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명문은 대가리가 없대? (3)
"얘들아, 침착하……."
쾅!
"아니, 무작정 들이대지 말……."
쾅!
"일 격으로 끝내지 말라고, 이놈들아!"
쾅!
백천의 안타까운 비명이 무색하게도, 화산 제자들의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환호하던 관객들도 이제는 점점 황당한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아, 아니…… 어떻게 하나같이?"
이제 모두가 비무대 위에 있는 검은 무복과 매화 무늬만을 찾았다.
'이번에도 또?'
비무대 위에 선 화산의 제자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엔 기대감과 황당함이 동시에 어렸다.
그런 부담스러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윤종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데.'
그에게 쏠리는 이 기대감 넘치는 시선은 둘째 치고…….
"이, 이익!"
"……."
윤종은 건너편에 있는 상대를 떨떠름한 얼굴로 보았다.
'얼씨구?'
잔뜩 힘이 들어간 다리. 그리고 검을 너무 꽉 쥐어 피나 통할까 싶은 손.
어깨는 또 어떤가. 너무 굳어 금방이라도 목 위로 솟아오를 것 같다.
절대 자신만은 일 격에 비무장 밖으로 날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지만…….
'저래서야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텐데.'
물론 저자를 탓할 일은 아니다. 윤종이 저 입장이었어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을 테니까.
심지어 비무를 주관하는 공초의 시선에서도 윤종에 대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너도 화산의 제자니까 뭔가 보여 주겠지 하는 눈빛.
공정하기 이를 데 없어야 할 심판마저 저런 눈빛을 보이는데, 그런 윤종을 상대해야 하는 저 점창의 제자가 어떤 기분일지는 안 들어 보아도 빤하지 않은가.
윤종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눈빛을 슬쩍 흘려 넘기며 검을 꽉 쥐었다.
상대가 어떻고 상황이 어떻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다가는 저 악귀 같은 놈이 뭔 소리를 할지 벌써 귀에 선하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살짝 뺐다. 역시 중요한 건 힘을 주는 게 아니라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살짝 심호흡을 한 윤종이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침착……. 또 침착하게…….
"시작!"
공초의 외침과 동시에 상대가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든다.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린 일 검.
뻣뻣하게 굳은 자세와 잔뜩 긴장한 얼굴이 무색하게 그에게 날아드는 검은 쾌속하고도 날카로웠다.
'과연 점창!'
명문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검이다.
다만…….
'이상하네?'
기이하게도 윤종은 이 검에서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상대의 기세가 무뎌졌냐고?
천만에.
'빠른데 느리고, 강한데 약해.'
기이한 일이다.
상대의 검은 분명 쾌속하고 강하다. 하지만 윤종의 눈에는 그 쾌속한 검이 너무도 느리게만 보였다.
'빌어먹을 몸이 길들여졌어.'
청명이 놈이 걸핏하면 휘둘러 대는 검에 비하자면, 이 검은 멈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청명의 검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더라도, 빗겨 맞을 수준은 되는 윤종에게 이 검을 피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스스슷.
일직선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윤종은 좌로 한 발짝 움직이는 걸로 깔끔하게 피해 냈다.
동시에, 상대의 훤히 비어 버린 옆구리가 보였다.
'일단은 가볍게 탐색…….'
하지만 머리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검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점창 제자의 비어 있는 옆구리를 검면으로 호쾌하게 후려쳐 버렸다.
쾅!
"아아아아아악!"
옆구리를 얻어맞은 점창 제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비무대 밖으로 날아갔다.
윤종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눈으로 날아간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좀 더 침착하게 상대의 검을 견식했어야 하는 건데…….
이게 이러면 안 되는…….
"승자! 화산의 윤종!"
공초의 선언과 함께 다시 한번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또 일 격이다!"
"뭔 놈의 문파가 비무를 다 일 격으로 끝내는 거냐? 매화검문이 아니라 일격검문(一擊劍門)이라 불러야겠구먼!"
"대단해! 허허허허! 진짜 대단하다!"
윤종은 그 함성을 온몸으로 받으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황당함에 말을 잃은 백천을 보며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사숙. 일단은 그냥 검을 맞대 보려고 한 것뿐인데."
"……뿐인데?"
"틈이 보이는 순간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습니다."
"……."
백천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고생했다."
"저놈이…… 우릴 길들여 놨습니다, 사숙."
"……."
백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슬쩍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당과를 씹어 먹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사람이 웃는 낯에도 침을 뱉을 수 있구나.'
옛말에도 잘못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낄낄대며 웃는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나 열불이 터지는 걸 보니 말이다.
화산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선 첫날은 아주 수월하게 지나갔다.
물론 그런 그 활약을 지켜보는 타 문파들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겠지만, 화산이 굳이 그들의 입장까지 염려해 줄 필요는 없잖은가?
하지만 천하비무대회 예선 첫날을 이 이상 좋을 수 없는 성적으로 마친 화산의 제자들은 의외로 그리 들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묵묵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화산파가 기거하는 소림의 전각.
"……."
조걸은 초점이 반쯤 나간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무에 참가했던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셌나?"
"……그냥 쟤들이 약한 것 아닐까?"
"그게 말이 되냐? 전부 구파일방의 제자고 오대세가의 제자들인데! 오늘 네가 이긴 사람이 어느 문파라고?"
"……하북팽가였지."
"하북팽가에서 천하무림대회에 참가하러 온 이가 약하다는 게 말이나 되냐? 적어도 하북팽가의 젊은 무인 중에서는 스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말인데."
이기기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긴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일 격에 박살을 내 버렸다.
나름 격전을 치르다가 승리한 것이라면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겠지만, 너무 쉽게 이겨 버리니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이유야 뭐, 너무 간단하지."
누군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지옥 같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지옥이었을 줄이야."
"나는 다른 문파들도 명문이라면 다들 이 정도 수련은 하는 줄 알았지."
"……우리 진짜 죽다 살아난 거였구나."
화산의 제자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 망할 놈이 그동안 얼마나 그들을 지옥같이 몰아붙였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다들 기본적으로 서너 번쯤은 죽을 뻔했잖아?"
"절벽에서 줄도 없이 떨어진 것만 다섯 번이 넘는데 서너 번은 무슨 얼어 뒈질 서너 번이야!"
"나는 저 새끼가 후려친 목검에 얻어맞고 사흘 동안 기절했다 깨어났다. 살아난 게 용하지!"
분명 뭔가 감사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니 감사는커녕 억하심정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사람도 아니야, 진짜."
"결과가 좋으니 말도 못 하겠고."
백천도 그 말에 공감을 하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놈은 대체 뭘까?'
이제 상식이라는 범주 안에서 청명을 규정하는 것은 포기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새삼스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강하니 남도 잘 가르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다른 명문의 장문인들이나 전대 장로들이 청명보다 약하기야 하겠는가?
심지어 그런 그들이 직접 제자들을 봐주는 명문의 제자들이 화산 제자들의 일 격조차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한 일이었다.
"여하튼 확실한 건 하나 있잖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종이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엄청 셉니다."
"……."
"아니면 저 명문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생각보다 더럽게 약하든가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다.
평소의 백천이었다면 겨우 하루를 겪어 보고 섣부르게 말한다고 윤종을 나무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열다섯의 참가자 중 열이 첫날 비무를 치렀는데, 전원이 승리했다. 단순히 승리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처발라 버린 수준이다.
겸손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여기서 겸손 운운하는 게 얼마나 후안무치한 일인가?
연속으로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한 이가
'죄송합니다. 제가 운이 좋아서 그렇지, 사실 실력은 다른 분들이 더 뛰어납니다.'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날로 다른 선비들이 옷고름 풀고 광기 어린 투사로 돌변해 벼루로 대가리를 깨 버리겠다며 달려들고도 남을 것이다.
백천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이들을 통솔해야 할 대제자였다.
모두가 기쁨에 들뜨고 설렘을 참지 못하더라도 그만은 중심을 잡아야 한다.
"좋은 성적에 들뜨는 마음은 알겠지만, 다들 중심을 잘 잡도록 해라. 명문이라 불리는 이들의 저력이 겨우 이것일 리가 없다."
백천의 말을 듣는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일부터는 저들 역시 우리를 더욱 경계하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냉정함을 잊지 말아라. 우리는 여전히 저들과 비교할 수 없는 약체……."
쾅!
그 순간 문이 부서질 듯 열린다.
"뭐, 뭐야!"
"기습인가!"
화산의 제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문 쪽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엔 이내 황당함이 어렸다.
"현영 장……. 아니, 장문인?"
백천이 눈을 끔벅였다.
'뭐지? 순간 현영 장로님처럼 보였는데?'
문을 벌컥 열어젖힌 건 현종이었다.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그의 등 뒤에선 금방이라도 후광이 비칠 것만 같았다.
한껏 말려 올라간 입꼬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눈꼬리와 살짝 벌린 양팔.
그야말로 부처의 현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자, 장문인?"
"어서 오십시오! 장문인!"
현종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허허허허. 다들 고생이 많았구나. 정말 고생이 많았어!"
그러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조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천은 쓰게 웃었다.
꽤 오래도록 현종을 보아 왔지만, 저리 흡족해하고 기뻐하는 건 처음 보았다.
'하긴 왜 안 그러시겠는가.'
그는 비무대회에 앞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천하의 여러 명문의 장문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불려 갔었다.
그들의 텃세와 기세를 한가운데서 보고 왔었는데, 그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이토록 활약했으니.
기분이 날아가다 못해 당장 승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선조들께서 이 모습을 지켜보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지! 허허. 허허허허."
현종이 눈가를 슬쩍 훔쳤다.
그 모습에 모두가 숙연해지려고 할 때쯤이었다.
"거, 길 막고 서서 궁상떨지 마시고 이거나 좀 받으십시오!"
이번에는 진짜로 현영이 들어왔다.
그는 가슴 앞으로 커다란 바구니를 몇 개씩이나 층층이 쌓아 들고 있었다.
그 위태한 모습을 보며 현종이 물었다.
"이게 다 무엇이더냐?"
"밥입니다."
"밥? 웬 밥?"
"아, 당연히 애들 먹일 밥이지요!"
현영의 뜬금없는 말에 현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소림에서 식사를 제공해 주지 않더냐?"
"쯧쯧쯧쯧!"
현영은 현종을 보며 크게 혀를 찼다.
"거 식당에서 주는 거라고는 풀뿌리밖에 없던데, 그걸 먹고 어떻게 힘을 씁니까!"
현영이 탁자 위에 바구니를 올리고는 위에 덮인 천을 하나하나 걷었다.
그러자 바구니를 그득그득 메운 구운 닭고기와 돼지고기찜이 그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쓰지, 고기를! 어디 우리 귀한 애들한테 풀떼기를 먹이려고!"
현종의 눈이 커다랗게 부릅뜨였다.
"고, 고기?"
"예!"
"지금 소, 소림에서 고, 고기를 먹는다고?"
현종의 말에도 현영은 그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 어떻습니까. 저놈들이 중이지, 우리가 중인 것도 아닌데?"
"아, 아니 그래도……."
설마 세상에 정말로 절간에서 고기 찾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놈이 내 사제일 줄이야!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두고 현영은 아이들을 불러 고기를 먹기 좋게 펼쳐 놓기 시작했다.
"자, 어서들 먹어라! 먹어야 힘을 쓰지, 요 귀여운 놈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오냐, 오냐. 끌끌."
제자들이 고기를 물처럼 흡입하는 모습을, 현영이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남들이 보면 게걸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겠지만, 현영의 눈에는 병아리가 모이를 쪼아 먹는 것처럼 귀엽기 짝이 없었다.
"청명! 청명이는 어디 있느냐? 옳지! 거기에 있구나!"
그는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청명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다정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청명아, 고기다! 얼른 먹어야지!"
"고기!"
청명이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래. 풀떼기만 먹는다고 고생이 많았다. 내가 오늘부터는 매끼 고기를 먹여 주마!"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현종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뭐, 어떻습니까? 억울하면 이기라고 하십시오!"
"……."
현영이 세상 다시없는 호인 같은 얼굴로 고기를 뜯는 청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도 잘할 수 있겠지?"
"억엉 마에어. 애가이 아 애어릴 테이까."
"그래, 그래. 대가리! 그래. 하하하하하하핫!"
호쾌하게 술을 마시는 흑도인 같은 둘을 보며, 현종 역시 흐뭇하게 웃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뭐, 다 잘되겠지. 뭐.