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명문은 대가리가 없대? (4)
현종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크흡!"
걷다가도 웃고, 문고리를 잡다가도 웃고, 심지어는 밥을 먹다가도 웃음이 터져 입을 틀어막기 일쑤였다.
현상도 날아가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그는 무각주이니 오히려 장문인보다 좀 더 근엄해야 하는데, 자꾸만 제멋대로 뒤틀리는 입꼬리를 어찌하기 힘들었다.
수십 년을 수양했지만, 얼굴 근육 하나 어쩌지 못하는 게 사람인 모양이다.
되레 그중에서 가장 침착한 것은 현영이었다.
"거 체통 좀 지키십시오. 애들 앞에서 그리 좋아 죽는 티를 내서야 되겠습니까?"
현종과 현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게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끄응."
현종이 앓는 소리만 내자 현상이 물었다.
"너는 놀랍지도 않더냐?"
"뭐가 말입니까?"
"애들이 저리 대활약을 하는데, 놀랍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 말에 현영이 피식 웃는다.
"놀랄 일도 많습니다. 청명이가 이미 저놈들 대가리를 깨 버리겠다고 한 마당에 뭐가 놀랍단 말입니까?"
"……."
"어디 청명이 놈이 없는 소리 하는 걸 본 적 있으십니까? 그놈이 실없는 소리는 종종해도 없는 말은 안 하는 놈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현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 녀석이 대가리를 깬다고 하면 정말 대가리를 깨는 겁니다. 그런데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현종이 눈을 끔뻑였다.
현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도 이제는 실감하실 때가 됐습니다."
"뭘 말이더냐?"
"화산은 강합니다."
현종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듣고 있던 현상도 마찬가지였다.
현영이 그런 둘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고는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아이가 아름드리나무를 부러뜨린다면 놀랄 일이지만, 작은 묘목을 부러뜨리는 건 놀랄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 그렇지."
"적어도 저 아이들의 화산은 강한 문파입니다. 우리 때와는 다릅니다, 장문인. 그러니 저 아이들의 활약에 일일이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현종이 살짝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담담한 저 말들이 현종의 가슴을 뒤흔든다.
강하다라.
백 년 내에 화산이 그런 평가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간 '강함'이라는 말은 다른 문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스스로 강하다는 말을 입에 올리게 되는 날이 오다니.
"이제 곧 다른 문파들도 화산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인정 안 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화산을 무시하다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박살이 난 자파의 아이들이 바보 천치가 될 판인데."
"그렇겠지."
"그러니 우리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저 아이들의 거름이 되어 주어야겠지."
그의 자애로운 표정을 보던 현영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장문인.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음?"
"해남파 장문인 표정이 어땠습니까?"
"……."
"종남도 아마 볼만했을 것 같은데. 이야기 좀 해 보십시오! 제가 이거 못 들으면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습니다."
"어허. 어찌 도인이 되어서 남의 불행을 기뻐한다는 말이더냐!"
그러자 현상이 넌지시 말한다.
"저도 궁금합니다, 장문인."
"……."
"거 그러지 말고 말 좀 해 보십시오. 해남파 장문인 표정이 어땠습니까?"
"그, 그야……."
썩었지.
"종남은! 종남은요? 종리곡 그 인간은 배가 아파서 잠도 못 잘 텐데!"
"되레 덕담을 하더구나."
"그래요? 낄낄낄낄. 그 덕담을 하는 속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히히히힛!"
아이처럼 좋아하는 현영을 보며 현종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개판이네.'
남의 불행을 기뻐하며 아이처럼 웃는 도인이라니.
화산은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 * *
이튿날.
비무장에 도착한 화산의 제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 오전에는 화산파의 비무가 없어서 조금 천천히 나온 참이었다.
방에 들러붙어 안 가겠다고 발악을 하는 청명이 놈을 끌어내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리기도 했고.
어쨌거나 여차저차 정오가 다 되어서 비무장에 도착한 참인데…….
"뭐야."
"분위기 왜 이래?"
화산의 제자들이 멍한 눈으로 비무장을 바라본다.
어차피 경계의 시선이 쏟아지는 거야 당연하지 않냐고?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물론 그런 경계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어제 그들이 한 일이 있는데, 다른 문파의 눈빛에 경계심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들에게 꽂히는 경계의 눈초리가 아니라 비무대 위의 상황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비켜라! 빌어먹을!"
날카로운 검기가 과격하게 쏟아지는 비무대 위를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눈을 끔뻑였다.
"약 빨았나?"
"흑도 애들 데리고 왔어?"
대회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판이하다.
어제는 그래도 나름 훈훈한 분위기가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이야 분위기고 나발이고 제대로 보일 새도 없이 비무를 끝내 버렸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다른 비무대에서는 나름 명문의 제자들다운 비무가 이뤄졌다.
하지만 오늘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개판 났네?"
조걸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딱 들어맞았다.
살벌한 살기가 넘쳐난다. 어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살기 어린 초식이 서로를 노리고, 공격하는 이들의 눈에도 독기가 가득 차 있다.
"왜 저래, 쟤들?"
백천의 말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왜 저러긴. 여기까지 칼 들고 온 놈이면 남이 활약하고 명성을 얻는 걸 손가락 빨면서 지켜만 보다가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거지."
"응?"
"어제 이긴 놈들 중에 기억에 남는 이들이 있어?"
백천이 곰곰이 생각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우리 애들의 비무를 주시해야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른 비무대를 주시했대?"
"……그건 아니겠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어제도 평범한 비무대회였으면 나름 이름을 날렸을 놈들이 제법 나왔어. 딱 보기에도 실력이 범상치 않은 놈들이."
"으음."
"차분한 분위기에서 대회가 진행되었으면 보통은 그런 놈들이 이름을 날리고 문파의 명예를 드높이는 법이지만……."
"우리 때문에 묻혀 버렸다?"
"그렇지."
청명이 씨익 웃는다.
"죽어라고 싸워서 이겼는데 사람들이 모두 화산 이야기만 해. 그 꼴 보고도 참을 수 있을 놈들이 몇이나 되겠어?"
"……."
"설사 본인은 참을 수 있다고 해도……."
청명의 시선이 단상 위로 슬쩍 옮겨 갔다.
"저 양반들은 입장이 좀 다르겠지."
이건 과거의 청명이 명문에서 느꼈던 단점과 궤를 같이하는 이야기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제자가 남에게 뒤처지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 기초고 나발이고 일단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전적인 초식을 가르치게 되는 게 사람이다.
비교는 늘 사람을 망치는 주범이니까.
"내 새끼가 글 좀 못 외우고, 머리가 우둔해도 예뻐하는 게 사람이잖아?"
"그렇지. 그래도 자식이니까."
"그래. 그런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이 나한테 와서 제 아들놈 자랑을 하기 시작해. 벌써 사서삼경을 외우고 학당에서 신동으로 불린다는 말을 지껄이는 거지. 그러면 그날은 무조건 집안 대들보 뽑히고 서까래 무너지는 거야."
"……."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비유가 너무 찰떡같아서 이해를 못 할 도리가 없다. 당장 백천이라 해도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속에서 천불이 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청명이 씨익 웃으며 장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턱짓했다.
"저 양반들이 어제 숙소로 돌아가서 무슨 말을 했을까?"
"……."
"과연
'눈에 띄지 않아도 좋으니 천천히 너희의 실력을 발휘하길 바란다.'
라고 했을까?"
"그, 그러지 않았을까? 그래도 명문거파의 장문인들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청명이 씨익 웃었다.
'하기야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
명문거파의 장문인쯤 되면 반쯤은 신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천만에.'
장문인들은 누구보다 세속적이다.
거대한 문파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그 많은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동시에 문파의 명성을 날려 끊임없이 새로운 제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성이 높아지면 더 좋은 재질을 가진 제자들이 몰려들고, 좋은 재질의 가진 이들은 성장하여 다시 문파의 명성을 드높인다.
이 선순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장문인들은 문파의 명성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당장 명성을 잃은 화산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만 봐도 결론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던가?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마 이들은 들어도 이게 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장문인들이 얼마나 잇속에 빠르고 세속에 집착하는지는 나이 지긋할 때까지 그들을 겪어 본 청명이나 알 수 있는 일이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무 말을 안 했는데 쟤들이 저리 독을 품고 날뛰는 거겠어?"
"……."
이에 할 말이 없어진 백천이 입을 닫았다.
"두고 봐. 이제 우리가 비무에 올라가면 다들 어떻게든 화산의 발목을 잡아 늘어지려고 안달복달할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고?"
"뭘 어떻게 해?"
청명은 태연하게 씩 웃었다.
"달라질 거 없지. 분위기도 달아올랐겠다, 보이는 족족 대가리를 깨 버리면 그만이야."
그리고 슬쩍 치러지고 있는 비무를 바라보았다.
"아아아아악! 내 팔!"
검면에 얻어맞아 팔이 부러진 무인 하나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소매가 피로 물드는 걸 보면 어설프게 빗겨 맞아 베이기까지 한 모양이다.
승리를 따낸 이의 얼굴에 쾌감이 번져 간다.
비무란 어느 정도의 부상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명백히 과열되어 있었다.
"분위기 좋고."
청명이 입꼬리를 싸악 말아 올린다.
"명문거파와 명문세가의 친목을 다지는 자리? 웃기고 자빠졌네. 누가 그렇게 만들어 준대?"
영광은 화산을 위한 것이면 충분하다.
다른 이들에게 나눠 줄 영광은 없다. 화산이 아닌 이들이 가져가야 할 것은 치욕뿐이다.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자들을 다잡기 시작했다.
청명은 뒤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끄고 단상 위의 장문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거들먹거리시겠다 이거지?'
저 위에서 비무를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정말 궁지에 몰리면 비무에 나서는 제자 옆에서 조언을 하기 바쁠 테니까.
"자, 그 여유가 얼마나 가실까?"
딱히 저들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화산의 위기를 외면했다고 하나, 저들에게 반드시 화산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당시 그 선택을 한 이들은 이미 죽어 사라진 뒤니까.
후손들에게 선조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선조는 선조. 후손은 후손이다.
다만 한 가지.
"사숙."
"응?"
"봐 봐, 저기."
청명이 가리킨 곳은 장문인들이 앉아 있는 단상 위였다.
선뜻 이해하지 못한 백천은 의문 어린 얼굴로 물었다.
"왜?"
"저거 짜증 나지 않아?"
"응?"
다시 한번 단상 위를 자세히 살펴본 백천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단상 가장 앞에 마련된 호화로운 의자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 배치된 조금 작은 의자에 그의 장문인, 현종이 앉아 있었다.
구파일방의 뒷자리.
같은 단상 위지만 문파가 가진 위세에 따라 그 격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거슬리는군."
그곳에 시선을 못 박은 채로, 백천이 중얼거렸다.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꺾을 때마다 우두둑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우리 장문인인데, 저기서 찬밥 취급을 받으시네. 좀 궁금해졌어. 오늘도 애새끼들 대가리를 다 깨 놓으면 어떨까? 그래도 내일 장문인이 또 저 자리에 앉으실까?"
"그럴 수도 있지."
백천이 싸늘한 눈으로 답했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럼 자리가 바뀔 때까지 한번 날뛰어 볼까?"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 하네. 이래야 내 사숙이지."
장문인은 자신이 앉은 자리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제자들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니 속이 뒤틀리고 뒤집힌다.
'부모는 자식이 모자라도 예쁘다고 내 입으로 말했지.'
하지만 청명에게 현종은 모자라지 않은 자식이다. 화산이 올곧게 서 있기만 했었다면 충분히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을 동량이었다.
"되찾아 줘야지."
일단은 자리 하나.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한 그것부터 말이다.
그때, 대회의 진행을 맡은 공초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화산파의 백천!"
호명이 들리자마자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화산파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쏠렸다.
그러자 백천이 검을 굳게 틀어쥔 채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걱정할 것 없다."
"응?"
"화려하게 보여 주고 돌아오지. 감히 화산의 장문인을 저기에 앉힌 것은 실수라는 걸 말이다."
비무대로 향하는 백천의 등을 보며 청명이 흡족하게 씨익 웃었다.
"여하튼 한 번씩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한다니까."
잘 배웠네.
아주 잘 배웠어.
낄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