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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76화 (276/1,567)

276화. 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입니다. (1)

소림이 정적에 뒤덮였다.

'저…….'

'팽가가…….'

환호를 지르기 위해 준비하던 군중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화산의 제자 백천이 팽가의 팽도완을 쓰러뜨렸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다.

이미 화산의 제자들은 어제 자신의 능력을 명백하게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대다수는 화산의 깔끔한 승리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들 말을 잇지 못한 것은, 지금 비무대 위에서 벌어진 일이 너무도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백천이 팽도완을 일격에 날려 버렸다면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팽도완을 날려 버린 게 아니라 개 패듯이 패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의 머릿속엔 당연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화산이 정말 엄청나게 강한 건가?'

'저 팽가의 팽도완이 손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다고?'

화산의 제자들이 상대를 일격에 날려 보낼 때는 호쾌한 경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 그저 웃고 즐길 수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비무는 느낌이 다르다.

백천은 상대를 실력으로 완벽하게 찍어 눌렀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말이다.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 바들바들 떠는 팽도완의 모습을 보니, 현실감이 순식간에 훅 밀려들었다.

"진짜 화산이 우승하는 거 아냐?"

"에, 에이……. 그래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있는데."

"저기 누워 있는 놈은 오대세가가 아니더냐?"

"으으음. 그렇긴 한데."

이제 슬슬 중인들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화산이 몰고 온 돌풍이 단순한 돌풍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응이 생각 같지는 않지만."

백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청명에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나름 보여 줄 건 보여 준 것 같군."

"크으!"

그 담담한 말에 청명이 실실 웃었다.

"우리 동룡이 많이 컸네. 거드름도 피울 줄 알고?"

백천의 눈썹이 살짝 꿈틀한다.

"거드름은 원래 잘 피웠다."

"그것도 자랑이야?"

"……자랑은 아니고."

낮게 헛기침을 한 백천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여하튼 생각보다 너무 조용한데? 내가 실수라도 했나?"

"실수는 무슨."

청명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란 관중들의 시선이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그 반응을 본 청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그냥 웃고 즐기는 걸로 끝나면 안 되지.'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한다.

화산이 얼마나 강한지. 화산의 제자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말이다.

이들이 목격한 것들이 전부 이들의 입을 통해 천하로 퍼져 나갈 테니까.

'크으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청명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지난 세월이 눈앞을 스친다.

'내가 아오……. 저 코흘리개들을 데리고 내가!'

처음 그가 화산에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니 눈물이 장강처럼 도도하게 흐를 것 같다.

그 동네 흑도방파만도 못한 것들을 어르고 달래고, 쓰다듬고 북돋워서(?)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화산의 제자들은 이제 어디에 내어 놔도 당당한 무인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청명이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형! 장문사형! 보고 계시오? 내가 이만큼 해냈소!'

그러니까 칭찬 좀!

- 아직 한참 멀었다, 이놈아!

아니, 이 양반이?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사람이 잘한 건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줘야지!

그리고 우리 애들 무시하쇼? 지금 우리 애들이 옛날 화산 애들보다 더 세…….

"어?"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더 세다고?

'진짜 그러네?'

지금의 화산이 과거의 화산을 따라잡았는가?

그건 절대 아니다.

지금의 화산이 아무리 기세를 올리고 있다지만, 매화검문으로 불리던 전성기의 화산을 생각하면 아직은 한참 못 미친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당대의 이대제자들과 지금의 이대제자들의 수준만을 놓고 비교하면?

'이기겠는데?'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질 것 같지가 않다.

당대의 화산이 천하제일을 다투었던 문파임은 분명하다. 청명을 제외하고도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꼽혔을 테니까. 당연히 이대제자들의 수준도 강호에서 최상위였다.

지금과 비교하자면…….

그래, 무당!

지금의 무당파가 강호에서 가지는 입지와 그때의 화산이 가졌던 입지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때 화산의 이대제자들이 지금 무당의 이대제자보다 강한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데 우리 애들은 무당 이대제자들을 후려 까잖아?'

말 그대로 때려잡는 수준이 아닌가?

그가 매화검존으로 명성을 날릴 당시의 이대제자들과 지금의 이대제자들을 머릿속에서 붙여 본 청명이 입을 살짝 벌렸다.

'와, 이기네?'

사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 개고생을 해서 자소단을 만들어 먹이고, 한창 실력이 쭉쭉 늘 시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과 함께 굴러다니며 수련을 했다.

강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청명은 슬쩍 백천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장문사형이 이 나이대일 때보다 훨씬 더 세다 이거지?'

그 고생을 한 보람이 있는지, 과거의 화산을 능가하는 역대 최강의 화산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삼스레 자신의 업적에 감탄하며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청명이 미소를 짓자 백천은 되레 불안해진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사람 불안하게."

"아냐. 아냐. 아주 잘하고 있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그냥 말을 해라."

"잘하고 있다니까."

"네가 잘하고 있다니까 이상하잖아!"

잠겨 있던 감동에서 강제로 끌려나온 청명이 슬쩍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것들은 칭찬을 해 줘도 뭐라고 하네?"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에라!"

결국 청명과 백천이 드잡이를 시작하자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 둘을 떼어 놓았다.

한편 조금 먼 단상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파의 장문인들은 남몰래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일이란 말인가?'

'팽가의 도는 완벽했다. 그런데 그 도를 완력으로 꺾어 버린다고?'

군중들이 결과에 주목한다면 장문인들은 과정에 주목했다.

하북팽가.

무거움과 패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법으로 천하에 인정받는 명문.

강맹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도법은 언제나 경계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날렵한 검을 쓰는 것으로 알려진 화산의 제자가 설마 팽가의 도를 힘으로 눌러 버릴 줄이야.

저 두껍고 무거운 도. 그것도 허공에 뛰어올라 내력을 실어 내리치는 도를 검으로 받아 튕겨 내는 건 최소한 배 이상의 실력차가 있어야 엄두라도 내 볼 수 있는 일이다.

'대체 어떤 훈련을 해 왔기에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백천이라. 백천.'

지금까지 화산의 제자들이 보여 준 것도 굉장했지만, 백천의 일 수는 차원이 달랐다. 장문인들의 머릿속에 청명뿐만 아니라 백천이라는 이름이 확연하게 틀어박히는 순간이었다.

'화산신룡 청명에 화정검 백천이라.'

한 문파에 하나 나오기도 힘든 재원이 둘이나 있다.

화산파의 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들의 얼굴은 자못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의 문파 내에서 백천 같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만으로 한정할 경우 화산이 지금 천하의 명문들과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시선이 슬쩍 뒤쪽에 앉아 있는 현종에게로 향한다.

"으음."

기이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는 저 화산의 현종이 뒤에 앉아 있다는 것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등 뒤에서 감시를 받는 느낌이로군.'

자신들을 등 뒤에서 지켜보는 현종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끌끌끌끌.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이거, 저 아이가 후대의 장문이 된다면 화산의 미래가 아주 밝겠습니다."

개방 방주 대리 자격으로 자리를 차고앉은 개방의 장로 자오개(慈烏丐) 능삼(能三)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별말씀을."

"아닙니다, 아닙니다. 한 문파에 하나 나기도 힘든 인재가 몇이나 되는 걸 보면 화산의 불운도 이제 끝이 난 모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다만……."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저 아이들만큼은 천하의 어디에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자신할 정도는 됩니다."

"오오오."

현종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이, 이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도인의 신분으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려니 뱃속이 꾹꾹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뭐?

부끄럽지 않아?

'솔직히 좀 부끄럽다.'

실력이 아니라 인성이.

현종의 얼굴이 실룩거린다.

'이제 실력으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으니 도문다운 심성만 갖추면 되는데…….'

사람들이 보건 말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며 드잡이하는 백천과 청명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했더니.'

너무 건강하게 크지 않았는가?

그리고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는 말이 건강 빼고 다른 건 다 망쳐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진대…….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당군악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눈빛에는

'내가 장문인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는 뜻이 실려 있었다.

현종은 괜히 눈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자오개가 낄낄 웃었다.

"이 기세라면 화산이 과거의 영광을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다그려."

"아직은 요원한 일입니다."

"요원하다니요. 저 아이들을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핫. 이러다가 구파일방이 십파로 불리는 날이 오는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

귀를 열고 있던 구파 장문인들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이들이 명백한 동요를 보일 만큼 민감한 이야기였다.

"이크, 이크. 늙은이가 또 주책을 부렸구려. 방주가 주둥아리 꾹 다물고 자리나 지키다 오라고 했는데. 끌끌끌."

자오개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살짝 몸을 뺀다.

'저 늙은 너구리가…….'

자오개쯤 되는 이가 실수로 말을 흘릴 리가 없다. 이건 명백히 이곳에 있는 구파 장문인들에 대한 조롱이다.

"크흐흠."

"크흠!"

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이 진심으로 불편한 이유는, 저 말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무리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겨우 이대제자에 불과한 아이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저 아이들이 훗날 화산을 이끌 나이가 된다면?

'그건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허도진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은 그의 대에 소림을 따라잡는 것이다.

그럼 가장 당면하고 싶지 않은 일은?

'화산이 무당의 위협이 되는 것이겠지.'

과거 화산과 무당은 천하제일검문은 물론 천하제일도문을 두고도 겨루는 사이였다.

물론 세인들은 무당은 화산보다 높은 문파로 인식하지만, 밀어내도 밀어내도 발밑에 찰싹 달라붙어 가시를 세우는 문파를 곱게 볼 이가 누가 있는가?

'아무래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 같군.'

허도진인을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촵촵촵촵.

"……."

촵촵촵촵촵!

"……."

백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청명아."

"응?"

"……너 여기에 와서부터 뭔가 쉬지 않고 먹는 것 같은데."

"줄까?"

청명이 옆에 끼고 있던 과자를 백천에게 내밀었다.

"그 말이 아니고!"

청명이 피식 웃는다.

"원래 이런 걸 볼 때는 뭘 먹어 줘야지. 그리고 싸우려면 잘 먹어야 돼. 든든하게."

네가 왜 든든해야 하는데?

두 번째 비무도 멀쩡한 애 얼굴을 걷어차서 죽도 못 먹게 만들어 놓고는.

"여하튼 사람들이 많이 보는데 적어도 진지한 모습은 보여야지."

"이제 와서?"

"……사실 좀 늦은 기분이긴 하다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잖느냐?"

"쯧쯧. 여유가 넘치시네, 우리 사숙."

혀를 차며 능글거리던 청명이 비무대를 향해 턱짓했다.

"그런데 사숙. 그리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닐 거야. 아마 오늘부터는 진짜가 나올 테니까."

"응?"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비무대 위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획 돌아갔다.

거대한 대검을 든 백의의 사내가 오만한 자세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 건너편에는 몰골이 엉망이 된 무인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반으로 동강이 난 검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 남궁의 단악검이다!"

"그렇지! 남궁도휘가 있었지! 과연 남궁세가!"

백의의 사내가 슬쩍 백천과 청명이 있는 곳을 돌아본다.

"단악검……."

백천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상대의 검을 자른다는 것은 더없이 어려운 일이고, 또한 더없이 잔인한 짓이다. 실력 차이를 너무도 명백하게 보여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남궁도휘는 자신이 쓰러뜨린 상대에게는 이미 흥미를 잃었다는 듯 화산의 제자들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다.

"재밌네, 저거."

청명이 씨익 웃었다.

"거봐. 오늘부터는 진짜들이 나올 거라고 했지?"

"……지금부터라는 거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소림도 생각이 있을 테니, 적당히 주인공이 될 만한 이들은 뒤쪽으로 밀어 놨겠지. 그래야 극적이니까."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그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소림의 생각에 화산은 그저 일찍 나와 적당히 흥을 돋우는 이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 저기도 봐."

"응?"

"익숙한 얼굴이지?"

백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종남의 진금룡!"

공초의 호명과 함께 비무대를 오르는 진금룡의 모습이 백천의 눈에 들어왔다.

'형님…….'

백천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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