꿀꺽.
"카아아!"
술이 넘어가니 목구멍이 타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감각이 싫지 않았다.
"낄낄낄낄."
청명이 백상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더니 자신도 병째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꼴꼴꼴꼴꼴.
"크으!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는 실실 웃으면서 또다시 봇짐을 뒤졌다. 이내 오리구이가 백상의 앞에 펼쳐졌다.
백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숭산에서 술과 고기라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도 어느새 이런 일이 그리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바로 이놈 때문에.
백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화산에 뚝 떨어져 그가 알고 있던 화산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놈.
백상이 말없이 다시 술을 들이켰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술 마시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이 숭산에 조용히 퍼져 나갈 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청명이었다.
"그래."
"응?"
"속이 좀 풀려?"
"……."
백상은 말없이 우두커니 밤하늘만 보았다.
"살다 보면 질 때도 있는 거지. 뭘 그리 꽁해서는. 그리고 걔는 지금은 못 이기는 놈이야. 누가 나섰어도……."
"아냐, 그런 게."
백상이 청명의 말을 끊는다.
청명이 답지 않게 심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재촉하지 않고, 되묻지 않는다.
그저 백상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놓길 기다릴 뿐이다.
"비무란 건 원래 그렇지. 나보다 강한 이를 만나면 내 실력이 어느 정도든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잖아. 처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
"음."
"내가 지금 속이 갑갑한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냐. 어느 순간 화산의 다른 이들이 나와는 다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는 걸 느껴 버렸기 때문이야."
청명이 말없이 백상을 바라본다.
"나는 알고 있었어. 검에 대한 내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그리고 이제 또 하나를 알게 됐지. 내가 다른 놈들보다 좀 더 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내가 수련한 시간이 저놈들보다 더 길었기 때문이라는 걸."
백상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오래도록 해 왔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겁이 나는 거다. 모두가 나를 앞서갈까 봐. 아니, 말석에서나마 따라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에는 내가 앞서가는 이들을 놓쳐 버릴까 봐. 언젠가는 앞서간 이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 결국엔 내가 화산에 폐가 될까 봐."
백상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한숨처럼, 넋두리처럼 말했다.
"물론 너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겠지."
"어. 나는 도통 뭔 말인지 모르겠네."
"……말을 말아야지."
백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명이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청명은 재능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백천이나 조걸 같은 놈들보다도 다른 세상에서 사는 놈이니까.
토끼는 하늘을 나는 봉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봉황 역시 바닥을 뛰어다니는 토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백상이 생각하기에 청명과 자신의 사이엔 그 정도로 큰 간극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숙에게 재능이 부족해서 문제라는 거지?"
"……꼭 그렇다기보다는……."
백상이 살짝 머뭇거리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청명아. 화산은 길을 찾았다. 네가 그 길을 찾게 만들었지. 하지만 나는……."
"아아. 됐어."
청명이 백상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보나마나 지지리 궁상떨려고 그러지? 나는 그런 건 딱 질색이야."
백상이 청명을 향해 눈을 흘겼다.
싹퉁 바가지 같은 놈.
사숙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대신에."
청명이 씨익 웃는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이야기?"
"그래. 옛날이야기야. 옛날에 꼭 사숙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지."
청명의 눈이 쓸쓸하게 가라앉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청명의 그 표정에 백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은 대체…….'
무엇을 품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술병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