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입니다. (3)
더없이 싸늘하고 차가운 눈이었다.
한기 어린 눈동자가 먹이를 찾는 맹수의 그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다.
"좀 더……."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어둠속에 조용히 퍼져 나간다.
"가까이 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여기서도 들려."
"그건 너니까 그런 거고!"
"그럼 가면 되지."
"……더 가까이 가면 들키지 않을까?"
"쯧."
청명이 좌우로 기막을 펼쳤다.
"됐다, 가자."
"……들키면 어쩌려고?"
"이제는 안 들켜. 믿고 가."
윤종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청명이 놈이 들키지 않는다고 하면 들키지 않는다. 이놈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가시죠, 사형."
"그래."
조걸이 살짝 재촉하자 윤종이 엎드린 자세 그대로 낮게 전진했다.
저 멀리 세 사람이 마주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쯤이면……."
"쉿."
들려오는 낮은 경고에 윤종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네, 사고."
그는 자신의 뒤에서 포복하며 따라오는 유이설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가 이런 데 끼는 사람이었던가?'
언뜻 유이설의 얼굴에서 청명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아, 하긴. 저 사람이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지.'
서글픈 현실이다. 서글픈 현실.
"들려?"
"이제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청명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육포랑 술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이런 걸 맨입으로 보네."
"……놀러 왔냐?"
"아냐?"
"……."
딱히 부정할 말을 찾지 못한 윤종이 말없이 앞쪽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앞쪽에서 백천 부자 셋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해졌더구나."
진초백의 말에 백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감사합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뻔한 대답뿐이었다.
자신이 한 대답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진초백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닮은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백천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에는 진초백을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분명 친아버지임에도, 진초백에게서 아비의 정을 느껴 본 적은 거의 없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못마땅한 시선만을 보내었다.
"제가 왜 집을 나갔는지는 이해하고 있다."
이해.
이해라.
백천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릴 뻔했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이해는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초백이 백천을 이해했다면, 그걸 행동으로 옮겼어야 했다.
하지만 진초백은 백천에게 어떠한 위로조차 해 주지 않았다. 그저 큰형인 진금룡보다 못한 백천의 재질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이다.
"어린 네게는 큰 짐이었겠지. 혹여나 싶어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너를 차별……."
"압니다."
백천이 진초백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아버지에게 서자니 어쩌니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요. 제 재질이 큰형보다 뛰어났다면 아버지는 저를 더 아끼셨겠죠."
"……."
"딱히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죠. 이제는 압니다."
진초백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차라리 원망을 쏟아 내거나 격한 감정을 토해 낸다면 말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 정도야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백천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의식적으로 타인처럼 여기려 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달관한 것 같군.'
도문에 몸을 담아 정신적으로 성장한 것인지, 예전 같은 치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되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진금룡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내가 눈이 모자랐구나.'
백천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아이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 않도록 말이다.
"동룡아."
"백천."
"……."
백천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저는 진동룡이 아니라 백천입니다."
청명이 미간을 확 좁혔다.
"끄응. 생각보다 담담한데?"
"그럼 뭘 바랐냐?"
"드잡이라도 할 줄 알았지."
"아니, 이 미친놈이 사숙을 패륜아로 만드네?"
조걸의 면박에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벌써 제 형이랑은 한판 붙었는데 뭔 상관이야."
"……나는 한 번씩 네가 도사라는 사실에 입을 틀어막는다."
"동감."
"응. 나도."
윤종과 유이설마저 거들고 나서자 청명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나만큼 도가적인 사람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다고!"
"어딜 봐서?"
"도가 뭐냐? 마음이 향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도 아니야?"
"……그렇지?"
청명이 엎드린 채로 의기양양하게 배를 쭉 내밀었다.
"나만큼 내키는 대로 사는 놈이 어디 있어?"
"……."
어…….
그게 그 의미가 아닌 것 같은데…….
노자가 살아 돌아왔으면
'이게 내 도다, 이 썩을 놈아!'
하고 외치며 도덕경으로 청명의 대가리를 내리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숱한 반발에도, 청명은 제 자랑만 끝내 놓고 백천 부자의 대화에만 귀를 쫑긋거렸다.
"백천이라."
진초백이 가라앉은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건 화산이 네게 준 이름이겠지."
"예."
"결국은 화산에 뼈를 묻을 생각이더냐?"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처음으로 진초백의 표정이 변했다. 노기에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말했다.
"돌아오너라."
"……."
"아직은 늦지 않았다. 아니, 이미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해결해 주겠다. 너도 알다시피 내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
백천이 대답 없이 진초백을 바라본다.
"종남의 장문인도 반대하지 않으실 게다. 사람은 뿌리를 버리고 살 수 없는 법. 지금이야 네 마음에 의혹이 없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결국은 후회하게 될 거다. 지금이라도 옳은 선택을 하거라."
가만히 듣고 있던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그 차분한 목소리에 오히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문 건 진초백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백천이 진초백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화산에서 이리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께서 저를 찾으셨겠습니까?"
"……."
진초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망설이는 듯하던 그는 잠시 후에야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네가 이리 능력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너를 찾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나 그건 네가 아직 너무 어리기에 하는 생각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라 해도 서로의 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애비를 비난할 셈이냐?"
"아닙니다, 아버지. 오해하지 마십시오."
"……음?"
백천은 선선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저는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이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데?"
"저는 그저 그게 싫을 뿐입니다."
"……."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담담하기만 한 그 목소리에는 단호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겠죠."
"인연을 끊겠다는 것이더냐?"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인연을 끊고 싶은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시겠죠. 제가 아버지의 의지대로 살지 않으면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으실 생각 아니십니까?"
"나는……."
"전 아닙니다."
진초백의 눈이 살짝 떨린다.
"제게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리될 인연이었던 거지요. 제가 어디에 있든 아버지는 제 아버지고, 형은 제 형입니다. 그저 다른 길을 걸을 뿐이지요."
뭔가 말을 하려던 진초백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룡아."
"백천입니다."
"……그래, 백천아. 잘 생각해 보거라. 이건 네 아비로서의 충고이자 먼저 무인의 걸은 선배로서의 충고다. 이대로 화산에 계속 있다 보면 너는 네 재능을 썩히고 말 것이다."
"……."
"지금이야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네가 나이가 들어 갈수록 화산은 너에게 짐이 될 것이다. 끌어 줄 이가 없고, 지켜 줄 이가 없는 곳에서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진초백은 백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나 종남은 다르다. 네가 온다면 종남은 너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밀어줄 것이다. 그러면 천하제일인의 자리도 꿈은 아니겠……."
"아버지."
하지만 백천은 단호한 목소리로 진초백의 말을 끊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하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입니다."
"……."
"끌어 줄 이가 없고, 지켜 줄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까?"
말을 하던 백천은 돌연 낮게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화산에 있다.
다른 어디도 아닌 화산에 있다.
그를 끌어 주고 지켜 줄 이들이.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다를 건 없습니다. 왜냐면……."
백천이 근사한 미소를 짓는다.
"제가 너무도 닮고 싶은 분은 이미 그 길을 걸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잖습니까?"
"……."
진초백이 차갑게 굳은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정녕 그 길을 택하겠다는 거냐? 이 아비의 앞에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백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표정에는 조금의 미안함도 서려 있지 않았다.
"하나 이게 제 길입니다. 제가 걷기를 원하는 길입니다. 종남이 저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해도 저는 달갑지 않습니다. 제 바람은 제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게 아니라 화산이 천하제일문파가 되는 것입니다."
"……실로 어리석구나."
살짝 이를 갈아붙인 진초백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오시오."
갑작스러운 말에 백천이 조금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초백은 싸늘하게 다시 한번 일갈했다.
"나오라 했소이다. 화산이 언제부터 쥐새끼처럼 숨어 남의 이야기를 듣는 곳이 되었소이까?"
"……들켰네."
"들켰는데?"
"들켰어."
"……."
쏟아지는 비난의 눈길에 청명이 움찔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저 진초백이라는 양반의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단 말인가?
'크으, 과연 동룡이 아빠! 내 기막을 뚫고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고수라니.'
청명은 감탄 반 당황 반의 심정으로 슬그머니 엉덩이를 뺐다.
"어떡해?"
"뭘 어째. 들켰으면 나가야지."
청명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진초백의 노한 음성이 다시금 울렸다.
"이래도 나오지 않을 셈이요?"
청명이 신경질적으로 입을 뗐다.
"아, 나가……."
"지금 나가오!"
"……엥?"
모두가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미 몸을 일으키고 반쯤 수풀을 벗어나 버린 상황이라 돌이킬 수가 없었다.
저 반대쪽에서 튀어나온 무리와 청명의 눈이 마주쳤다.
청명의 볼이 살짝 떨렸다.
"장문인?"
"장로님들?"
청명을 따라 수풀 밖으로 나오던 윤종, 조걸, 유이설도 흠칫했다.
건너편 수풀에서 뛰쳐나오다 굳어 버린 현종, 현영, 현상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
"……."
장문인과 장로들도 당황했는지 말이 없었다.
"아니. 장문인이랑 장로님들이 여긴 왜?"
"너희들이 왜 거기서 나오느냐?"
"엿들으러 왔죠."
"우리도."
"……."
"……."
서로 어색해하는 두 무리를 보며 백천이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제발 좀……."
"크흠."
"으흐흐흠!"
망했어.
이 문파는 이미 망했어.
그 가운데에서 양쪽을 둘러보던 진초백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말 엿듣기를 좋아하니, 화산은 군자의 문파가 아닌 모양이외다."
현종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도둑처럼 숨어 엿듣다가 들켰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긴 하다.
"죄송하외다. 내 할 말이 없구려."
진초백이 가만히 현종을 바라보다 일단 예를 표했다.
"종남의 진초백이 화산 장문인을 배알합니다."
"반갑습니다, 진 장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인사를 받는 현종의 얼굴엔 겸연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진초백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미 예를 표했으니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그는 현종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설마 장문인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체면에 맞지 않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물론 체면에 맞지 않는 일이지요. 다만……."
현종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백천을 보았다. 그 미소에 복잡한 심경이 다 담겨 있었다.
"문파의 후인을 살피는 일에 어찌 체면을 따지겠습니까. 그 때문에 제가 소인이 되어야 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허어."
진초백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듯 현종을 응시했다.
백천도, 현종도 어째 사고방식이 이상하단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이게 변한 화산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이 이렇지 않았었는데, 어쩌다 이리 변해 버렸단 말인가?
"장문인께서 체면을 지키지 않으면 문파가 어찌 되겠습니까?"
"그렇지요. 문파에 좋지 않을 수도 있지요."
현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제게는 문파와 저의 체면보다는 백천이가 천 배는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체면을 먼저 따지겠습니까."
"……."
당당하고 단호한 말이었다.
현종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초백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리되었으니 장문인께 묻겠습니다. 장문인께서는 동룡이가 정말 천륜을 저버리고 화산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천륜을 저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 말씀해 주실 줄 알았……."
"하나."
현종이 고개를 내젓는다.
"백천이가 화산의 도인이 된다 해서 천륜을 저버리는 건 아닙니다. 인연은 인연이고 도는 도인 법이지요."
"……."
"그리고 무엇보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백천이라는 인재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화산을 이끌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진초백의 얼굴이 움찔했다. 부릅뜨인 눈에 노기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현종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종남에게 백천이를 내주는 일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싸워서라도, 마지막 화산의 제자 하나가 남을 때까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백천을 지킬 것입니다. 그게 화산이고, 그게 동문인 법이지요."
현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더할 수 없이 큰 애정이 묻어났다.
격동하는 감동에, 백천이 막 목소리를 내려던 찰나였다.
"아니. 나는 거기까진 좀……."
"아, 좀! 여물어!"
"장문인이 말씀하시잖아, 인마!"
"아니, 사실이 그런데……."
"시끄럽다!"
사형제들에게 갖은 구박을 받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저 망할 놈.'
주변이 삽시간에 왁자지껄해졌다.
그 가운데, 진초백은 살짝 눈을 감았다.
'이것이구나.'
사실 현종의 그 어떤 경고도 진초백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를 진정으로 욱신거리게 한 것은,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백천의 눈빛이었다.
'네 가족은 이곳에 있구나.'
작은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진초백은 감상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다.
그는 백천을 보며 말했다.
"네 뜻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나는 이제……."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는다는 둥의 말은 마십시오."
"……."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걸 아는 데는 꽤 오래 걸렸지만요."
진초백의 입가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이래서야 이 녀석이 아들이 아니라 아비 같지 않은가?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진초백이 현종을 향해 포권 했다.
"장문인. 실례가 많았습니다."
"실례는 이쪽이 했지요."
"그럼."
진초백이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백천을 일별했다.
"언제 한번 집에 들르거라."
"예, 아버지."
"간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하지만 진금룡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청명과 백천을 노려보았다.
"화산의 장문인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
그에게서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온다.
"그때까지 화산이라는 곳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백천은 진금룡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자신을 잃지 마십시오."
"건방진 놈."
살기 어린 눈에 살짝 핏발이 선다.
"종화지회의 굴욕은 이곳에서 갚겠다. 나를 만나는 화산의 제자는 몸 성히 내려갈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거 말 참 많네."
진금룡의 고개가 청명에게 획 돌아갔다.
"뭐? 한판 떠?"
배를 쭉 내미는 청명을 보며 진금룡이 싸늘하게 웃었다.
"여기서는 의미가 없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손으로 화산을 몰락시켜 주마."
그 말을 끝으로 진금룡이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쉰다.
"청명아, 나는……."
"삐뚤어진 가족을 바로 잡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응?"
"두들겨 패."
"……."
"늘씬하게 말이야. 사람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거든."
그 진심 어린 충고에,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네가 가족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거 진심임.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