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2)
"세상에……."
장문인들이 모여 있는 단상 위도 경악으로 가득 찼다.
"신권(神拳)이 아닙니까?"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백보신권이라니. 위력으로 봐서는 최소한 오성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 허허허허."
"방장. 어찌 저런 인재를 꼭꼭 숨겨 두셨습니까?"
허도진인의 말에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딱히 저 아이를 숨겨 여러분들을 기만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법정이 낮게 불호를 외고는 말을 이었다.
"본인이 나서지 않는데 제가 호들갑을 떠는 것도 모양새가 나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허도진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비무대에 홀로 남은 소림승이 관중들을 향해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혜자 배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혜자 배 중 막내지요."
"혜자 배라면 일대제자가 아닙니까? 일대제자가……."
"나이는 되레 이대제자보다 어립니다."
"……아."
법정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배분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이제 겨우 약관을 넘은 아이를 배분 때문에 출전시키지 않기가 어려웠습니다. 본인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고…….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약관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라면 당연히 참가할 자격이 있지요. 배분이 그리 중한 것도 아니고."
허도진인은 재빨리 다른 곳에서 나올 불만을 틀어막아 버렸다.
'저놈은 더 지켜봐야 한다.'
이 비무대회가 끝이 아니다.
우승을 하여 명성을 날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 문파에 어떤 인재가 자라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저런 괴물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은가?
"대단합니다. 저 나이에 백보신권이라니."
"으음. 정말 찬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장문인들의 입에서 신음 같은 경탄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건 결코 공치사가 아니었다. 저 젊은 소림승이 보여 준 일 수는 분명 이만한 찬탄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백보신권.
소림을 대표하는 권법.
나한권이 소림의 기본이라면 백보신권은 정화라고 할 수 있는 권법이다. 소림이 천하에 자랑하는 일흔두 가지의 상승무공,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중 하나이며, 그만큼 익히기가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무공이었다.
소림의 무학은 말 그대로 대기만성(大器晩成).
그 복잡하고 오묘한 무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지난한 수련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소림무학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칠십이종절예를 저 나이에 벌써 펼쳐 내다니.
'그것도 저 정도 수준으로.'
허도진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림이 이런 일을 벌인 데는 반드시 노림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저런 노골적인 패를 숨겨 두었을 줄이야.
이 천하비무대회는 저 괴물의 등장을 위해서 깔아 둔 판인 게 분명해졌다.
"허허. 정말 굉장합니다."
"아닙니다."
법정이 가볍게 겸양했다.
"예선에서는 칠십이종절예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했었는데, 저 권을 꺼내 든 것을 보면 상대였던 화산의 아이도 그 실력이 녹록치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 해도 백보신권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법정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이걸로 화산에게 쏠린 주목은 빼앗아 왔다. 다만…….'
그리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문인들의 표정은 두 가지로 갈려 있었다.
굉장히 낭패스러워하는 얼굴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
낭패스러워하는 이들은 혜연(慧然)의 실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이들이고, 골똘히 생각하는 이들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제자와 혜연을 견주어 보는 이들이다.
그리고…….
'호오.'
단 한 사람 표정이 다른 이가 있었다.
'화산인가.'
그 많은 장문인들 중 오로지 현종만이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편안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승패에 대한 집착을 놓았음인가, 아니면……?
'지켜보면 알겠지.'
법정은 이내 가볍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장문인들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바, 방금 뭐였지?"
"번쩍했는데?"
"……그런 식으로 표현될 만한 일 권이 아니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저 결과에 주목하는 다른 화산의 제자들과 다르게 백천 일행은 저것이 얼마나 어마무시한 권이었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백상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강제로 파괴력을 줄였다.'
아마 백상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권의 폭발력을 죽이고 오로지 밀어 내는 힘만을 이용한 일격이었으니까.
상대를 해하는 것보다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게 열 배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비무대 위의 소림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승자는 소림의 혜연이오!"
정적에 빠져 있던 소림에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소림이다!"
"심지어 화산의 제자를 단 일 격에 날려 버렸어!"
"그렇지! 그러면 그렇지! 화산이 저리 활약하는 게 이상했어. 명문의 진짜 힘이 이제부터 나오는 거지!"
"굉장한 일 격이었어! 저게 대체 뭐였지?"
관중들 역시 들떠 소리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활약할 때보다 배는 더 큰 환호성이 혜연에게로 쏟아졌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종종걸음으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화산의 전승이 깨졌구먼!"
"그럼 그게 얼마나 갈 줄 알았나? 화산 따위가 어떻게 그런 성적을 계속 내겠나?"
"예선이라 해도 지금까지 지지 않은 건 대단한 일 아닌가?"
"운이지, 운!"
"어찌 운으로 그럴 수가 있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쯧쯧. 모르는 소리. 힘이 없는데 어찌 명문이라 불리겠는가? 가진 모든 인재를 끌어 온 화산과는 다르게 다른 문파들은 경험을 쌓기 위한 인재와 성적을 낼 수 있는 인재를 구분한단 말이지. 보게나! 진짜와 부딪치니 바로 박살이 나지 않는가?"
"……으음. 그렇긴 한데."
"이제 본선이 시작되면 명문의 본 실력을 볼 수 있을 걸세."
"에이! 그래도 화산이 지금까지 보여 준 게 있는데. 나는 화산을 믿네!"
중인들이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백천의 시선은 혜연이 내려간 비무대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저거……. 허허……."
천하의 청명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까 내가 천재가 어쩌고 했었나?"
"저놈이 진짜 천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니. 저건 천재가 어쩌고 할 수준이 아닌데?"
"응?"
백천이 의문 어린 눈으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청명의 얼굴이 자못 심각하다는 걸 본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청명은 빈 비무대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미쳤네.'
세상에는 한 번씩 그런 것들이 태어난다.
기존에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조류를 창안해 내는 것들. 그러니까 세상이 조사(祖師)라 부르는 것들 말이다.
이를테면 소림무학을 만들며 이전 중원무학의 흐름을 바꿔 버린 보리달마(菩提達磨)나, 무당을 만들며 도가의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 낸 장삼봉(張三丰) 같은 양반들.
이들의 앞에다 가져다 대면 천재라는 말은 시대에 두엇쯤은 나타나는 흔한 재능을 일컫는 말이 되어 버린다.
"아니. 저런 놈이 하필 소림에 떨어지는 게 어디 있냐고!"
빌어먹을 세상!
안 그래도 가진 것들이 인재까지 빨아먹네!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바닥부터 시작하는 청명의 입장에서는 소림이 저런 괴물을 키워 내고 있었단 사실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미친놈이네. 미친놈인데……."
저대로 잘만 큰다면 천하제일인은 물론이고, 강호의 역사에 남을 무인이 될지도 모르는 놈이다.
그렇기에…….
"불쌍하네."
"응? 왜?"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배를 쭉 내밀었다.
"가엽게도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잖아. 그게 아니면 천하제일인 자리는 맡아 놓은 거나 다름없을 텐데."
"……."
"하필 나와 같은 시대에 비슷한 나이네. 쯧쯧쯧. 저러면 평생 이인자에서 못 벗어나지. 불쌍한지고."
"……."
"뭐 어쩌겠어?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재수가 없다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
"……주둥이 좀 다물어."
백천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사숙."
"응?"
"안 데리러 가도 돼?"
"……뭘 데리러 가?"
"사숙 말이야, 사숙."
"내가 왜?"
청명이 피식 웃는다.
"동룡이 말고 백상 사숙 말이야. 지금쯤 저기 기절해서 뻗어 있을 텐데……."
"아악! 백상아아아아아!"
백천이 기겁을 하며 백상이 날아간 쪽으로 달려갔다. 청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 멀쩡한 것들이 없네. 멀쩡한 것들이."
물론 청명이 할 말은 아니었다.
* * *
"열다섯이 출전하여……."
"……."
"열넷이 본선 출전 인원 백스물두 명 안에 들었다."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이 일은 화산의 역사에 더없는 쾌거이다. 내가 오늘만큼은 저 선계에 계신 선조들께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한 명만 더 이겼으면 전원 진출인데."
"……."
백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백천이 청명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인마! 사람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
"아쉽다 이거지. 아쉽다."
"너도 그놈은 못 당한다며!"
"심중에 숨어 있던 패배감이 눈을 뜨셨나. 왜 나는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고 그러시지, 사숙?"
"하여튼 네가 그놈 세다며!"
"그렇지."
청명이 맞장구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상 사숙은 백 번 싸워도 못 이기지. 신경 쓰지 마, 사숙. 그냥 실력이 모자란 건데 뭐. 방심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잘했어도 결과가 같았을 건데 뭐가 문제……. 사숙?"
울화병이 도진 백상이 눈을 까뒤집고 꺽꺽대며 넘어가고 있었다. 청명이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부상이라도 입었나?"
"네가 입히고 있어, 이 새끼야! 네가!"
"내가 뭘?"
"제에발 입 좀 다물어! 제에발!"
투닥거리는 두 사람과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산의 제자들.
뒤쪽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위립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개판이네.'
아주 개판이야. 아주.
더 큰 문제는 중앙에 앉은 현종이 이 개판을 아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고!
아니, 장문인!
그새 뭔 사육사로 직업이라도 바꾸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광경을 그런 눈빛으로 보십니까!
위립산이 먼저 화병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자자. 조용해 보거라."
그런 위립산의 마음을 알았는지 현종이 제자들을 진정시킨다.
진정해야 할 제자라고 해 봐야 청명과 백천뿐이지만.
"본선은 이틀 뒤부터 열린다고 하는구나. 그 시간을 소중히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종의 불안한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그러자 청명이 무구하게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끄으응."
현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혼자서 다 때려잡고 있으니 뭐라고 구박도 못 하겠고.'
제발 백천이나 윤종 성격의 반만 닮았으면 소원이 없겠지만, 하늘은 공평하여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거참.
사람이 속이 타는 감정과 뿌듯한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줄이야.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보던 현종이 앓는 듯 말했다.
"제발."
"네?"
"앞으로 이틀. 단 이틀이다! 설마 그 이틀 동안 사고를 치진 않겠지?"
"섭섭하네요. 장문인. 마치 제가 그동안 뭔가 사고를 쳤다는 투로 말씀을 하시……."
현종이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거, 칼도 차고 오셨어요?"
청명이 배실배실 웃었다.
"뽑은 지도 오래되셨을 텐데. 그냥 넣어 두세요."
"끄으응."
현종은 결국 청명을 외면하고 다른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듣거라."
"예, 장문인!"
"지금까지 너희는 너무도 잘해 주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인자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본선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명문의 저력이라는 건 절대 쉽게 볼 것이 아니다."
청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현종의 시야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우리도 명문이잖아요?"
"허허. 그래. 그 말도 맞지."
현종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래. 그러니 기죽을 것 없다. 어깨를 펴고 너희의 모든 실력을 후회 없이 펼치거라.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겠느냐."
"예! 장문인!"
현종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자들이 더없이 기껍다는 듯 웃었다.
'이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고, 화산의 사명이다.'
청명이 뿌린 씨앗은 이 천하비무대회를 통해 아름드리 거목으로 성장할 것이고, 언젠가는 천하 곳곳으로 그 가지를 뻗을 것이다.
그러니 장문인으로서 이들을 지켜 주어야…….
"모두 장문인 말씀 잘 듣고 마음에 새겨!"
청명의 말이었다.
저렇게 기특한 말을 하다니, 현종이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다.
저 아이가 이제야 좀 철이…….
"이겨야 얻는 거야! 진 놈이 뭐 얻는 거 봤어? 저기 백상 사숙 보이지? 지면 저렇게 되는 거야! 새겨 두라고."
"끄, 끄륵. 끄르르륵……."
"백상아! 정신 차려라, 백상아!"
"쯧쯧쯧쯧."
울화통에 끝내 거품을 물고 넘어가는 백상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그리고 눈을 희번덕대며 모두를 쭉 훑어보았다.
"무조건 이긴다! 알았어?!"
"오!"
"이긴다!"
"대가리를 깨 버리겠다!"
환호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현종이 자애롭게 웃었다.
'말 좀 들어 처먹어라. 이 망할 놈들아.'
화산이 대회 전보다 힘을 얻는 것이야 이미 당연해졌다.
그러나 그 결과가 과연 강호의 복이 될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생각하는 현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