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명문은 대가리가 없대? (5)
비무대에 오르는 백천을 보며, 현종은 소매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백천아.'
이어 몸에도 힘이 바짝 들어간다.
백천이 질까 봐?
그런 건 아니다.
현종은 그를 더없이 신뢰한다. 청명이 굴러들어 온 복덩이라면 백천은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화산의 정화나 다름없다.
청명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자식이라면, 백천은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키워 온 자식과도 같다.
그러니 자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아이가 화산의 대제자입니까?"
"예. 백자 배 중 대제자이지요."
"그럼 저 아이가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한 아이들 중 가장 항렬이 높겠군요."
"그렇습니다."
더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금 전보다 더 경계하는 눈으로 백천을 응시하는 이들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어제와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군.'
어제는 그래도 체면을 지킨답시고 나름의 덕담이 오고 갔었다. 그런데 청명이가 활약한 이후에 화산의 연전연승이 이어지면서 조금 분위기가 식어 간다 싶더니, 이제는 숫제 한기가 흐를 정도였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현종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들의 면이 상하는 것이 두려운가?
아니면 기껏 공고히 해 뒀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세력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겨우 이대제자이외다.'
만일 이곳이 일대제자와 장로들이 나서서 싸우는 진검 승부의 장이었다면 이들의 반응을 백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문파의 제대로 된 전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린아이들의 활약에 이토록 정색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것이 천하를 이끌어 가는 이들이란 말인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던 현종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틀렸구나.'
이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잘못된 것은 현종이다.
똑같은 능력과 실력을 갖춘 두 문파에 이들 중 하나와 현종이 장문인으로 있다면 어떤 문파가 더 발전해 나가겠는가?
경쟁하느니 양보하는 현종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결국은 문파를 나락으로 밀어 넣을 게 분명하다.
'시기를 조심하라 했던가?'
앞쪽에 앉아 있는 소림 장문 법정의 뒷모습을 보며 현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께서는 여기까지 보셨구려.'
물론 사람 좋은 이도 좋은 장문인일 수 있다.
하지만 협의만을 외치며 자신의 것을 챙기지 못하는 이는 결국 빼앗길 수밖에 없다.
지키기 위해서는 독해져야 한다.
치졸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의 행동이 오로지 자신의 문파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현종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나도 더욱 독해져야 한다.'
저 아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저 아이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장문인들의 반응에서 또 하나를 배우는 현종이었다.
"백천이라면 무당의 검룡을 꺾었다는 그 아이가 아닙니까? 이제는 검룡 대신 또 다른 오룡으로 불린다지요? 백룡(白龍)이라 했었나?"
누군가의 말에 무당 장문인 허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가 신세를 졌지요. 하나 저는 되레 저 아이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진현은 그날 이후로 침식을 잊어 가며 수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제 재능만 믿던 아이가 노력까지 더 하게 되었으니 그 미래가 어떨지 저도 기대하는 중입니다."
"하하.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요."
"아마."
허도진인이 웃는 낯으로 슬쩍 현종을 바라본다.
"다음 승부의 결과는 이전과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이 비무대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과거의 현종이었다면 여기서 겸양의 말을 한 뒤 적당히 상대를 추켜세워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현종은 안다.
스스로를 낮출 수는 있어도 화산을 낮춰서는 안 된다.
그 자신이야 두엄 더미에서 구르고 치졸하고 속 좁다는 말을 듣더라도, 저 아이들은 단 한 치도 깎아내릴 수 없다.
그게 장문인이 해야 할 일이다.
"무당의 검룡이 성취를 얻었다면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현종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백천이의 재능은 저조차 놀랄 정도입니다. 그 아이가 한번 이겼던 상대에게 다시 진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허도진인이 살짝 놀란 눈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하하하. 어제 비무의 결과가 장문인께 큰 자신감을 준 모양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결과가 어찌 자신감이 되겠습니까? 제게 자신감을 준 것은 승부의 결과가 아니라 저 아이들의 실력입니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허도진인이 말없이 현종을 빤히 바라보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옆쪽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인연을 논하려면 먼저 제 손자놈을 이겨야 할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화서(彭和庶)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무장에 올라서는 백천의 상대가 하북팽가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허도진인과 현종의 얼굴에 무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실례했습니다, 가주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흠!"
크게 콧김을 뿜은 팽화서가 팔짱을 끼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도완(刀完)이가 그리 명성이 높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 실력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소! 그러니 두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보시오!"
허도진인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현종은 화를 참는 팽화서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북팽가의 가주조차도 제 가문의 아이를 저리 감싸고도는데, 나는 무엇이라고 저 아이들보다 나의 체면을 우선시했다는 말인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는 백천에게 속으로 간절한 응원의 말을 건네었다.
'백천아. 이기거라.'
양손을 가볍게 모은 그의 눈에 신뢰와 우려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가볍다.
백천이 검을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풀기를 반복했다.
'저 녀석들이 한 말이 뭔지 알겠군.'
상대는 하북팽가의 팽도완이라 했다.
딱히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하북팽가의 대표로 나올 정도라면 천하를 뒤져도 손꼽히는 기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백천은 그에게서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일정하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그리고 저 위쪽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현종의 시선뿐이다.
'장문인.'
과거의 백천은 그저 자신의 성장만을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청명을 만나게 되고, 많은 변화를 겪으며 새삼스레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백천의 신분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고 받아들여 준 장문인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말이다.
'나는 화산을 최고의 문파로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화산의 장문인을 중원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이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를 이겨야 한다.
백천이 한 점 미혹 없는 눈으로 팽도완을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팽도완은 그 눈빛을 도발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건방진 눈이로군."
그가 한 손에 든 대도를 어깨에 위협적으로 걸쳤다.
"어제 나름 활약을 했다고 겁 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이지?"
다짜고짜 도발을 날려 오는 그를 보며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상대는 왜 이런 놈일까?'
그럴싸하게 어울릴 수 있는 상대라면 더 좋을 텐데 말이다.
백천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딱히 그렇진 않소. 지금도 조금 겁을 먹은 상태니까."
"하하하하. 주둥아리는 그 얼굴처럼 번지르르하군."
"……."
어차피 말을 해 봐야 좋은 소리를 듣기는 글렀다는 걸 깨달은 백천이 검을 움켜잡았다.
"말로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시작하겠소."
"아니, 아니야. 내가 네게 기회를 한 번 줄 생각이거든."
"기회라고 했소?"
팽도완이 껄껄 웃더니 말한다.
"지금이라도 기권하고 내려가면 그 빤질빤질한 얼굴이 상할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너같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을 보면 짜증이 치솟거든."
"……기생오라비?"
"화산이 요행히 활약을 한 모양이지만, 그건 아직 진짜를 만나지 못해서이지. 하지만 너는 운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화산이 상대한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라. 개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지금 내려가라."
"……거 충고 고맙군."
백천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본 윤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저것도 닮아 가시네."
"그냥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사형. 이제 돌이키기에는 늦었습니다."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더냐?"
가면 갈수록 청명을 닮아 가는 사숙을 보며 윤종과 조걸이 눈물을 삼켰다.
과거 그들이 그토록 존경했던, 협과 도를 아는 그들의 사숙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아, 물론 지금도 존경은 한다. 존경은.
문제는 그 존경의 느낌이 좀 달라졌다는 거겠지.
팽도완이 이죽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 됐고."
"음?"
백천이 살짝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다 했으면 덤비시지. 슬슬 지루하니까."
"……이놈이?"
팽도완이 도를 어깨에서 내리더니 백천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운이 좀 따라 주었다고 너희가 강한 줄 아는 모양이구나. 그럼 내가 똑똑히 알려 주지. 이미 한번 대가 끊겼던 화산 따위는 절대 명문의 힘을 당하지 못한다는 걸!"
그 오만한 말에 백천이 피식 웃었다.
"명문?"
"그렇다."
그리고 뒷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잘 아는 놈이 그 말을 들었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다."
"……뭐?"
"명문은 대가리가 없대?"
"……."
백천이 검을 곧게 뻗으며 팽도완을 겨누었다.
"와 봐. 그 잘난 명문의 대가리를 내가 깨 줄 테니까."
팽도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해진 그가 이를 갈았다.
"이 건방진 놈이!"
그리고 마침내 도를 꽉 움켜쥔 채 성난 소처럼 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쯧."
백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는 짓은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과연 하북팽가에서 대충 가르친 것은 아닌지 어마어마한 기세가 그를 압박해 들어온다.
다만…….
'이런 기분이었겠군.'
예전에 그가 청명의 버릇을 고치니 어쩌니 했을 때, 청명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명문이니 어쩌니 하는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배경이 자신의 실력이라 생각한다.
백천 역시 청명에게 대가리가 깨지고서야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백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거 은혜를 베풀고 싶지는 않은데."
"뭔 헛소리냐!"
팽도완이 비호처럼 뛰어 오르며 백천의 정수리를 향해 도를 내려쳤다.
하북팽가가 천하에 자랑하는 절기.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중 비호살토(飛虎殺兎)의 초식이었다.
강렬한 적색 도기(刀氣)를 품은 도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백천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 강맹한 기세와 동시에, 팽도완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백천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피해도 소용없다!'
비호살토를 정면으로 맞받는 멍청이라면 두 쪽으로 갈라져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반드시 피한다.
어느 쪽으로 피하든 한번 기세를 잃으면 절대 그의 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면 이어지는 연환격(連環擊)으로 단숨에 승기를 잡고 저 재수 없는 면상에 칼자국을 그어 줄…….
그때였다.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팽도완의 도를 빤히 바라보던 백천이 움켜잡은 검을 뒤쪽으로 살짝 젖혔다. 그러더니 이내 가공할 기세로 정확히 팽도완의 도를 향해 휘둘렀다.
'미, 미친?'
팽도완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토록 강렬하게 내리치는 대도를 저 얇디얇은 검으로 맞받아치겠다고?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이게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건 알 거다.
'오냐! 나를 원망 마라!'
이를 악문 팽도완은 내리치는 도에 있는 대로 기운을 밀어 넣었다.
마침내 그의 도와 백천의 검이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커다란 폭음이 터지더니 한 사람이 뒤쪽으로 튕겨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 저런!"
"말도 안 돼!"
지켜보던 관객들에게서 호성이 터져 나왔다.
몸집 차이로 보나, 병기의 무게로 보나 당연히 백천이 튕겨나가야 정상이건만.
바닥을 뒹군 이는 팽도완이었다.
"크, 크으윽?"
그는 쓰러진 채로 힘겹게 고개만 들어 백천을 보았다. 경악을 숨길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쯧."
백천이 가볍게 검을 떨치고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 번의 충돌만으로 팔에 금이 가고, 팔의 근육이 모조리 찢어져 버린 팽도완과는 달리, 백천은 일단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전혀 없었다.
마침내 팽도완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백천이 혀를 찼다.
"야, 너."
그리고 진심으로 조언했다.
"운동 좀 해라."
"……."
"그렇게 약해 빠져서는 화산에 오면 물통도 못 나른다."
팽도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약하다고?
'이 내가?'
그의 시선이 자신의 팔뚝을 훑었다.
기골이 장대하기로 유명한 팽가의 후손답게, 그의 팔뚝은 평범한 이의 배에 달한다. 덩치 역시 웬만한 곰은 형님 하며 고개를 숙일 정도다.
그런데 약하다고?
팽도완이 도통 이해를 못 하니 백천은 한숨을 쉬며 팔을 걷어붙였다.
쩍쩍 갈라져 있는 근육이 드러났다. 정말 지옥 같은 단련으로 빚어진 근육이.
팽도완이 이를 갈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이……. 이 개 같은 놈이 어딜……."
"오? 개 같은 놈? 그래.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으응?"
백천이 검을 뒤집어 잡고 뒷면으로 팽도완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쩌억!
잘 익은 수박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팽도완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쩍! 쩍! 쩍! 쩍! 쩌억!
다섯 번의 타격이 끝나고, 입에 게거품을 문 팽도완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일별한 백천은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을 떼던 그는 돌연 뭔가 놓쳤다는 듯 아차 하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진심으로 통탄했다.
"아! 한 대 더 때렸어야 했는데!"
다섯 번 외치고 여섯 번 패야 제대로 아픈데!
"에이!"
아직 덜 배웠네.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